가장 아름다운 노래
아가서 2:1-7
우리가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아가서는 이성간의 사랑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❶ 어떤 사람들은 이런 아가서의 내용을 보고, 아가서는 3류 소설이지 성경이 아니다 라고도 합니다. ❷ 그러나 아가 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은 아가 서를 사랑하고 애독하는 독자가 됩니다.
초대교회가 신학사상을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오리겐’은 성도들에게 다른 성경 말씀들을 다 섭렵하고 난 후에 아가 서를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육적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 아가 서를 안전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며, 아가서가 전해주고 있는 영적인 의미들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가서는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는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아가 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가서 1:1절을 보면 ‘솔로몬의 아가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아가’는 아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솔로몬이 지은 노래 중의 노래, 노래 중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가서가 어떻게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불려 지게 되었습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이 아가 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 고등학생 때 에릭시걸의 ‘러브스토리’가 인기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버드대를 다니는 부자 집 아들인 ‘올리버 베리트’가 근처에 있는 여대를 다니는 똑똑하고 예쁜 ‘제니’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올리버’의 집에서는 가난한 ‘제니’와의 사귐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올리버’는 부모의 도움 없이 나 스스로 살겠다고 집을 나와서, 허름한 방을 하나 얻어서 신혼살림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올리버’가 하버드 법과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면서 비로써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인생에 좋은 날만 있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병원에 갔다가, ‘제니’가 당시로서는 불치의 병인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의사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올리버’는, 의사에게 ‘앞으로 ‘제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의사는 상황이 악화 되어서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그냥 모르는 척하고 평상시처럼 대해주라고 권면합니다.
그 후 ‘제니’는 병이 악화되어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제니’를 보며 ‘올리버’는 ‘내가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 때 ‘제니’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사랑이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러브스토리는 이렇게 해서 ‘제니’는 25세 젊은 나이에 죽게 됨으로 끝나게 되는 아쉽고 슬픈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러브스토리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나는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이 ‘아가서’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아가 서에서도 때로 사랑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위기는 극복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가 서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입니다.
당시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술람미 여인’은 산골의 포도원지기였습니다. 두 사람의 신분의 차이는 마치 하늘과 땅처럼 달랐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아가서 2:1절 말씀을 보면 ‘술람미 여인’은 자기 자신의 자화상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샤론’은 유대지방에 있는 광야를 말합니다.
‘유대 광야’는 거의 황무지와 같은 곳입니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 유대 광야에는 비가 오면 잠깐 씩 물이 흐르는 골짜기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수선화와 백합화가 피어납니다. 그리고 이 수선화와 백합화는 유대광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꽃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술람미 여인’이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고 한 이 고백은, 나는 유대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선화와 백합화와 같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본 자화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술람미 여인을 ‘솔로몬’은 다르게 보았습니다.
아가서 2:2절입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로다.’ ‘솔로몬’의 눈에 다른 여자들은 다 가시나무와 같아 보이는데, 술람미 여인은 그 가운데 홀로 피어 있는 백합화와 같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술람이 여인의 눈에는 솔로몬이 어떻게 보였습니까?
아가서 2:3절입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술람미 여인이 볼 때 다른 남자들은 다 잡초 같이 보이는데, 솔로몬은 그 잡초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위풍당당한 사과나무와 같아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나무 그늘에 앉아서 기쁨을 느끼며, 사랑의 달콤한 열매를 먹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사랑을 보면,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는 겉 사람과 세상조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적 속사람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아가서가 보여주고 있는 사랑은 겉 사람과 세상 조건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속사람에 그 마음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랑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이 사랑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마력의 힘이 있습니다.
마치 한 겨울이 지나고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이, 텅 빈 들판에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게 하듯이, 사랑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 사랑의 힘이 일국의 왕인 솔로몬과 무명의 시골 처녀인 술람미 여인으로 하여금, 신분을 뛰어 넘고, 사회적 통념을 뛰어 넘고, 빈부귀천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을 하게 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이 아가서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불린 이유는, 세상에서의 신분과 조건과 환경을 넘어서는 놀라운 사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가서가 왜 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라 일컬어지고 있습니까?
두 번째 이유는, 아가서는 남녀 간의 사랑의 유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❶ 어떤 사람은 아가 서를 성 교육 교제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❷ 또 다른 사람은 아가 서를 부부들의 사랑의 교제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❸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그 사랑, 예수님이 성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덧없는 세속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서는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성 프란체스코’가 죄와 악과 불법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사랑의 힘으로 이런 아름다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음이 있는 곳에 사랑을, 중상(모략)이 있는 곳에 용서(관용)을, /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 어두운 곳에 당신의 빛을, 그리고 설움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많은 것을 구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셔 주소서. / 이는 줌으로써 받고, /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이 기도문이 아름다운 이유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이기적인 죄악을 극복한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성경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에 취해서, 평생 동안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주어진 삶을 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사람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사도요한입니다.
요한 1서 4:8절 말씀을 보면 사도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이 사랑의 하나님이,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은 이 사도요한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가 바로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사도 요한이 노년이 되었을 때,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가 주어지면 성도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아와서는 언제나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너희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고, 사랑하며 사는 삶에 대해 즐겨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도요한을 역사가들은 ‘사랑의 사도’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둘째,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 상에서, 자신을 사랑하셔서 직접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도바울이기 때문에 그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 그 (예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너희가) 깨달아 /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자기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구하였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기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어 낼 수 있는 피조물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노래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소리 높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이 사랑에 대해 이사야서 53 장에서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더 많은 사랑의 기록들을 살펴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정리해야 할 것은, 아가서가 보여주고 있는 그 사랑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면, 우리는 이 아가 서를 성경 전체와의 연관시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과 아가 서를 상호 보완적인 말씀으로 보고 함께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 셋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 다른 성경에 기록해 주신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베소서 5: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면 비밀이란 무엇입니까? 누구나 다 아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남녀가 하게 되는 결혼은, 신랑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신부가 되는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다 알려주시고 나 후에 이것은 비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비밀이라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사람들이 이 에베소서의 말씀을 읽고 ‘아 남녀의 결혼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보여주시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하고 계신 뜻과 의미를 깨달아야 참으로 아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 성경은 남녀 관계를 세 가지 관점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2: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모든 아내들이 다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삽니까? 그렇지 않지요. 이렇게 볼 때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돕는 배필로 사는 것은 별개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비밀이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이 관계가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비밀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7:17절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사람에게서부터 왔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반대로 뒤집어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사람에게서부터 내게 왔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을 바꾸어보면 비밀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이후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제자들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고 따른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많은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❶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뿐이지 실재로는 예수님을 위해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금방 ‘우리가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충성을 맹세해 놓고는, 금방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가고, 심지어 베드로는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❷ 그런데 가룟 유다는 달랐습니다. 유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 유다가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구세주로 오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야 나라를 이루어 가는 일에 자신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성을 다해 따랐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앞에 둔 시점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니, 예수님은 이제까지 자신이 믿고 따랐던 그런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의 나라를 이룰 생각은 하지 않으시고, 나는 죽을 것이다.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 라는 말씀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나약한 모습을 보면서 유다는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이 실망은 때로 불평으로 나타났고, 때로는 반발로 나타나고, 때로는 은근히 비난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예수에게 속아서 3년 반이라는 세월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자, 지나가 버린 세월이 너무나 아깝고 분하여서, 예수님의 대적이었던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다처럼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다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가지시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성도들보다 더 불행한 성도는 이 세상에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돕는 배필로서 역할을 잘 할 때에는, 잠언 31:10절 이하의 말씀과 같이 ‘그 덕행과 행실이 바른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는 칭찬과 칭송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인 아내가 ‘나는 도저히 내 남편의 뜻을 따라 살 수 없다.’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그 남편과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좋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창세기 2:18절의 이 말씀은, 아직 세상이 타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 믿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기 이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음이 있는 자나 믿음이 없는 자 즉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도 이 말씀 아래 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2. 인간이 범죄 한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또 믿음이 세상에 온 이후에는 하나님이 새로운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❶ 아내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3:16절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❷ 남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3:17-19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이들에게 첫째, 하나님이 주신 것은 고통입니다.
하와에게는 해산하는 고통을, 아담에게는 생존을 위해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고통을 주셨겠습니까?
만약 이들이 죄를 짓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주신 고통과 죽음은 형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시려고 주신 은혜의 장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으로 선택해 주신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대로 살 수 있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얻을 육체가 없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통해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제사를 통해 믿음으로 그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이 제사의식이 바로 우리 구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사람들이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해도 이들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은 바로 구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주신 복음의 약속을 믿고 나아오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교회는 이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둘째, 그것은 하와를 아담의 권위 아래 두신 것입니다.
사람의 성향을 보면 대부분 남편은 보수적이고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고, 아내는 개방적이고 창의적이고 진취적입니다. 그래서 가정사의 소소한 문제들은 아내 말을 듣는 것이 훨씬 났습니다. 그러면 실수를 덜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내의 개방적이고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은 유혹에 약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마귀가 보수적이고 융통성도 없고 꽉 막힌 아담을 유혹했더라면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아담이 유혹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는데 정말 그런지 내가 하나님께 물어보고 올게’ 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비키니를 입고,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그 몸매 자랑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참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성경은 아름답게 되려면 외모를 꾸미지 말고 마음을 단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합니까?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유혹에 가까운 몸단장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풍조에 누가 민감합니까? 누가 이런 세상 풍조를 잘 따라 갑니까? 여성들입니다. 여성들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여성은 죄의 유혹에 악합니다.
하나님이 진취적이며 아름다움에 민감하고 훨씬 더 창의적인 하와를, 보수적이며 유행에 대해서는 아주 무감각한 아담의 권위 아래 두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와와 같이 여성들이 다시 유혹을 받을 때, 곧 바로 범죄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아담이라는 방패막이를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역사는 이후 남성 중심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남성들은 이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악용하여 여성들을 억압하는 구조로 사회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들이 불평등과 인권유린을 당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남성 중심의 사회제도를 통해 인류 역사가 급속하게 타락해 가는 것을 막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21세기 오늘날 인류는 아주 급속도로 타락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중요시 하는 이 시대정신이, 하나님이 주신 안전장치를 해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여성 해방, 여성 상위, 페미니즘 운동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운동들이 가정의 해체를 가져왔습니다.
한번 풀어진 안전장치를 다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제 인류역사는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 노아의 때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에 이런 인류 역사의 종착역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급박한 시대현실을 우리 모두 읽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3.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된 성도들에게 주신 것은 말씀이 에베소서 5:22-25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 말씀도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살펴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펴볼 시간도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이런 삶은, 그 사람이 가지게 된 신앙과 연관시켜서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할 때 신앙에 기초해서 복종을 해야 하고,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할 때 신앙에 기초해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무엇보다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남편은 아내를 잘 대해 주고, 아내 또한 남편에게 잘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잘해주면 사는 삶이 아무리 훌륭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은 그런 정도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준이 이 세상의 윤리가 되고 도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 중에 가장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에서까지, 윤리 도덕적인 삶의 행위를 말씀하고 있지 않고,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기독교는 높은 수준의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종교이지만, 그럴지라도 기독교는 결코 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높은 도덕 수준의 삶을 살아가게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는 결코 도덕적인 종교는 아닌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아무리 윤리적인 삶을 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도, 그런 사람은 기독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은, 우리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은 믿음에서 나오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온 삶들만 인정해 주십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가 된 우리들이 집중해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 세상을 향해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 받게 하는 복음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해주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은 교회가 세상에 전해주어야 할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잘못된 기복신앙이 자꾸 믿음으로 받아 누릴 삶에 대해 말하지만,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신. 불신에 관계없이 이구동성으로 하고 있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많은데 그 믿고 있는 믿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적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은 두 가지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 가지고 있다고 하는 믿음이 바르지 않든지, 다른 하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 것이라고 하고 있는 성경이 잘못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 것이라고 하고 있는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믿음의 삶에 대해, 노아의 시대와 같고 롯의 시대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인자가 올 때에 즉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들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두고 한 말씀이라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가서가 전해 주고 있는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가지고 살아가야 할 신앙과 삶의 문제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대로, 우리가 가진 믿음과 삶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런 균형 잡힌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삶이 균형 잡힌 신앙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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