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서

감동을 주는 삶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10. 4. 18:57

감동을 주는 삶

룻기 1:1-18

 

이 세상에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도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실화일 때는 더 큰 감동을 주게 됩니다.

 

감동을 주는 실화 중에 아주 유명한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어느 지방에 이라는 아버지와 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은 태어날 때 그 목에 탯줄이 감겨서 태어났는데, 이것 때문에 뇌에 산소가 잘 공급되지 못하여서 결국 뇌성마비경련성 전신마비 증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태어나게 된 은 결국 혼자 걷지도 못하였고,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 나중에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단답형의 간단한 언어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 아니요. 가고 싶다. 자고 싶다.’ 뭐 이런 간단한 말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도 하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던 이 이 어느 날 컴퓨터를 통해 나도 달리고 싶다.’라고 처음으로 자기마음, 자기감정을 표현하였습니다.

 

그 아버지 은 이런 아들의 의지에 화답하여서, 그 다음 날 곧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 과 함께 걷고 달리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몇 년을 연습한 결과 15세가 되었을 때 약 8Km의 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던 에게 이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용기를 얻은 은 그 후 1년 동안 꾸준히 연습을 한 후 42.195Km를 달리는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라톤 경주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쉽지가 않습니다. 신체장애가 있는 릭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었습니다. 릭은 1/4도 달리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게 됩니다.

 

이 일 후에도 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해서 결국에는 42.195Km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게 됩니다. 그날 저녁 은 다시 컴퓨터를 통해 그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제 몸에서 장애가 사라진 것 같아요.’ 이 말은 그간 아들을 위해 헌신해온 아버지 딕이 받은 최고의 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족해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릭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 이번에는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여러분 철인 3종 경기가 어떤 경기인지 잘 아시지요? 철인 3종 경기는 달리기수영자전거 타기를 함께 해야 하는 아주 힘든 경기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도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수영도 못하고, 자전거도 한 번 타보지 못한 , 이 철인 3종 경기를 해 보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이후 그 아버지는 그 아들 과 함께 아주 많은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은 고무배를 타고 3.9Km의 바다를 수영하였고, 자전거를 타고 18.2Km를 달렸고, 휠체어를 타고 42.195Km를 다 달린 후,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한 선수 중에 제일 늦게 결승점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철인 3종 경기이 참가했다는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이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하고 결승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인간승리의 현장을 보면서 전 관중이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쳐 주며 환영했다고 합니다.

 

아나운서가 에게 완주한 소감이 어떠냐?’라고 물었습니다.

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전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언제나 상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이제 나는 I can 즉 나도 할 수 있다는 단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이제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감동적인 이야기 뿐 아니라 어머니의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소년이 한 쪽 눈이 없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매일 친구들의 놀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 너 네 엄마는 애꾸눈이지, 애꾸눈이지 라고 하면서 이 소년을 놀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너 네 엄마는 병신이지, 병신이지하며 놀려 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소년은 한쪽 눈이 없는 그 엄마가 너무 싫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운동회는 특별히 부모님과 함께 하는 운동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엄마에게 운동회를 한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왜요. 엄마가 학교 오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운동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운동회 도중에 뒤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한쪽 눈이 없는 엄마가 와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은 갑자기 화가 나고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날 운동회에 온 엄마에게 막 짜증을 내었습니다. 엄마는 왜 한 쪽 눈이 없는 거야!’ ‘왜 한쪽 눈이 없어가지고 내가 매일 다른 애들에게 놀림을 받게 하는 거야!’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소년은 울고 계신 엄마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내가 어제 너무 심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잊어버리고 그 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소년이 커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아내도 생기고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소년의 집에 누군가가 와서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바로 그 엄마였습니다. 엄마는 한쪽 눈이 없는 채로 거기 서 계셨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저 사람 누구냐? 아는 사람이야?’

남편은 아냐! 모르는 사람이야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이봐요. 누군데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볼일 없으니 그냥 가세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거기 서 있는 사람이 자기 엄마라는 것이 아내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는 내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봐요? 죄송합니다.’ 라고 하며 가 버리셨습니다. 이 사람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고, 앞으로는 엄마가 찾아오질 않길 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그 엄마가 아프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아내에게는 회사일 때문에 어디 좀 갔다 온다고 하고는 그 엄마가 계신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는 이미 방 안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런 엄마 옆에 편지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겉봉투에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아들아 이제 엄마는 살 만큼 산 것 같구나, 우리 아들 한쪽 눈 없는 엄마가 보기 싫었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우리 아들 찾으러 안 갈께. 내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네가 온다고 하니 나는 너무 행복했단다.

내가 한 쪽 눈이 없는 이유는 우리 아들이 옛날에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단다. 그래서 나는 내 한쪽 눈을 아들에게 이식해 주었지. 그래서 우리 아들은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지, 그것이 엄마에게는 큰 행복이었단다. 아들아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울면 안 된다. 알았지.’ ‘내 행복은 바로 네가 행복해 지는 것이란다.’

 

어머니의 유언 같은 편지를 읽고 있던 이 사람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머니가 이식해 준 그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 엄마에게 맛있는 것도 못 사주었는데, 나는 아직 엄마에게 예쁜 옷도 못 입혀 드렸는데. 엄마가 먼저 가시면 어떻게 해요. 엄마 죄송해요. 이 못난 아들을 용서해 주세요.’ 라고 소리치며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위해 자기 인생을 다 바친 아버지 이야기나, 아들을 위해 자기 눈을 빼주었던 어머니 이야기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우리를 감동시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성경 속에도 이 감동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감동이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서는 우르라는 단어로 사용되어 있고, 신약성경에서는 이라는 단어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의미를 보면 우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해 주실 때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감동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혹은 우리와 함께 하해 주실 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느끼게 되는 감동을 나타내 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역사 속에 개입해 주실 때,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해 주실 때, 우리는 감동을 느끼고, 또 감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단어의 의미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감동하심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읽으면서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치 인간 부모가 장차 태어날 자기 자녀를 위해서, 미리 귀저기도 준비해 놓고, 베넷저고리도 준비해 놓고, 요람도 준비해 놓고, 유모차도 준비해 놓는 등 아기가 태어나면 필요로 하는 모든 준비를 다 해 놓고 그 자녀를 출산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앞으로 창조할 아담과 하와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으시고 난 후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렇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자신들을 위해서 너무나도 세밀하게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에 감동하고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삶은 매일 매순간 이런 감동과 감격의 삶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갔던 정탐 군들이 가나안 땅에서 나는 포도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포도송이가 얼마나 큰지 장대에 끼워서 장정 둘이 메고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포도의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이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가나안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 했겠습니까?

 

이때는 아담의 범죄로 땅이 척박하게 된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난 때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포도가 꿀과 같이 달았다면, 에덴동산에서는 이 포도가 얼마나 더 달고 맛이 있었겠습니까? 아마 에덴동산에서는 매일 포도만 먹어도 전혀 질리지 않고 살 수 있었을 정도로 포도의 맛도 좋고, 영양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를 거치면서 수많은 과일들이 멸종하였고 지금은 아주 일부분만 남아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다양한 과일들을 먹으면서, 그런 과일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감동은 먹는 것에 국한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8편을 통해 무엇에 감격하고 있습니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다윗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그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를 보면서, 그 우주에 비하면 티끌 같이 작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배려하시고 돌보아주고 계신 은혜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하며 놀라워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 받게 되었을 때 어떠했습니까?

여러분이 처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때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있었습니까? 아마세상 부귀영화를 다 가졌다는 진시황제가 부럽지 않았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갑부라고 하는 빌게이츠가 부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우리 영혼은 이미 만족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 외에 다른 무엇을 더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잠깐 잠깐 받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이렇게 크다면, 에덴동산에서 늘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며 살았던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감사와 감격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담과 하와에게는 더 이상 부러운 것도 없었고, 더 이상 욕심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누리며 살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 속에서 늘 만족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는 이런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단 마귀의 역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둘째, 사단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서 감동을 감격을 빼앗아가는 일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살았던 감동과 감격을 빼앗아 가 버린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 사단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하였고, 그 죄는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은혜에 대한 감동을 감격을 다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10:10절 말씀을 보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가지고 사는 믿음의 감동들을, 은혜에 대한 감격들을 다 빼앗아 가 버리는 일을 합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왔습니까?

첫째는 두려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 곧 죄에 대한 두려움, 죄가 가져다 준 심판의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수치와 부끄러움입니다. 죄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치를 가려보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지만 그런 것으로는 그 수치스런 마음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셋째는 관계의 단절이었습니다. 아담이 전에는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이후에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함으로 단절된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이 관계의 단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 사람과의 관계의 단절, 세상과의 관계의 단절,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이전 아담과 하와에게는 이 모든 관계가 다 원만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모든 관계를 깨뜨리고 파탄 내 버린 것입니다.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은 인본주의가 주도적인 정신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고 있는 이 인본주의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인본주의의 극단적인 열매라고 하는 공산주의의 실패가 우리에게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이룩한 인본주의 문화는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더욱 더 극심한 경쟁 사회가 되게 하고, 더욱 더 지능적인 범죄가 판을 치는 사회가 되어가게 합니다.

 

인본주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21살 때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일명 루게릭병을 앓는 바람에 겨우 목만 가눌 정도의 건강을 가지고 평생 휠체어를 의지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특이점에 대한 여러 정리를 하였고, 블랙홀이 열복사를 방출한다는 것을 밝혀내는 등 중요한 과학적 업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런 그는 자신과 같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신의 저주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말을 하였고, 나중에는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천국과 사후세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든 동화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좀 더 살았다면 결국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니체와 같이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그런 신은 없다라고 하며 신을 부인하는 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시편 14:1, 53:1절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호킹 박사는 이 세상이 지혜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는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 하면 예수를 믿고 있는 어린 아이보다 더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함께 해 주셨기 때입니다. 또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 영 안에 부어주셨기 때입니다. 우리는 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2:20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안에 오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고, 또 하늘나라의 비밀들을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주신 것 안에 거하고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9-10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 우리 안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고, 우리에게 바른 믿음과 올바른 이해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사단 마귀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사단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건조하고 메마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사단의 종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의 종이 되었던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셋째, 감동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까?

 

한 버스 기사의 이야기

한 버스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버스 기사는 어느 때와 같이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하다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그 바로 앞 행단보도에 한 어린애가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가 순간적으로 생각을 해 보니 상황이 이랬습니다.

자신이 몰고 가고 있는 버스 안에는 30명 정도의 승객이 타고 있었고, 앞 횡단보도에는 한 아이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치고 지나가면 30명의 승객을 살릴 수 있고, 그 아이를 살리려고 핸들을 돌리면 많은 승객이 죽고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버스기사는 고민 하다가 결국 그 아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버스 안에서는 이제 살았다라고 하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버스 기사를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 버스기사는 버스에서 내려 길바닥에 죽어 있는 아이에게로 가서 그 아이를 안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미안하다. 내 아들아!’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버스 기사는 30명의 승객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가장 감동하였던 것이 이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 버스 기사처럼 나를 살려 주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 대신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격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감격을 가지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시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짊어지고 죽어야 할 그 많은 죄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하나 자기에게로 옮기시고,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와 거룩과 영생과 생명을 하나하나 우리들에게로 옮기셨습니다.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외에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들에서는 기독교만 구원의 길이 아니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미 1965128일 당시 교황이던 성 바오로 주교에 의해 비 그리스도교 선언을 한 바 있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가장 많이 유학을 가는 미국 플러신학교 총장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망언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 남 침례교 총장도 나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신학교 총장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현대교회의 자화상입니다. 시대 상황이 이럴지라도 참된 신앙을 가진 성도들 이런 주장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믿고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고 있는 성도들은 결코 이런 주장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아멘.

 

그러면 이 사람들은 왜 이런 주장을 합니까?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신학을 하고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이성으로 신학을 하고 이성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대로 이런 엉터리 같은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구속을 믿고 있고 그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격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보편 구원론을 믿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의 말대로 보편 구원론이 진리이고 맞는 말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그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 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어떤 감동을 주십니까?

우리 삶에 함께 해 주시면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보호해 주심을 통해 감동해 주십니다.

 

우리가 섬기며 사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 주었으니, 이제는 네 힘으로 살아봐라 하고 우리를 내 버려두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 자녀가 걸음마를 배울 때 자녀가 혹 넘어져서 다칠까봐 단 한 순간도 그 자녀에게서 눈을 때지 않고 바라보고 있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혹시 우리가 잘못 될까봐 우리에게서 단 한 순간도 그 눈을 때지 않고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모습을 성경은 마치 우리가 우리 눈동자를 지키듯이 그렇게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누가 우리를 범하면 그 사람을 마치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한 자처럼 대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무엇이라 고백하고 있습니까?

주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에 우리교회 시각장애인 반주자 박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멀리 부천에서 오기 때문에 1호선전철을 타고 와서 서울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교회까지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매주일, 수요일에 꼭 나와서 반주를 했습니다.

 

저도 박 집사님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교회에 반주하러 오는지 알고 싶어서 몰래 따라가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으로 교회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서울 역 환승 통로에는 가끔 보따리 장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과 부딪히거나 그 놓아둔 물건 때문에 넘어지는 수도 있었습니다. 그 후 저의 중요한 기도제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박 집사님이 아무 사고 없이 교회 올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늘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기도에 응답해 주심에 대한 감사와 감동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눈동자 같이 돌보아 주시는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도 주의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돌보아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안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 이 시대는 믿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왜 어렵고 힘든 삶도 포기하지 않고 어렵고 힘든 목회를 포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개입하셔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함께 하시면서 감동을 주시고, 우리 안에 주신 성령을 통해 감동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제까지 믿음으로 살아온 힘의 근원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명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하나님의 법궤를 매고 벧베세메스로 올라갔던 어미 소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미 소는 그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모성을 부인하고 울면서 그 길을 올라갔습니다. 사명 자가 되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보십시오. 비록 그 사명의 길이 고생의 길이라도 가야 했고, 심지어 죽음의 길이라도 가야 했습니다.

 

나의 삶과 사역을 통해 유익을 얻게 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3-24절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일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에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하나님이 계신 3층천의 하늘까지 경험한 사람입니다.

3층천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었든지, 자기 입장에서는 빨리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라에 가서 사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이 이 세상에 더 살았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의 사역을 통해 유익을 얻게 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누구보다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땅에 조금 더 사는 것보다 빨리 저 천국에 가서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또는 나를 통해 유익을 얻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나의 아내이고 남편일 수 있습니다. 나의 자녀이고 가족일 수 있습니다. 나의 친척이나 내가 아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로 인해 유익을 얻게 될 그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서 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내게 맡겨주신 이 사명을 위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감동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과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완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면 그 사람이 변하고 그 삶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신실한 성도들도 감동을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룻기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룻기는 4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삶을 보면 이들은 믿음의 고백을 통해,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서로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할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삶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삶이 바로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통해 성도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룻기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룻기에서는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는 신앙과 진심어린 마음과 선의와 사랑과 배려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룻기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 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가진 진심이, 믿음이, 사랑이,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진한 감격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면 그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 거듭난 성도의 표증들이 열매들이 증거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런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 이렇게 그리스도인 됨의 향기나 냄새들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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