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롯의 때와 같으리니
누가복음17:26~30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비슷한 일이 역사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누가복음 17장의 말씀도 바로 그 한 증거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날은 이전에 있었던 심판의 날인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어떤 면에서 같다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는 것이 같다고 합니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한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가 이런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도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어떤 면에서 같다는 것입니까?
둘째, 하나님의 심판 중에도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은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구원하시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전에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때에도 심판과 구원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도 일어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재림의 장을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두 부류로 구분될 것입니다. 그 한 부류는 심판을 받아 멸망할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이 심판의 와중에도 구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그 가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노아의 가족과 롯의 가족과 같이, 예수님이 재림이 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날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복 있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어떤 면에서 같다는 것입니까?
셋째, 동성애가 온 세상에 만연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 같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주저함 없이 이 시대를 말세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시대가 말세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로 꼽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적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동성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인간 존엄성의 상실을 가져오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고 있는 것이 바로 ‘도덕성 상실’입니다. 인간이 도덕성을 상실하자 이 도덕성 상실은 음란한 사회를 만들어 갔고, 음란한 사회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동성애’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았던 당시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바로 창세기 19:4-5절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상관하겠다.’는 말은 ‘동성연애’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주의해서 읽어보면, 이 사람들은 단순히 그 사람들과 동성연애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동성연애를 하되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강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 시대 용어로는 ‘성폭행’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이 어떠합니까? 지방자치 단체장인 부산 시장과 서울 시장이 부하직원을 성폭행한 행위로 고발되어 그 직책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은밀히 행한 성폭행이 드러나자 사회적인 문제가 될 정도로 도덕이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소돔 성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소돔 성에 살고 있는 일부 불량배들이 롯의 집을 찾아가서 공개적으로 무슨 요구를 했습니까? 우리가 너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과 동성연애를 하되 강제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우리에게 내어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소돔성 사람들이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 이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이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돔 성에 살고 있는 불량배들이 롯에게 이런 요청을 할 때, 소돔 성 사람들은 이 일의 결말을 보려고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노소’라는 말을 보면 노인에서 어린아이들까지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고, ‘원근’이라는 말을 보면 멀리 사는 사람들이나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다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일은 은밀히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동성연애는 이미 보편적인 사회현상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소돔 성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당시 소돔성에서는 인류의 정상적인 도덕관이 무너지고 비정상적인 도덕관이 사회의 공통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가치관이 전도되는 현상이 범세계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동성애를 죄로 보지 않는 이런 가치관을 가진 국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성적인 타락이 극해 달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가 변하고 타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얼마 있지 않으면 동성애를 인정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결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시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는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 시대도 사실은 롯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동성애의 합법화는 오늘날 범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우리 시대는 동성연애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권을 보호하는 사람 취급을 받고, 동성연애를 막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인권을 유린하는 반사회적인 사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성애 합법화는 곧 바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처벌하는 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세계적으로 동성결혼을 가장 먼저 합법화한 나라는 네덜란드입니다.
네덜란드는 1993년에 이미 동성애 커플의 결혼과 이혼을 허용하는 법을 제정하였고, 2001년 4월부터 그 법을 시행해 오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뒤를 따라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는 벨기에입니다. 벨기에는 2003년 3월에 네덜란드의 뒤를 따라 동성 결혼을 합법화 하였습니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정하고 지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법률로 제정하여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이들 두 국가에서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국가, 두 국가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 되어가자 그 다음에는 아주 빠른 속도로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 되어 나갔습니다.
2012년 5월9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아주 충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동성커플이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런 생각을 분명히 밝히고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발언은 선거를 앞두고 나왔습니다.
정치인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로 표입니다. 오바마가 선거를 앞두고 이 말을 하였다는 것은 미국인들 중에 동성애를 거부하는 사람들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표를 더 얻기 위해 동성애를 지지하는 견해를 표명한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강한 동성애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2005년에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는 동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또 여의도 순복음교회 사이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성애자의 모임’이라는 코너가 만들어 졌다가 운영자의 직권에 의해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럴싸합니다.
이 사람들은 동성애를 성적 성향 혹은 성적 지향성이라고 합니다. 보통 남자는 남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여자는 여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이성에게 끌리는 것이 보통인데, 동성애자들은 동성에게 끌리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은 비록 남자이나 여자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고, 자기의 몸은 비록 여자이나 남자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성향이 그런데 그 성향대로 사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고 하느냐?’ 라고 항변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성적인 소수자라고 인식하고, 약자를 존중하고 소수의견을 존중해 주듯이,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도 존중해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지지합니다. 그리고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많아져 가고 있으며, 심지어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도 상당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향한 성경의 견해는 아주 분명합니다.
레위기 20:13절입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죽이라고 합니다.
동성애자들을 직접 만나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동성애자들 중에는 성적 소수자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쾌락을 추구하는 타락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대학 동아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일반 학교 내에서는 ‘섹스동아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학교 안의 동아리들을 보면 그냥 축구동아리, 영어동아리, 음악동아리, 운동 동아리 등등은 있어도 섹스를 위한 동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학교 안에 ‘게이동아리’나 ‘레즈비언’ 동아리들을 만듭니다. ‘게이’는 남자 동성애자들을 말하며, ‘레즈비언’은 여자 동성애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이런 동아리에 만들어서 무엇을 합니까? 동성을 만나서 섹스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백번 양보를 해서, 정말로 그 사람들의 말과 같이 나는 태어나기는 여성으로 태어났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은 남성인 기독교인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성경적인 삶일까요?
그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는 여성이지만 남성성을 가지고 있어서, 혹은 나는 남성이지만 여성성을 가지고 있어서, 도저히 이성을 만나 결혼하여 살 수 없을 것 같으면, 이런 사람들은 굳이 성경이 금하고 있는 동성 배우자를 찾지 말고, 성경이 인정을 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 독신자로 평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도 어기지 않고, 자신의 성적 성향도 보전할 수 있잖아요?
요즘은 우리 주변을 보면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부들을 보십시오. 수녀들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목적 때문에 신앙 안에서 혼자 사는 것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원하지 않지만 농촌에 살고 있어서, 생활환경이 되지 않아서 결혼을 못하고 사는 노총각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다가 결혼 적년 기를 넘겨 버려서, 결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실명을 거론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도 혼자 사셨던 분이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혼자 사는 것도 그렇게 허물이 되지 않는 시대입니다. 요즘은 이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라고 혼자 살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동성애자는 혼자 살아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정말 성적 소수자로 태어났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독신으로 혼자 살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도 지키고 내 신앙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동성애자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동성애자들에게 관용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흘러가는 물줄기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 때와 같은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이 경계하고 있는 롯의 때와 같아져 가고 있습니다. 롯의 때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한 종말의 때였듯이, 오늘 이 시대도 종말의 때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 이 시대는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이른 때라는 말이 됩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재림의 날이 아주 가까이 이르러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잠자는 신앙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직시하고 깨어 있는 성도가 되는 것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육신의 삶으로 주어진 일에도 성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성실해야 하는 것은 영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절망과 고통과 한탄과 탄식만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각오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어떤 면에서 같다는 것입니까?
넷째, 사람들이 그 중심에 자기를 두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같습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종말의 날은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7:27, 29절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이 말씀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자기가 그 삶의 중심이 되어서,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이 세상일에 몰두하며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자기를 그 중심에 두고, 자기 삶에 유익을 주는 일들에만 관심이 있어 합니다. 그래도 이런 사람들은 건전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지 세상에서는 장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삶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게임이나 오락이나 도박에 빠져 아까운 시간만 보내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희망이 없고, 하늘에서도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미련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잠언 서를 보면 이런 사람들에 대한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잠언을 읽고 삶의 지혜의 얻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달랐습니까? 아닙니다.
노아의 때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아내를 택할 때 믿음을 중요시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믿음이 없어도 얼굴만 예쁘면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성경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사는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노아시대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성도들의 삶에 얼마나 실망하셨으면 이런 말씀까지 하셨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인 믿음의 사람들이, 그 영이 죽고 육신이 되어 세상과 같이 자기를 그 중심에 둔 죄악 된 삶을 살게 되자, 곧 바로 이 세상은 죄악이 관영한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악 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 때의 상황입니다.
그러면 롯의 때는 어떠했습니까?
롯의 가정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을 버리고 소돔 성에 들어가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도시에서는 광야에서처럼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이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롯의 삶을 베드로후서 2:7절 말씀에서는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소돔 성에서 살았던 롯의 가족들의 삶은, 전에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던 삶과 달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만 세상과 세상에서 얻게 될 유익에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과 세상이 주는 유익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듯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도 이 세상과 세상이 주는 유익을 얻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그 욕망을 포장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처음 예수 믿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세상 사람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나, 성도들이 자기 교회 성장이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전도하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유무상통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예루살렘 교회를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라는 환난을 통해 세상 속으로 흩으셨습니다. 어떻게 그 이상적인 교회, 모든 교회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교회를 하나님은 흩으셨을까요?
시대를 넘어서서 우리 현실로 이 문제를 가지고 와 봅시다.
한국에 있는 교회 중에 가장 모델이 될 만한 교회, 가장 모범적인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 교회를 그냥 두면 사람들은 이 우수한 교회로 모여들게 되고, 그러면 다른 교회들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교회를 치셔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흩으시면, 이 교회 성도들은 20명 30명 50명 100명씩 흩어져서 다른 교회를 세울 수도 있고, 또 흩어져서 자기 집 인근에 있는 교회로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큰 교회에서 훈련 받고 흩어진 그 성도들로 인해서 수많은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고, 혹은 수많은 개척교회들이 활력과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면서 이루었던 놀라운 선교역사와 같은 은혜의 역사가 오늘날도 일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흩으시기 전에 큰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이 일을 하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자발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라는 극약처방을 하시면서 흩으신 것입니다.
특히 종말 시대에 이런 결단을 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성경은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디모데후서 3:1절 이하를 보면 ‘자기가 그 삶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 사상에 빠져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우리 신앙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옥석은 바로 ‘자기중심주의 신앙을 가졌는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을 그 중심에 둔 신앙을 가졌는가? 하나님과 그 도래하는 나라를 중심에 두고 사는 신앙을 가졌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멘.
직장을 다녀도, 공부를 해도, 가정생활 속에서, 교회 생활 속에서도, ‘자기를 그 중심에 두고 사느냐?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사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어떤 면에서 같다는 것입니까?
다섯째, 상대적인 진리는 있어도 절대적인 진리가 설 자리가 없는 시대라는 점이 같습니다.
창세기 19:7절 말씀을 보면 롯이 소돔 성 사람들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롯은 소돔 성 사람들에게 악행을 멈추라고 합니다. 그러나 소돔 성 사람들은 롯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악행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소돔에 살고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악행에 동참하거나 방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소돔에서는 인류역사 속에서 절대적인 가치였던 윤리 도덕이 사라져 버린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시대도 그렇지 않습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관심에는, ‘학문을 열심히 습득하고, 훌륭하게 자라나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등등의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오직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사고, 좋은 집을 소유하고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비록 초가집에 살았지만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신 청렴결백한 황의 정승이야기가 인기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에게는 이런 이야기는 씨도 안 먹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에는 땅 투기를 해서 갑작스럽게 돈 번 사람들을 졸부라고 하였습니다.
졸부처럼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사 청문회를 하는 것을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땅 투기로 돈을 모으고, 아파트 투기를 하여서 돈을 모은 것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시대는 사회적인 통념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사농공상이라고 해서 상업하는 사람을 가장 천히 여겼는데, 지금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재벌가를 이루고 있고, 또 그런 집에 며느리가 되는 것을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남을 위한 박애정신, 양보정신, 희생정신보다는 이기적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고고한 학문보다는 물질을 숭상하는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로 변해 버렸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소돔과 고모라 때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진리는 무시되고, 오직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삶을 추구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또 당시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롯의 말을 사위들까지도 농담으로 받아들였던 시대였습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이것은 멸망당할 시대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할 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전했으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22:20-22절입니다.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러 ‘속히 오리라.’라고 수없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12사도가 살아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주의 종들이 재림을 외치며 전파해 왔습니다. 또 지금은 12사도들이 살았던 시대 보다 2,000년 이상이나 더 재림이 가까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재림을 이야기하면 먼저 저사람 ‘이단이 아닌가?’ 라는 의심부터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더 웃긴 것은, 소돔이 멸망당할 때 롯이 옳고 그 사위가 잘못 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레미야 때도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친 예레미야가 참선지자였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사도 신경을 외울 때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 라고 매 주일 예배시간마다 외우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면 듣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영적인 현실이고 영적인 실상입니다.
이런 우리 시대는 마치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은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시대변화를 보고 읽고 잠자는 신앙에서 깨어 일어나서 재림의 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도 소돔과 고모라 시대처럼 심판의 날이 가까 왔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노아의 시대처럼 심판의 날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철저히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들이라도 깨어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깨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준비하고 예비한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비하고 준비한 가운데 기쁨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신부 반열에 서서 살아야 합니다.
이 복된 믿음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과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