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신앙

천사를 영접한 롯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8. 21. 15:46

천사를 영접한 롯

창세기 19:1-3

 

전에 미국은 노예제도의 문제로 남과 북이 나누어져 전쟁을 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노예해방을 주장하였던 북부의 주들과 노예제도의 존속을 원하였던 남부의 주들이 전쟁을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남북전쟁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4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북부의 주들은 약 20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서 36만 여명이 전사하였고, 남부의 주들은 607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서 25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북부의 주들이 이겼고 노예는 해방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흑인노예에 대한 차별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흑인과 백인이 평등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시대 미국의 북쪽지방에 살던 한 흑인이 남부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출장지에서 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보통 교회는 매주 11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었던 이 사람은 정성껏 헌금을 준비하여서 숙소 근처에 있는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이 사람이 예배당 앞 계단을 올라가서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문 안에서 안내를 보고 있던 어떤 백인이 이 사람의 앞을 가로막으며, 당신은 여기 들어오지 못합니다.’ ‘당신은 여기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흑인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해 하면서 왜 제가 이 교회에 들어가지 못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안내를 보고 있던 그 백인이 이 교회는 백인들만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입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예배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이 흑인은 그 가까운 곳에 다른 교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또 교회가 있다고 해도 벌써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교회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교회 안에서 들려오는 찬송 소리를 들으면서 혼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비몽사몽간에 흰옷을 입으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어째서 여기에 앉아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흑인은 예수님 저는 예배를 드리려고 이 교회를 찾아 왔는데 제 얼굴이 검다고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여기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흑인에게 너도 그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했느냐? 나도 그 예배당에는 아직까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느니라.’라고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백인들의 교회와 같이 하나님도 없이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신약성경을 보면 예배에 대해 가르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말씀이 요한복음 4장의 예수님수가 성 여인과의 대화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다가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갑자기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질문에 예수님은 예배에서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예배드리는 사람의 믿음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러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진리는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예배에는 반드시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절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음으로 영접하는 삶의 중요함을 우리는 에게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가 19:1-3절입니다.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의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롯은 소돔 성의 죄악을 확인하려고 온 천사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소돔 성의 다른 사람들은 이 천사를 배척하였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천사와 동성연애하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이 천사를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살게 되었듯이, 우리들도 우리 구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복된 믿음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도래하는 주의 날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받았던 롯은 어떤 사람이었다고 합니까?

첫째,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1절입니다.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의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롯은 소돔 성 문에 앉아 있다가 하나님이 보낸 천사를 보게 됩니다. 만약 그 때 롯이 성문에 앉아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었다면 천사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그 저녁시간에 소돔 성 사람들을 피해 성문에 나와서 앉아 있다가 천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4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게도 이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이 바디매오는 그날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가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그 눈을 뜨게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는 이렇게 받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절묘한 기회를 마련해 주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디매오도 그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믿음으로 붙잡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바디메오의 믿음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롯의 경우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롯에게 천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고, 롯 또한 자신에게 찾아온 그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을 받는 와중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대는 타이밍이 아주 중요합니다.

롯과 바디매오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타이밍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절에서는 이 타이밍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말씀은 바로 지금이 롯과 같이 바디매오와 같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은혜의 때이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지금은 언제를 말합니까?

이 지금은 교회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교회 시대가 바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때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날입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며 교회시대는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종말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은혜 받을 수 있는 날이 끝이 나고 교회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끝이 납니다.

 

그 때가 오면 이방인의 구원의 문은 닫히고 유대인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다니엘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이레입니다. 한 이레에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에 대한 성경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문을 하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또 하나님이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든지 이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방인의 때가 지나가면 더 이상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롯이 성문에 나와 앉아 있었다.’는 말을 주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롯이 전에는 광야에서 방목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유가 많아져서 아브라함과 함께 방목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이 물이 풍부하고 방목하기 좋아 보이는 소돔 성 쪽을 택하여 떠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소돔성 안에 들어가서 정착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런 롯이 왜 소돔 성문에 나와 앉아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관영한 도시였고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창세기 18:2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런 소돔 성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보다는 소돔 성문에 나와서 전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방목을 하며 살던 광야를 바라보며 묵상하며 보내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이런 롯의 삶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증거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2:7절입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롯은 타락한 소돔 성에서 그곳 사람들의 죄악 된 생활을 목도하며 그 마음이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21세기 한국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들도 이 죄악 된 세상과 한 통속이 되어, 재물을 탐하고, 명예에 목숨을 걸고, 지위를 탐내는 삶을 살지 않고, 이런 세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이유에 대해 베드로전서 2:9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죄악 된 세상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 내주셔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해 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신 민족으로 삼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고, 세상 속에 존재하는 거룩한 나라와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서,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향해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빛,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을 전해주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운 덕을 전해주는 일군으로 세워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명을 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과 구별되는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소돔 사람들이 소망하여 살았던 나라는 소돔 성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소돔 성에서 부귀영화를 꿈꾸며, 소돔 성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롯은 달랐습니다. 롯은 그 몸은 소돔성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이 주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소망하며 살아가는 나라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게 되면 세상은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천국의 소망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두 가지를 다 갖고자 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도 갖고 또 하나님 나라도 가지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 이를 사랑하고 저를 경히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세상에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내 힘과 내 능력을 다 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이 세상의 것은 얻지 못할지라도 장차 그 소망하며 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얻게 될 것입니다.

 

롯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았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탐욕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소돔 성 사람들과 어울려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홀로 소돔 성문에 나가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성문에서 과거에 살았던 광야를 내려다보며 또 그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살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하나님과 그 나라를 사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롯이었기에 소돔 성에 살고 있으면서도 소돔 성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들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나라를 목적하며, 이 세상에서는 구별된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유명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기억하시고 우리에게 그 나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계시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장차 도래하는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입니까?

 

또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받았던 롯은 어떤 사람이었다고 합니까?

둘째, 롯은 그 영안이 열려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그 영안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그 영안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영안이 열려 있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롯은 하나님이 그 영안을 열어 주셔서 그 영안이 열려 있었던 성도였습니다. 이런 롯이었기에 소돔 성에서도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그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안이 열려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이요 생명이신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말세에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셔서 우리 모두는 영안이 열려 있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그러면 롯이 영안이 열려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롯은 열려 있는 영안으로 소돔 성에 들어오는 천사를 알아보았습니다.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의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아브라함도 영안이 열려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집 앞을 지나는 천사를 알아보고 영접하여 대접할 수 있습니다. 롯도 영안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소돔 성으로 들어오는 그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곧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소돔 사람들은 소돔 성에 들어오는 천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과 상관하겠다고 하면서 즉 동성연애 하겠다고 하면서 롯에게 그 사람들을 내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영적분별력이 있는 사람,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 속에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을 때에, 그 영안이 열려 있었던 엘리사는 그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천군천사들을 보고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영안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아람 군대를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열왕기하 6:14-17절입니다. (아람)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엘리야가 살고 있었던 도단 성읍)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게하시)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도단)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아멘.

 

영적인 눈이 열려 있어야 영적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있어야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도 믿을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이 열려 있어야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꼭 영적인 눈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주시는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육에 속한 사람인가?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인가?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인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가? 를 구분해 주는 것이 바로 짐승의 표입니다. 성경은 이 짐승의 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짐승의 표는 매매할 때 사용하는 매매의 수단이 될 것이며, 이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은 매매를 못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매매를 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산간오지나 낙도에서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다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매매를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또 짐승의 표는 짐승을 경배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다는 것은 내가 짐승에게 속해 있고 그 짐승을 경배하고 있다는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이 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법자로 여겨져서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짐승의 표는 인체 즉 사람의 에나 이마에 받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 그래서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삶에 유익을 주는 짐승의 표를 아무 거리낌도 없이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매매하는 수단이면서, 또 그것이 인체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받지 않으므로 당하게 되는 불이익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그것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장차 짐승이 잡혀 유황불 못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게 될 때, 그 짐승과 함께 유황불 못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짐승의 표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사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뿐입니다. 아멘.

 

그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도들을 도와주신다고 하십니까?

전에 애굽을 10 재앙으로 심판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센 땅에 따로 모아 두시면서 지키시고 양육해 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도 그와 같이 성도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예비 된 장소 즉 예비처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을 그곳으로 인도해 주셔서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고 양육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예비 처에 가려면 그 영안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영안이 열려 있어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비 처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예비 처에서 3년 반극한환란의 시대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듣고 휴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그 영안이 닫혀 있기 때문에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 육신적인 삶에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기 때문에 그냥 받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것을 받으면 장차 유황불 못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영적인 눈이 닫혀 있기 때문에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나,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듣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처럼, 롯처럼, 엘리사처럼, 영안이 열려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이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신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을 통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관계없이 장차 매매의 수단이면서,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것은 끝까지 받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받았던 롯은 어떤 사람이었다고 합니까?

셋째, 롯은 천사를 그 집으로 영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영안이 열린 롯은 성문에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롯은 천사를 알아보고 그들을 자기 집으로 모셔가서 식탁을 베풀며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롯이 천사들을 대접한 것은 곧 그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40절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전에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믿는 제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대접하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과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 수는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다 예수님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그 동안 내가 좋아하고 내가 누리며 살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1절 말씀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합니다. 메시야를 거부했던 헤롯왕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2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였습니다. 메시야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정작 메시야가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배척하고 십자가에 내어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이제까지 누려오던 왕의 권세를, 이제까지 누려오던 종교적인 특권들을 다 버리고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싫어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이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이 초림 때의 말씀입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재림의 약속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6절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초림 때에는 고난의 주로 오셨지만, 재림 때에는 죄악 된 세상은 심판하시고 우리 구원을 완성하고 성취해 주시려고 오십니다. 재림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이 그 신부들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들이 받게 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롯은 죄악된 소돔 성에서 살면서 소돔 성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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