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 후서 4:21
금년도의 겨울도 이제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만물을 소성케 하는 봄이 우리들을 찾아올 것입니다.
달력상으로는 1월이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지만, 계절적으로는 봄이 새로운 한 해의 시작입니다. 봄이 되면 그간 추위 때문에 위축되고 움츠렸던 만물들이 소성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봄의 들판에서 생명이 되살아나는 환희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연에만 이렇게 겨울이 있고 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도 겨울이 있고 봄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서의 봄은 언제입니까? 아마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나는 그 때가 봄 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겨울은 언제입니까? 아마 노년기 때가 겨울일 것입니다. 노년기가 되면 온 몸의 뼈마디가 욱신욱신 하고, 머리에는 마치 겨울의 눈과 같은 흰머리가 내려앉게 됩니다.
디모데 후서 4:21절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오라”고 했을까요?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는 겨울에 여행하는 것은 아주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겨울에 지중해 바다로 여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에는 갑자가 북쪽에서 태풍이 불어와서 배들을 침몰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겨울에 항해가 이렇게 어렵다면 겨울이 지난 후에 오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는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겨울 항해가 위험하기 때문에 겨울이 오기 전에 오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바울은 이 겨울이 다가기 전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보낸 이 편지를 읽은 디모데는 로마로 가기를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받자마자 먼저 에베소 교회 담임 목사직을 사직하였습니다. 또 바울의 요청한 것들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 드로아로 갔습니다.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바울의 ‘성경책’과 겨울용 ‘겉옷’을 챙겨 가지고 겨울 전에 로마로 갔습니다.
디모데가 이렇게 신속히 행동한 결과 그는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며 순교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만약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정리하는 문제로, 또 드로아에 갔다고 오는데 시간을 지체하였다면 겨울 전에 로마로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순교하는 역사적인 현장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겨울이 오기 전에 로마에 당도했기 때문에 바울이 순교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 인생에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오라”는 바울의 이 말속에서 디모데는 무엇을 들었습니까?
자신이 급히 바울에게 가야 한다는 긴박한 요청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인생의 겨울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들은 이 말씀 속에서 무슨 말을 듣습니까? 우리들도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첫째는,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인생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때문에 살며, 또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인생의 의미를 아십니까?
사람들을 만나보면 인생의 의미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 학생인 예은이 주영이 주찬이가 인생의 의미를 알겠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군대도 갔다 오고, 직장도 잡고, 결혼까지 하게 되면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까?
요즘 우리나라에는 핸드폰이나 게임 중독자가 수백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핸드폰만 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만 하며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알았다면 이렇게 살까요?
어디 이런 사람들만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까?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인생의 의미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매달 받은 월급을 모으고, 혹은 자기 사업을 하여 돈을 모아서,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자녀들도 양육하면서 성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인생의 참 의미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인생을 돈 벌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인 줄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인생의 참 된 의미는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시계를 만들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까?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는 목적으로 시계를 만듭니다. 시계가 존재하는 의미는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목적을 갖고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또 인격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단절이 왔습니다.
죄는 사람사이에도 단절을 가져와서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고통하며 살아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단절을 가져 온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제가 믿음을 가질 때 정말 인생을 걸고 삶을 걸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앙적인 체험들을 했습니다. 이런 경험과 체험들이 불신앙적인 가정환경을 넘어서서 신앙으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10년을 믿은 후에도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문제였습니다.
이 때 나는 루터가 가졌던 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모습을 보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전공을 신학으로 바꾸고 나중에는 신부가 되고 나중에는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절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진지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아닌가 봅니다. 그간 수도 없이 회개하고,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여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계심을 확실하게 믿습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신지 확실하게 믿습니다. 산상설교를 말씀하신 예수님을 위해 제 인생을 바쳐 믿고 따를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보니 나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구원에서 제외시키신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며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 손에 나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죄 사함의 확신과 믿음과 평화가 마음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신 것을 그 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믿음은 내가 노력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임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 경험이 제 신앙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 사함을 확신한 이후에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나는 바울의 말과 같이 ‘날마다 죽습니다.’ 예를 들어서 낮에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혼을 내어도 그것은 그 날로 끝입니다. 그 다음 날은 또 다른 내가 되어서 아이들을 대합니다. 아내와 낮에 이혼을 각오할 것 같이 싸웠어도 그것도 그 날로 끝입니다. 그 다음 날은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아내를 대하며 삽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어진 한 날 한 날을 믿음으로 살아가고, 어제 일에 매여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어떻게 유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돌이킴은 육체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보면 바울을 따르던 동역 자들이 하나 둘 바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오직 누가만 남아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던 바울이 의지할 사람은 누가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때 누구를 의지합니까?
남아 있는 누가를 의지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4:17절에서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사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께로 돌아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뿐 아니라 우리들의 인생살이에도 겨울은 찾아옵니다.
인생의 겨울이 찾아오면 숨도 가빠지고, 기력도 떨어지고, 무릎도 쑤셔오고,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머리에는 흰머리가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제 나에게도 인생의 겨울이 찾아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인생의 겨울은 노인들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에게도 인생의 겨울은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 아버지, 나, 나의 자녀들 이렇게 순서대로 오지만, 이 세상을 떠나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대로 정해진 순서 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죽는지 아십니까?
교통사고나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죽게 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정상적으로 죽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기 한 달 내지 두 달 전에 자신의 죽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알게 됩니까? 갑자기 신체 기능이 현저하게 저하되고, 또 갑자기 기억력도 없어지고, 또 몸도 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지고, 또 정신까지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 죽음을 직감하고 이제까지 하지 않던 말들 즉 유언적인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죽기 바로 직전에는 갑자기 다시 정신이 또렷해지고,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생기가 다시 생겨나게 되고 기억력도 회복되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제 다시 건강이 회복되나 보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신이 또렷해 질 때 자녀들에게 유언도 하고, 가진 재물도 나눠주고, 자신의 신앙도 점검해보고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이런 인생의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누구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일한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고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있는 나의 신앙을 다시한번 점검하고 확인해 봐야 합니다. 내 신앙이 바른 신앙인가? 아닌가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녀들의 신앙도 점검해봐야 합니다.
보통 성장한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세대 차이가 난다.’ ‘고리 타분하다.’ 라고 하며 부모님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녀들이라도 마음에 새겨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하시는 유언의 말입니다. 유언의 말은 누구나 다 마음 속 깊이 간직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지 않는 자녀가 있다면 그런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을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생전에는 ‘예수 믿으라.’라고 해도 안 믿던 자녀들이, 부모님의 유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해 줄 신앙적인 유언도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준비된 유언을 눈물로라도 호소해야 합니다.
눈물로 교훈을 받은 자녀는 언젠가 그 부모의 눈물을 기억하게 될 것이고, 그 부모님의 호소를 통해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강퍅한 자녀라도 부모님의 유언의 말씀을 거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서 자녀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또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둘째,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냥 오라고 하지 않고 한 가지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13절입니다. “네가 올 때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고 했습니다. 이 겉옷은 평상시에 입는 옷으로써, 잠을 잘 때에는 이불로 사용될 만큼 매우 긴요한 옷이었습니다. 바울은 추운 로마감옥 속에서 입기도 하고, 저녁에는 덮고 잘 수도 있는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한 가지를 더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것은 가죽 종이에 글을 쓴 책이었습니다. 이 가죽종이에 글을 쓴 책은 성경책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인생의 겨울이 왔음을 알고 난 후 한 가지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그가 전에 애용하던 성경책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인생을 마감하면서 내가 의지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과, 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내 성경’을 가져오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의 날이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또 무엇을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그 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말씀이 들어있는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을 보면 인생의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텔레비전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속극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켜 놓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문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신문에 있는 글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다 읽는다고 합니다. 좀 더 심한 사람들은 신문에 있는 좋은 글을 오려서 스크랩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신문을 스크랩해서 모으는 사람치고 그것을 나중에 다시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저 쓰지도 못할 것을 습관적으로 모으는 것이지요.
우리는 신문을 보되 너무 이 잡듯이 집중해서 보지 맙시다.
신문을 보면 거기 무엇이 실려 있습니까? 신문에는 좋은 소식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가 다 가슴 아픈 이야기들만 잔뜩 실려 있습니다. 꼭 필요한 기사라면 모르지만 나머지 신문기사는 대충 대충보아도 됩니다. 저는 일간신문을 다 보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차라리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은혜에 깊이 빠집시다.
신문보다, 텔레비전보다, 잡지, 세상의 잡다한 지식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볼 바에야 차라리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에 보면 “신구약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교훈들이 있지만 성경말씀만이 우리가 평생 믿고 따를 수 있는 절대적 원리요 생활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게 될 때 그 해답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 우리가 찾는 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천지 만물의 창조와 인간 창조와 타락, 인류구속을 위한 메시야 탄생 등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교회사와 인류역사의 종말과 내세에 관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서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박사이고 박사의 스승이라도, 성경을 모르면 그 지식은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지식의 근본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지식의 첫 번째 단추를 잘못 꿰고 있는 사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그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옷을 바로 입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와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생의 참 의미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39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사실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였고, 또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까지 붙들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당시 자기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한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헤어져 있던 사랑하는 연인들이 만날 날이 가까워오면 올수록 그 연인을 더 많이 생각하며, 그 여인이 했던 말과 편지들을 기억하고 되새기게 되듯이, 사도바울은 그 삶의 끝 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예수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도바울만의 소원이겠습니까?
바울과 같이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소원도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늙어 가면 눈은 어두워지고, 귀는 잘 들리지 않고, 행동은 둔하여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모하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므로 가족들을 떠나 있어도 우리는 외롭지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면서 만족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그 손자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내 눈이 안보여서 이제 성경을 볼 수 없다고 하면서, 하루 성경 10장씩 읽어주면 할머니가 용돈을 넉넉히 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손자는 용돈을 타기 위해서 할머니에게 매일 성경을 10장씩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얼마 동안 지냈는데 나중에서 그 손자가 용돈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어 주겠다고 했답니다. 손자는 용돈을 타기위해서 성경을 읽어주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용돈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어주었을 뿐 아니라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매일 성경을 읽었고,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신앙고백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우리 모두는 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셋째,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에 취해서, 세상의 부와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처럼 이왕 세상에 태어났으면 큰 업적을 남기고, 이름을 남기고 것도 보람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참 고향은 하늘이며 그 나라에 갈 때까지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수를 다하고 죽게 되었을 때 가는 곳은 두 곳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낙원과 같은 천국이고 다른 하나는 음부와 같은 지옥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나는 지옥가야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천국에 가서 영원한 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국에는 가고 싶다고 다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자신들이 천국 갈 것이라고 믿었던 바리새인들은 천국에 가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천국의 중요한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믿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천국에 가지 못했습니다. 천국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이 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런 오해를 합니까? 왜 사람들은 자신은 반드시 천국 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내가 정말 천국에 갈 수 있는지 갈 수 없는지를 점검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직 이 세상에서의 기회가 남아 있을 때, 내가 정말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해 보며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고향인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후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그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고향으로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천국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땅에서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입니까?
자신의 고향을 천국으로 알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도 그의 고향을 천국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천국에 빨리 가는 것을 더 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 세상에서 더 살았습니까? 바울이 이 세상에서 더 산 이유는, 자신의 전도를 듣고 믿음으로 구원받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늘 바라보고 살았던 곳은 천국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고 삽니다.
예수님께 영생을 얻고자 나왔던 부자 청년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과 많은 물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네가 영생을 얻고 싶으면, 네 가진 제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고 나를 쫒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이 청년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고민하며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청년의 마음속에는 영생을 얻고자 하는 큰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재물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무엇을 선택합니까? 이 청년이 선택한 것은 천국이 아니라 재물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 청년은 천국보다 재물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인가는 무엇을 보고 압니까? 우리의 삶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받을 상급과 영예를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천국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혹 이를 중히 여기고, 혹 저를 경히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순종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를 더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래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고 할 때 그 말의 진실 됨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가 주를 위해 희생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 마음 중심에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형제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견이 있고 다툼이 있을지라도 이런 것들이 그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못합니다. 왜요. 사람들의 범죄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못하였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이 사랑을 불을 꺼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조금 더 가진 우월함, 더 배운 우월함을 가지고 형제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참 사랑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으로 돌아가서 자신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동역 자들이 하나 둘 바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오직 누가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누구에게로 돌아갑니까?
그를 사랑하사 다메섹 도상까지 찾아와서 만나고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또 어디로 돌아갔습니까? 성령이 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르쳐주고 일깨워주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은 또 어디로 돌아갔습니까?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돌아갔습니다.
긴 겨울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겨울과 같은 인생의 겨울이 곧 우리들의 삶에도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생의 겨울은, 나이와 관계없이 찾아옵니다. 젊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인생의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예수님께로 돌아가고, 말씀으로 돌아가고, 천국의 소망으로 돌아가야 합시다. 그래서 바울과 같이 이 세상에서 주어진 인생의 길을 마치게 될 때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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