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2. 28. 22:08

복음(福音)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로마서 3:19-31

 

1. 하나님의 의()

 

오늘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 살펴봅니다.

로마서 1:17절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입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으신 신적인 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으신 이 신적인 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둘째는, 복음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가질 수 있는 신적인 의()와 함께 또 다른 의()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의()는 예수님이 성육신과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고 성취하신 의()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수여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의()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까?

 

첫째, 율법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율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신적인 의로써 하나님의 공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 네가 그것을 먹게 되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당시 무죄한 상태였던 아담과 하와는 이 율법을 지켜 행할 수도 있었고, 이 율법을 어길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죄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의 율법을 지켜 행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후 율법의 목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3:19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이후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유대인들의 입을 막고, 온 세상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첫째, 율법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또 하나님의 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둘째, 복음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의 소극적인 기능과 적극적인 기능입니다. 율법의 소극적 기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런가 하면 율법의 적극적 기능은 죄인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기능입니다.

갈라디아 3:23-24절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나님은 율법의 이 두 가지 기능을 통해 지금도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3:21-22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그 의로우심을 의의 법인 율법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율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의를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이 의()는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을 통해 증거 해 오던 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을 통해 증거 해 오던 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셔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복음의 약속 안에 담겨 있는 의()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대로 성자 하나님을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성육신하게 하셨으며,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죄를 대속해주시기 위해서 사람들 대신 죽음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데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아멘.

 

22절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믿음

 

우리말 성경에서는 22절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즉 예수 크리스톤)라고 목적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번역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투)라고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헬라어 원문은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주신 복음안에 담겨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 복음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 3:22절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믿음, 예수님이 믿음으로 공생애 사역을 하셨던 바로 그 믿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이 믿음을 가짐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이 믿음을 가짐으로 거듭나게 되고, 이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믿음은,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바로 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첫째,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나니,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임하여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임하여 있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 안에 가지고 사는 모습으로 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이 마음을 품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빌립보서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라고 하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그 마음,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구주가 되시기 위하여 사람들과 똑같이 어린 아기로 태어나신 그 마음,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 자기를 죄인 된 사람들의 입장에까지 낮추시고 복종하여 사시다가, 결국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이 겸손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너희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까?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죄악 된 옛사람은 죽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을 덧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만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안에 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렇게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기가 00교회라고 교회간판을 붙여 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가지신 믿음,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을 함께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장차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참 교회인 하늘 교회를 이루게 되며, 그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 안에 소유하고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둘째,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광의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로마서 3: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에는 부족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서 구원에 이를 만큼 그 영광이 충분치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씀에서 볼 때 첫째,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결핍된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죄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합니다. 창세기 1:2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이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말씀에서는 신의 성품이라 하기도 하고, 신의 속성이라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망가지고 파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파괴된 상태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회복은 중생, 거듭남을 통해서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형상, 신의 성품의 회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신의 성품의 회복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믿음을 가지고, 죄 사함을 받아 우리의 죽었던 영이 거듭나게 될 때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며, 성품이 회복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품이 회복되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전도자에게 4 영리로 복음을 소개 받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지적인 동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가지신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가져다주는 존재의 변화와 성품의 회복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 존재의 변화 성품의 회복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입니다.

 

존재의 변화에 대해서 요한복음 3:3절에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창조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품의 변화에 대해서는 베드로후서 1:3-4절 말씀을 보면 신성한 성품, 신의 성품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베드로후서 1:5-8절에서는 이렇게 해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 맺으며 살게 되는 열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개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베드로후서 1:11절에서는 이렇게 신성한 성품이 회복되어 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신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맺으며 사는 열매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아멘.

 

셋째,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두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그 첫째 단계는 구속입니다.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구절을 직역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그분(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구속을 통해, 값없이(내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의롭게 되었느니라.’(성품적 회복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구속이란 무엇입니까?

구속이란?’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음의 약속에 순종하여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주셨습니다. 구속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 죄에 대한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말합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로부터 풀어주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풀어주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노예는 개인의 소유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니 노예는 스스로 자기 몸의 값을 치루고 풀려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노예에서 풀려나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값을 치루고 그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 줄 때입니다. 이 때 사용하였던 단어가 구속입니다.

 

이런 구속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죄로 비천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루고 사서, 사람들을 죄에서 풀어주고 해방시켜 주는 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죄를 지어 죄인이 된 사람들은 스스로 그 죄의 값을 치루고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에 대한 댓가로 지불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무죄하신 예수님이 죄인된 사람들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죄의 노예, 사단의 노예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서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속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둘째 단계는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구속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을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에베소서 2: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이것이 구속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속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과 삶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참 믿음이라고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 안에는 믿음과 삶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구원을 보면, 우리의 구원에는 과거적 구원도 있고, 현재적 구원도 있고, 미래적 구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체가 하나의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현재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 구원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과거적 구원은 과거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칭의를 말합니다.

이 때 우리는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의 변화, 존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신분의 변화, 존재의 변화를 성경은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함을 받음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육신에 속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칭의 구원입니다.

 

현재적 구원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 이루어나가야 하는 성화를 말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악 된 성품을 하나 둘 버려 나가면서,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성품으로 바꾸어 나가게 됩니다. 이를 통해 신의 성품을 회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로마서 12장에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 마음이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계획과 삶의 목적과 사고방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 우리는 현재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윤리나 도덕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면서, 그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윤리 도덕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기준은 이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차이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설교를 기록하고 있는 산상설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백성의 윤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고 하지만, 너희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살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남녀가 육체적인 관계 가지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지만, 너희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을 간음으로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너희가 가지고 살아야 할 기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루어나가야 할 현재적 구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삶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성화구원입니다.

 

미래적 구원은 우리가 장차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예수님과 똑 같이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로운 몸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구원의 전 과정이, 예수님의 구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서 3: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이것이 아담의 후손 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구속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속량으로,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길이,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구속과 구원은 다릅니다.

구속의 주체는 예수님이시고, 구원의 주체는 우리들입니다.

이 구속과 구원의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을 준비하고, 정한 날에 잡아서 그 피를 문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어린 양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어서 그 피가 발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었는데 이것이 구속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천사가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구속입니다.

 

그러면 유월절 어린 양의 구속으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속사건을 믿는 믿음을 보여야 했습니다. 이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믿음을 보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거듭나 변화를 이룬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 군은 이런 믿음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거역하고 불평하고 악담하고 대적했습니다. 나머지 백성들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대로 보응해 주셨습니다.

네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해 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모두 다 죽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구원에는

첫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예수님이 직접 행하시고 성취하여 주신 구속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왜 구원이 없습니까? 이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구속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함 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 안에 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만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고,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며 살 사람들입니다. 아멘.

 

넷째,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로마서 3:25-26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라.’

 

여기 말씀하고 있는 화목제물은 속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다.’는 말씀은 곁으로 지나가도록 허용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는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가면 죽음밖에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죄로 인해서,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옆으로 지나가도록 허용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를 이루셨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찢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우리 죄가 사해지고 우리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임에도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 베푸심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좀 애매합니다. 의역해보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그를 그렇게 되게 하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번역하고 보면 의롭다함에는 3중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부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신적인 의가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의입니다.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기 신적인 의가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성육신하시고, 고난 받는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이루신 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의가 있습니다. 이 의는 복음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전가 받은 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믿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이루신 그 의를 전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칭해 주시고, 또 의롭게 살 수 있도록 거룩한 영인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인 사람들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그것은 절망이고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취하신 복음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될 때, 예수님이 이루어 주신 복음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움이 하나도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아서, 그 전가 받은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며, 하나님으로부터도 이제 너는 의인이다.’ 라고 불려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26절의 내용입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27절에 보면 이 의()를 얻는 것은, 무슨 법으로,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랑할 대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28절에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러면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는 3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율법의 형식은 지켜 행할 수 있으나 그 정신은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거듭나는 변화를 경험한 성도들은 율법의 형식 뿐 아니라 율법의 정신까지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굳게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약속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복음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죄를 다 처리하신 후에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 부활하사 승천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과거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으로 구원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는 현재적 구원의 삶이 있고, 예수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영화롭게 될 미래적 구원의 완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어느 한 순간의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 일생 동안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동안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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