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2. 25. 14:43

하나님의 예정

로마서 9:19-24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물들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을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일반계획이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에는 만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계획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적 피조물로 창조하신 인간과 관계되는 계획도 있습니다. 특별히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의 구원과 관계되는 계획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특별 계획혹은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예정

 

로마서 9장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합니까?

첫째, 아브라함의 많은 자녀들 중에서 이삭의 택하심을 통해 나타났다고 합니다.

 

로마서 9:7-8절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의 자녀가 많았지만 그 모든 자녀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들이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기업을 이어 받을 자녀로 이삭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합니까?

둘째, 이삭의 두 아들 중에서 야곱의 택하심을 통해 나타났다고 합니다.

 

로마서 9:10-1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삭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 의해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시고,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셋째,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3-6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로마서 8:29-30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사람들 중에서 구원 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미리 정해놓으셨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예정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잘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정론은 말하면, 예정론은 윤리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며 또 사람들을 로봇이나 꼭두각시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9장의 말씀은 예정론에 대한 이런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 해답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질문

 

로마서 9: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불의하신 분이시냐?’ 라고 묻고 난 후에 그 대답으로 그렇지 않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왜 이런 질문과 대답의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추측해 보면 누군가가 바울에게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하심을 따라, 사람들이 선과 악을 행하며 살 수 밖에 없다면, 사람들이 불의하게 산 삶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도 있지 않겠느냐?’라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불의한 삶을 살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자이시니, 불의한 삶을 살도록 원인을 제공하신 하나님께도 불의에 대한 책임이 있지 않겠느냐?’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사람들이 지으며 살아가는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려고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아주 명료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삶의 원인 제공자도 아니시고,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준 말씀이 바로 로마서 9:15-17절입니다.

9:15-16절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절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주가 되셔서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사랑해서 긍휼히 여겨 주실 자로 창조하시고, 또 바로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완악한 사람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께는 이렇게 사람들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창조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한 사람 악한 사람들을 다 창조하셨다고 해서, 그 창조하신 사람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온 그 삶에 대한 책임은 그런 삶을 산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은 모두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이 살아갈 삶들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다 예정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가치관을 따라 스스로 그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택하며 살아온 그 삶에 대한 책임이 그렇게 선택하며 산 그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살아온 불의한 삶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불의하게 산 사람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나님을 불의하신 분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그러자 연이어서 나온 질문이 로마서 9:19절입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이 질문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면, 사람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책임을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물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앞의 질문은 하나님이 선한 사람 악한 사람들을 다 창조하셨다면 악한 사람들이 지으며 살아가는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려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뒤의 질문은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사람들이 지으며 살았던 죄에 대한 책임을 사람들에게 묻을 수 없지 않으냐?.라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하면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뜻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가 선행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서 9:1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 불레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말합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은 델레마입니다. 이것은 변동적인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첫째, 변동적인 하나님의 뜻 델레마

델레마를 우리 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원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델레마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기도와 간구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1. 그 예로 출애굽기 32장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사건으로 범죄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멸하고 모세의 후손으로 새로운 민족을 이루어 약속의 땅에 살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0절입니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를 첫째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자기 백성을 다 신에서 진멸하셨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여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맹세를 기억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진멸하겠다는 뜻을 바꾸셨는데 이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델레마입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2. 또 전에 하나님이 병이 든 히스기야 왕에게 너는 곧 죽는다.’ 라고 하셨습니다.

열왕기 하 20:1절입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벽을 향하여 엎드려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뜻을 돌이키셔서 15년 더 살게 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도 델레마입니다.

열왕기하 20:5-6절입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3. 또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내가 범죄한 니느웨를 심판하여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요나서 3:4절입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그런데 요나 선지자로부터 니느웨 멸망에 관한 소식을 전해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왕부터 짐승까지 다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멸망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서 3:10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바뀌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델레마입니다.

 

신약성경 데살로니가 전서 5:18절에도 이 델레마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만약 이 하나님의 뜻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인 불레마라면 모든 성도들은 반드시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변동 가능한 하나님의 뜻인 델레마이기 때문에, 우리 현실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도 있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9:1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불레마입니다.

즉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 중에서 절대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인 예정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9절에서 하고 있는 질문은 이런 질문이 됩니다. 하나님이 절대 바꿀 수 없는 예정하심 때문에 바로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왔다면, 어찌 바로가 완악하게 산 삶에 대한 책임을 바로에게 물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하나님은 너무 독선적인 분이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도 아니시고 공의로우신 분도 아니시라고 하는 비난을 담고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고 또 공의로 행하시는 분이시라면 바로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수는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에게 행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독선적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도록 예정하셨기 때문에, 바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범죄 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잘못 살아온 삶의 대한 책임을 바로에게 물으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혹독하게 바로를 다루셔서 그 책임을 물으신다면 그것은 공의롭지 못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너의 주제를 알라

 

이런 사람들의 비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20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이같이 나를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바울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합니다. 너의 주제를 알라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 하나님께 감히 그런 질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느 피조물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왜 나는 소로 만드셨나요,’

하나님 왜 나를 풀로 만드셨나요.’ ‘하나님 왜 나를 무생물로 만드셨나요.’ 라고 반문하는 것을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피조물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똑 같이 피조물이면서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나님께 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더하여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 창조주 하나님께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가 지은 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마땅하지, 하나님을 향해 그런 것을 따질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택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버리심에서도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당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3. 토기장이 비유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바로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21절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이 말씀은 토기장이가 진흙 덩이에서 진흙 한 덩이를 떼어 내어서 그릇을 만들 때, 그 마음의 생각대로 귀하게 쓸 그릇도 만들고 천하게 쓸 그릇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토기장이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그릇을 만든다고 그릇들이 토기장이에게, 왜 당신은 같은 진흙으로 나를 저 그릇과 다른 그릇으로 만들었느냐 라고 반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토기장이의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토기장이가 불공평하다’ ‘공의롭지 못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토기장이가 혹 다른 진흙을 썼다면 불공평하다 할 수 있겠지만, 모든 그릇을 만들 때 같은 진흙을 썼기 때문에 이것은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만든 그릇의 모양들은 달라도, 그것은 토기장이의 뜻과 계획과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서로 다른 그릇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그 마음대로 귀히 쓸 그릇(명예를 얻는 그릇), 천히 쓸 그릇(불명예를 얻는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진흙으로 이삭도 만드시고 이스마엘도 만드셨으며, 이삭이라는 한 진흙으로 에서도 만드시고 야곱도 만드셨습니다. 또 똑 같은 한 진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만드시고, 애굽 왕 바로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실 때 다른 진흙을 쓰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같은 진흙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만든 그릇의 모양과 용도는 달라도 하나님께서는 각 그릇을 공평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유의 권한이며 여기에 대해 누구도 걸고넘어지거나 토를 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2절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이런 사람들 중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각종 이단의 괴수들이 있습니다. 위선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악을 행하고 범죄하며 사는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셨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그릇, 멸망당하게 준비된 진노의 그릇, 전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악인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관용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23절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런 사람 중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 중에는 아브라함이 있고, 이삭이 있고, 야곱이 있습니다. 다윗 왕이 있습니다. 바울이 있고, 베드로가 있고, 고넬료도 있고, 루디아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영광 받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릇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용하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고 합니다.

 

4. 공평하신 하나님

 

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라고 다르게 다루시고 의인이라고 다르게 다루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똑 같이 선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공평하게 다루셨다는 것입니다.

 

이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해 마태복음 5:43-48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여기 온전하라.’라는 말씀은 완전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선인 악인, 의인과 죄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공평하게 주시듯이, 너희들도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다루시고, 의인과 죄인에게 똑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 분이시고,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들을 그 뜻과 계획과 목적에 따라 다르게 다루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다르게 다루셨습니다. 같은 목회자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큰 교회를 담임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교회를 담임하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도 보면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나라는 전쟁을 하고 어떤 나라는 평화롭게 살도록 다르게 다루고 계십니다.

남한의 성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고 살고, 북한의 성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힘겹게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다르게 다루시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불공평하게 다루시고 계신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한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다르고, 북한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 속에서는 서로 환경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남북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똑 같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믿음으로 산 남북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은 똑 같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뜻하심과 그 목적하심에 따라 서로 다르게 다루실 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부당하게 대우하신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결국 같은 하늘나라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같은 지옥 형벌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4절의 말씀에서는 우리는 단지 그릇들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저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그릇입니다.

큰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이 그 분에게 주신 그릇입니다. 우리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각자에게 꼭 맡게 배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두 부류의 서로 다른 삶을 산 성도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3절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이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이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영광을 받아 누리며 살았던 성도들입니다.

 

36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 사람들은 동일한 믿음 안에서 고난당하는 삶을 살았던 성도들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불공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들을 차등대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대로 그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런 삶을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북에 있는 우리 참빛교회와 강남에 있는 우리 교단의 사랑의 교회로 하여금, 서로 다르게 하나님을 섬기고 주를 위해 일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사항이고, 하나님의 재량입니다.

각각의 경우에 맞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계획이 있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목적 이루어가는 일에 쓰임을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으셔서 내게 한 달란트 주셨으면 그런 상태로 충성하면 됩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을 보며 섭섭해 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내 영광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구약시대를 보고, 신약 시대를 보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개인적인 삶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를 바르게 보고, 그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삶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개인들이 나 자신을 그 중심에 세우고 보면 우리는 세상을 잘못 보게 되고 현실을 외곡 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고 그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종 된 사람들에게 주신 각자의 사명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네게 주신 사명에 나의 시간을 바치고, 나의 노력을 바치고, 나의 지혜를 다하며 수고하고 애쓰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할 믿음의 삶입니다.

 

이렇게 내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착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일생 동안 살아가야 할 믿음의 삶입니다. 아멘.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입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환경과 여건 속에는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시는 뜻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환경이 어렵고 여건이 나쁘다고 우리는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환경 속에서 나에게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고 깨달고 알아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사명을 이루며 살아가는데 민첩한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이 주신 하루하루를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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