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용서의 하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5. 9. 14:14

용서의 하나님

누가복음 23:32-37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며 삽니다.

언어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평생 동안 하며 사는 말들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그것은 유언의 말일 것입니다. 그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하면 유언으로 남기며 세상을 떠나가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유언처럼 일곱 마디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상 7 이라고 부릅니다. 이 가상 7언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면 유언처럼 주시고 떠나셨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누가복음 23:34절의 말씀은 이 가상 7언 중에서 첫 번째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오늘 우리는 이 가상 1언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상 1언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무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싫어하시고, 그 모양이라도 용납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성경은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완전하신 빛이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아담의 죄에 함께 속하여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의 종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물고기는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태어나면서부터 물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범죄들입니다. 흉악한 범죄가 일상이 되어 있는 현실이 바로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떠나 있는 존재라면 이런 현실에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죄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괴로움일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세상 속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라도 더 오래 오래 살려고 합니까?

그것은 우리 자체가 죄악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죄성이 큰 사람도 있고, 죄성이 작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인 사람들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인 사람들과 거룩하신 하나님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사이입니다. 잘 조화될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엇이 개입되어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용서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용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아담의 범죄 사건을 통해 알게 됩니다. 만약 우리 하나님께서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아담과 하와는 그 즉시 죄에 대한 형벌을 받고,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서 죽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곧 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이후 930년을 더 살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지은 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용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용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죄의 수치심을 가려 주셨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을 잡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입혀 주심으로 죄의 수치심을 가리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런 일들 속에서 아담과 하와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일 것입니다. 아담은 이 믿음 안에서 그 아내의 이름을 하와 산자의 어미라고 지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 주셨습니까?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죄인으로 살지 않도록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만약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담과 하와는 영원히 죽지 않고 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지 못하도록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지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그 육체로는 죽음을 맛보되, 구세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영은 영생을 얻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신 것도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뿐 아니라, 육신이 죽을 때 육신과 불리 된 우리의 영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과도하게 슬퍼하지 않습니다. 장례 예식을 천국으로 가는 환송식이라고 믿고 죽음 앞에서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아멘

 

은혜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아담이 경험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담이 경험한 하나님은 은혜로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며 삽니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어제도 오늘도 언제든지 변찮고 보호해 주시네.’

 

우리는 즐겁고, 기쁘고, 감사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또 우리는 아프고, 괴롭고, 고통당하고, 좌절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고난이 은혜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고난을 은혜의 사건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을 텐데, 고난을 당함으로 내가 바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나에게서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해 봄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인자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강도, 사기꾼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골고다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사람들 대신 죽어주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을 알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잘못 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생각 내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구별하고 차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생각 내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을 패하시고, 새로 교회를 세우셔서 이 교회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도록 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용서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는 사람들의 조건과 형편을 넘어서고, 사람의 관점과 편견을 넘어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둘째, 성경의 중심적인 내용도 바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적인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죄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하여,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입혀 주신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의 모든 제사는 대속적인 죽음에 기초를 둔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일관성 있게 증언하고 있는 내용도 바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 대신 고난당하심으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천사들이 무엇이라 증거 하였습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메시야의 선구자로 온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무엇이라 증언하였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예수님이 사람들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 무슨 기도를 하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후 교회가 세상에 전해 주었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도 바로 죄의 용서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전해 온 복음이었습니다.

 

용서의 이유

그런데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34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를 쾌락으로 즐거움으로 여기고 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육신의 쾌락을 즐겼으면 오늘날 향락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수백만 명이나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이 세상은 경쟁이 생활이 된 사회입니다.

학교에서도 경쟁을 하고, 직장에서도 경쟁을 하고, 기업에서도 경쟁을 하며 삽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는 반드시 낙오자가 있고 승리자가 있게 됩니다.

 

이런 경쟁 사회에서 사람들이 꿈꾸고 있는 성공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굴복시키고, 그 사람들의 실패 위에 내서 올라서는 것이 성공입니다. 이런 성공에 즐거움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해 주고 동정해 주는 학생도 없고 기업가도 없습니다. 이런 현실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내게 좋은 정보가 있다면, 내가 좋은 길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내가 이런 좋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내가 이런 좋은 길을 알고 있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정보와 그 길을 나의 자산으로 생각하고 나 혼자서만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적인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내가 잘되고 내가 성공하기를 바라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잘 되고, 함께 성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주라 너희에게 줄 것이니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우리 모두는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에서 목사다. 사모다. 권사다. 집사다.’ 라는 직분까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지만 내가 가진 노하우나, 내가 가진 가치 있는 정보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현실들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까지도,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우리들까지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죄인지도 모른 채 거의 본능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들은 죄를 밥 먹듯이 먹고 마시며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오히려 그런 죄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된 이 세상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지한 삶을 사는 것은, 예수 믿는 우리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들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죄와 무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예수 믿지 않는 가족이나, 우리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고 무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관점을 가지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죄악 된 본성이었습니다. 죄의 종 된 무기력한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고 거룩해진 그의 영으로 자신을 사로잡아 오고 있는 죄의 실체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나를 사로잡으려고 덮쳐 온다.”라고 고백하며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은 죄의 종으로 살다가 자신의 죄악 됨을 발견하게 되면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존심이 양심이 그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여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해결할 능력이 자기 안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깨끗한 삶을 살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는 성철 스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사단의 졸개로 살았다’ ‘나는 이제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간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런 세상 사람들과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세상 사람들과 같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 곧 바로, 나 같이 못난 죄인을 사랑해 주시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하며, 마치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탕진하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아버지께로 나아갔던 탕자와 같이,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이렇게 회개하며 나아가는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나아갔다가 경험한 것과 똑 같은 경험 즉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크고 놀랍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은 죄를 송구스러워하며 나아가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죄를 전혀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죄 용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편지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열립니다. 자신이 죄인인지 모르는 사람들에는 성경은 닫힌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뿐 아니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인 성경 말씀이 열려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도 용서의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의 죄 용서에 기초하고 있듯이, 우리가 우리 이웃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도 죄를 용서하는 삶에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32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도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부모들이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용서하는 삶을 삽니다.

 

또 부모가 아니라도 긍휼의 마음이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니이까?”라고 물은 것도 바로 이런 인간적인 용서에 기초한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는 인간적인 자질에서 나오는 용서입니다.

그리고 이런 용서는 베드로의 물음에서 보듯이 한계가 있는 용서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믿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중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의인 오십 명에서 10명까지 내려가면서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때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거하시고 대신 그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은 용서하시고자 하시는데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한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요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다메섹에 살고 있는 아직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수 십 만 명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메섹의 죄를 용서하려고 하시는데,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행한 다메섹의 죄악과 강포를 용서하지 못하고 멸망하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드신 용서하지 않는 신하에 대한 말씀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 신하는 용서를 받고 나가서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그 종을 용서해 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그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그 신하를 다시 잡아와서 옥에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그 이웃을 용서해 주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죄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죄 용서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같이 인간적인 입장에서 용서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던 것 같은 완전한 용서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 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고 있는 손양원 목사님은 그 아들을 죽인 공산당을 용서해 주는 삶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자신을 돌로 쳐 죽이고 있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을 죄 용서를 구하며 죽어간 스데반은 그 용서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죄 용서를 경험한 사람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것을 이혼문제로 살펴보겠습니다. 이혼은 특수한 경우에는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가 정신질환자이 있을 경우입니다. 이를 그냥 두면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때는 먼저 격리시켜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이혼까지 가능합니다. 또 배후자가 부정한 행동을 하였을 때입니다.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불륜을 행할 때에는, 이미 그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이때는 이혼을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배우자가 죽었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때도 이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이혼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면 이혼하지 않고서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혼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서로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마치 원수 같이 사는 부부는 어떻습니까? 이런 부부는 이미 관계론 적으로 보면 이혼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삶을 살 때, 그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되고, 또 우리와 우리 이웃의 관계를 가로 막게 되는 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마땅히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잘 용서가 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인격이 있고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격이 상처를 받고 감정이 상처를 받으면 용서가 쉽지 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탓해서는 안됩니다. 그 상처 입은 마음, 그 상처 입은 감정이 치유될 때까지 사랑으로 기다려주고 참아 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사람들을 용서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가상 1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난하고,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 그런 사람들을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 일을 하고 있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용서하는 삶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2021년이 벌써 5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들도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승리는 바로 용서를 통한 승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는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내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따라 용서의 직분을 받은 성도들처럼,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감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거룩한 성도라는 것을 세상에 증거 할 뿐 아니라, 또 우리와 같이 이 세상 사람들도 복음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하루 한주를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때를 알고 준비하자  (0) 2021.09.05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聖經)  (0) 2021.06.13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  (0) 2021.04.04
겉과 속이 같은 성도  (0) 2021.03.24
세 가지 선물  (0) 202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