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겉과 속이 같은 성도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3. 24. 17:41

겉과 속이 같은 성도

마가복음 12:28-34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다양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 많은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율법의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입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한 질문입니다.

 

성경은 동일한 질문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2:35-36절 말씀에서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가복음 12:28절 말씀에서는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질문했다고 합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우리가 볼 때에 이 두 사람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똑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 질문을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보고, 그런 예수님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질문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두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는 내용은 똑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 하나님의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첫 번째가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이 사람들이 질문하고 있는 현장에 있었다고 하면 이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하였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한 사람들의 속마음을, 숨겨진 의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을 하고 있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속에 있는 마음과 숨겨진 의도를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하는 마음의 동기와 감추고 있는 의도를 다 보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보실 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한 율법사는 어떤 사람이었다고 합니까?

이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함정에 빠뜨리고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마가복음에 나오는 한 서귀관은 어떤 사람이었다고 합니까? 이 서귀관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자신이 평소에 궁금해 하던 내용을 질문 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 두 사람은 같은 내용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하고 있는 마음의 의도와 동기는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을 향한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과 그 사람이 하는 행동도 보시지만,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 보시고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서로 다릅니다.

사무엘 서는 이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다윗을 뽑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삼아주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시켜 볼까요?

우리는 지금 같은 시간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드러난 외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외적모습으로 볼 때에 우리 사이에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똑 같이 예배자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우리들이 가진 마음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주일이 되고 예배 시간이 되어서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참석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그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세심한 준비를 하고 참석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때에는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과 함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과 중심까지 다 보시고 평가하십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일을 성경 속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세리와 바리새인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아마 이것은 공적인 기도시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 공식적인 기도시간이라면 세리는 기도하러 성전에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러 성전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두 사람은 기도생활을 아주 중요시 하였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 두 사람이 성전에 나아가서 어떤 기도를 했다고 합니까?

 

바리새인이 한 기도가 11-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같은 시간 세리가 한 기도가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똑 같이 기도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똑 같이 기도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기도하는 마음은 서로 달랐다고 합니다. 외형적인 모습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더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믿음으로 구별된 삶을 살면서 기도생활에도 열심이었던 바리새인이 더 믿음이 있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도 더 큰 확신을 가지고 내가 저 세리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인정해 주시고,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판단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판단과 관점과 우리들의 판단과 관점이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이런 서로 다른 판단과 관점은 예배와 기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모든 삶에 다 적용됩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그 맡은 일을 하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따라 공부를 합니다. 그냥 겉모습만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직장에서 충성스럽게 일을 하고, 모든 학생들이 다 학교에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한계는 외적으로 나타난 행위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의 상사들은 부하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는 태도와 자세를 보고, 누가 성실하게 일을 하고 누가 불성실하게 일을 하는지를 평가합니다. 그래서 선생님들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태도와 자세를 보고 누가 열심히 공부하는지 아닌지를 평가합니다. 왜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나 동기나 숨은 목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러나고 나타난 모습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동기와 숨은 의도와 목적을 다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그 직장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과 그 직장이 보유하고 있는 첨단 기술과 정보를 습득하고 빼내어서, 그 기술과 정보를 가지고 더 좋은 대우를 약속하는 곳으로 이직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을 다르게 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구분해 보실 수 있으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공부를 성실하게 하여서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삶과 사회에 유익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학생들과, 오직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구분해 보신다는 것입니다. 학생들 중에는 심지어 이런 학생들도 있습니다. 공부한다고 교실에 앉아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공부를 포기하고 있는 학생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서로 다른 학생들을 구분해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외형적으로 드러난 나의 행위 뿐 아니라, 내가 가진 마음의 의도와 숨은 동기까지 다 살펴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우리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그 삶으로는 마치 하나님이 없으신 것 같이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실 신앙이 없는 불신자나 다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삶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해 주셨습니까?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가복음 12:29-3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배우기 위해서 질문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선한 마음으로 질문을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악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질문하였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의도로 질문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답해 주고 있는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마치 이 두 사람의 의도를 전혀 모르시는 분처럼 그 질문에 대답해 주시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저 같으면 율법사와 서귀 관을 향해, 너는 선한 마음으로 질문하고 있구나!’ ‘너는 악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질문하고 있구나!’ 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나는 네 마음을 다 알고 있다. 그러니 위선자와 같이 살지 말아라.’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진 마음에 대해서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라서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 아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침묵하셨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악한 마음을 다 들추어내면, 그 사람은 영원히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영원히 예수님의 대적 자를 자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셔서, 때가 되고 기회가 되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고 그렇게 모르는 척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나중에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나와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모른 척 눈감아 주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보면 두 사람에게 똑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치심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가르치시거나 차별하여 가르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 목사님들, 교사들, 구역장들이 반드시 배우고 본 받아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입장과 처지와 환경들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치우치지 않는 동일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늘 이런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지혜 있고 겸손한 일군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이 두 사람이 보인 반응입니다.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질문하였던 서기관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감사하고 동의하였습니다.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반응을 보인 서기관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런데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나아왔던 율법사가 보인 반응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약점을 잡고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악한 마음의 동기로 예수님께 나아왔는데, 아마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흠을 잡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 것 같아 보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우리 마음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태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지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먼 사람들이겠습니까? 그 마음에 악한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가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2:20-21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 안에 있느니라.’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 안에 임하여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죄 사함 받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 안에 임하여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보다 더 큰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 안에 임하여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우주도 그렇게 크게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 안에 임하여 있기 때문에, 잠시 잠깐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살지도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 안에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풍파 많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세상 풍조에 따라 요동하거나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이런 사람들은 그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며 이 세상 속에서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듯이 자기 이웃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런 삶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읽은 말씀에 의하면, 가장 큰 계명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먼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온 마음을 다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시는 희생적인 삶을 통해 보여 주셨다고 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도 이렇게 행동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너희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2:29-31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하나님 이외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37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문맥상으로 보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지켜 행하며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21절에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23-24절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말씀을 지켜 행하며 사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23-24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19-21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어떤 형제들을 보면 서로 사랑하여서 마치 친구처럼 잘 지내는 형제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형제들과 별 어려움이 없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형제를 향해 미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형제를 마치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그 인생이 평탄하여서 별 어려움이 없이 잘 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 앞에 그 자신의 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는 잠시 편안하게 살 수 있으나, 장차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는 잃어버리고 영원한 멸망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해 주십니까?

이런 사람의 삶에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의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나아오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주시는 어려움도 사실은 하나님 사랑의 다른 표현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사람들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행위를 등한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성경은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너희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 고 거듭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게 되는 믿음의 그 첫 시작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시작도 중요하게 보시지만, 믿음을 가진 이후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도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삶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이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을 지키게 될 것이며,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해 주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실 것 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순종하는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기도를 보면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이 바라시고 원하였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기도를 보면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결국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에게 붙잡혀 주시고 따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본 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들도 겸손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라 내 마음의 원대로 하지 말고, 겸손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성도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면서 선한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살며,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경은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살아야 할 믿음의 삶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가장 큰 계명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깨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과 삶이 하나 된 성도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속에 가지고 사는 마음이 같은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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