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4. 4. 14:42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

요한복음 11:25-26

 

들어가는 말

 

기독교에서 중요시 하고 있는 신앙의 2대 절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 하나는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아담의 범죄에 함께 속하여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성자 하나님이 신성을 부인하고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 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교회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최대의 명절로 지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늘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중심적인 내용도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초대교회가 세상에 전했던 가장 중심적인 내용도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중심적으로 전했던 내용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해 주신 것이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전했던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오늘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부활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부활 주일을 지키는 우리들과, 우리 가정과, 우리 사역과,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이 성취해 주신 부활의 축복들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부활이고 자신이 바로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1: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면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실 때 현재 진행형 동사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현재, 다른 말로 하면 영원한 현재’ ‘계속되는 현재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의역해 보면 나는 언제나 부활이요, 나는 언제나 생명이니’,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언제나 부활이요. 언제나 생명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창조하신 생명체들 중에는 식물도 있고, 미생물도 있고, 동물도 있고, 사람도 있고, 영적 존재인 천사도 있습니다. 이 모든 생명들이 생명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기원이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기원이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에 해를 입히는 것을 살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생명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을 두 가지 의미의 범죄로 봅니다. 첫째는, 생명이 해를 입은 그 사람에게 범죄한 것으로 봅니다. 둘째는,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도 범죄한 것으로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기 생명을 해하는 자살도 살인으로 봅니다.

자살은 자기 생명을 해하는 행위 일뿐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범죄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안락사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안락사도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범죄 하는 일종의 살인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우리 하나님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의 생명은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가 낳았으니 우리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의 생명은 우리 자녀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또 우리 자녀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것이기도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가인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가인은 그 동생 아벨을 살인하는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범죄가 바로 이방종교에서 자기 아들을 제물로 삼아 드리는 인신제사입니다. 인신제사는 사람들이 신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주신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신제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제사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순장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순장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섬기며 살던 종들을 함께 장사지내는 제도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나라를 오래 두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풍습을 가진 나라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외아들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과 이방인들이 했던 인신제사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 제사를 드리는 믿음이 다르고 마음이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마음으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방종교와 같이 아들의 생명을 희생으로 헌신으로 생각하고 바쳤겠습니까? 아니면 자신과 그 아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생명을 다시 바치라고 하시니,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과 믿음으로 바쳤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의 생명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바치라고 하였어도 바쳤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우리는 순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큰 희생이며 헌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바치신 것도 일종의 순교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그 아들이삭을 번제로 바친 것도,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생사를 맡기고 순종하였던 것도 일종의 순교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순교적인 순종을 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시었다.”라고 합니다. 이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이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만 믿음으로 순교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예수님께서 언제나 부활이요. 언제나 생명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둘째, 예수님은 부활의 생명을 취하신 분이시라는 뜻도 있습니다.

 

생명의 참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왜 나는 부활이요.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은 인류를 대신해서 고난 받아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생명을 취하신 분이심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음은 무엇입니까?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분리는 언제 일어났습니까?

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아담 안에 서 있는 온 세상은 아담 안에서 이 사망과 죽음의 어두움에 속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 참 빛이십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5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복음서(4:16)에서도 또 같은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이런 말씀들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사망의 그늘진 이 세상을 비취시는 참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생명의 빛을 비취셨습니까?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생명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아멘.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4: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한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부활신앙을 가졌던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55-58절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지금 이 세상에서는 사망을 이긴 이 구원의 빛이 만방을 비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방이 그 빛으로 나아오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60:3입니다. 열방은 네 빛으로 열 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이 모든 은혜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의 생명을 취하신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멘.

 

또 예수님께서 언제나 부활이요. 언제나 생명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셋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아담 안에서 죽은 생명을 다시 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해 고린도 전서 15:4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님은 죽은 영혼들을 다시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고 합니다.

아담 안에서 죽어 있었던 우리의 영적 생명을 다시 새롭게 재창조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아담의 범죄는 인류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분리 되는 이것이 곧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생명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취하신 부활의 생명을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수여해 주십니다.

 

모든 인류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고, 사망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아담을 따르는 사망의 길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생명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누리며 살수도 있고, 아담을 따라 사망의 길을 택하여 죽음에 매여 살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을 때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사망 권세가 나사로의 육체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 육체는 썩고 부패되어서 심한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상황은 다 끝나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1:23절을 보십시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11:24절을 보십시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의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 육체의 생명을 다하게 되면 죽게 됩니다. 이 때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육체의 죽음을 통해 죽은 육체와 살아 있는 영혼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 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영혼들은 육체에서 분리되어서 아브라함의 품이라고도 알려지고 있는 낙원으로 가 있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은 육체에서 분리되어서 음부에 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의 유무에 따라 죽은 후에 가게 되는 곳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면 낙원과 음부에 가 있던 영혼들이 언제 다시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됩니까?

백 보좌 심판을 앞두고 모든 영혼들이 부활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5:28-29절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르다는 이 마지막 때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부활 이후에 하나님의 판결에 따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 복락을 누리며 살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영혼들은 사단 마귀와 악령들이 가는 지옥 불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5-26절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부활에는 마지막 날의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언제나 부활이요, 나는 언제나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부활의 생명을 취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 부활의 생명을 주실 수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증거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담 이후부터 지금까지 죽고 또 죽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죽음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영적으로는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의 부활에 모두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과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죽지 않고 육체로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공중으로 휴거되어 올라가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위에 세워질 천년 왕국의 백성이 되어서, 육체를 가지고 자녀를 낳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백 보좌 심판 바로 전에 육체적인 몸을 벗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영체 즉 영혼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몸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하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인류 중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어떤 고백을 하였습니까?

27절입니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런가 하면 마리아는 어떤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32절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의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이 빨리 오셨더라면 그 오빠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섭섭함이 담겨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하면서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또 어떤 사람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심한 분노를 느꼈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심한 분노를 느끼셨습니까?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전능하신 성자 하나님이 자신들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생명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 자신들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사망 권세에 사로 잡혀 죽음 앞에서 절망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통분히 여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있지만 사망의 권세에 사로 잡혀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내가 부활의 생명을 주는 분이시라는 것을 친히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르다가 어떻게 예수님을 제지합니까?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활을 주시는 주님으로 믿고 있으면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이심을 믿고 있으면서도, 실제 상황 속에서는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면서 또 우리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마리아와 마르다와 같이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주가 되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 내가 중병에 걸렸을 때는 우리는 하나님이 내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의사가 말기 암이라고 그래서 가망이 전혀 없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사는 내 병을 치료해 주지 못해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치료해 주실 줄 믿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재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의사를 의지하지 않습니까? 대부분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여주고 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또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 하셨습니까?

40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비록 현실은 오빠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 된지 나흘이나 되어서, 그 육신이 썩어가는 냄새가 무덤 밖까지 나고 있을지라도, 전능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돌을 옮겨 놓는 믿음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와 그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부활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이론적으로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지식적으로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언제나 부활이고 나는 언제나 생명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실재로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생명이, 부활의 역사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멘. 이런 믿음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언제나 부활이요. 언제나 생명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넷째,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바로 이 부활의 증인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사실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장차 있을 부활을 소망을 가지고, 또 장차 있을 부활의 증인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 앞에 죽음이 다가올 때, 그 죽음을 두려워해서 거의 이성을 잃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망을 향해 사도바울과 같이 담대히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아멘.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망 너머에 있는 생명, 믿음으로 얻게 된 부활의 생명을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들은 죽음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소유하고 믿고 있는 부활신앙을 전해 주는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이 부활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시고,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부활 주일에 이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 불러 주셨음을 감사하며, 사망과 죽음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이렇게 부활의 증인이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주간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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