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내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0. 6. 21. 15:07

내 제자가 되려면

누가복음 14:25-33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52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남자만 5,000명이 모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적어도 2만 명을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인 장소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였다고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광야가 아니고 도시나 그 인근 지역에 계셨더라면 이보다 몇 배나 더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이런 열정은 누가복음 14장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거의 다 마쳐 가고 있던 때입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25절 말씀을 보면 이때도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로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삶의 모든 문제를 미루어 놓고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을 보면서, 나를 따르는 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말씀이었지만, 오늘 우리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당시 사람들과 동일하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14:26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제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우리 가족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되면 마치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해 주고, 우리와 같이 염려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자기 생활을 포기하면서 까지 우리를 도와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그리고 자기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어릴 때 우리를 위해서 사랑으로 희생하고 헌신하시면서 돌보아준 분들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아니시면 오늘날 우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우리가 어른이 되고 나니, 우리 부모님들은 연세가 많아 지셔서 육체도 쇠약해지시고 생활능력도 없어지게 되셨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어려운 생활을 하시면서 오직 우리를 위해 살아오시다가 보니 자신들의 노후를 위한 준비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런 부모님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맞습니까?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고 그 노후의 삶에 도움을 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라는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또 그런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나 거역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라는 말씀도 하셨을 것입니다.

 

아내와 자식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내와 자식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내는 다른 사람이 사랑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남편 된 내가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얼마나 사랑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까?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셨듯이, 남편들은 그런 사랑으로 자기 아내를 사랑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늘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고 아내 앞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남편들 마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1/10, 1/100정도만 아내를 사랑해 주어도 아내들이 얼마나 행복해 하겠습니까? 설교 말씀을 준비하면서 늘 느끼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가진 사랑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사랑의 마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자녀는 우리에게 어떻습니까?

자녀는 부모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만약 그 부모가 없었으면 그 자녀들도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바로 부모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한 사람의 건강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건강한 한 사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돌보아 주는 일을 부모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그 자녀를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나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 대신 맡아서 돌보고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돌봐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를 대하듯이 그렇게 자녀를 대해야 합니다.

 

아직 철이 없어서 자녀가 바른 길로 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게는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며,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맡은 자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눈물로 씨를 뿌려 나가야 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들입니까?

부모님의 피를 함께 나눈 나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서로를 향해 사랑을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족 사이에 미워하고 다투고 재산싸움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삶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옳지 않습니다. 형제들을 향한 우리 사랑이 얼마나 적은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족들의 분쟁들만 보아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어떤 권면을 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형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시면서,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여 죽이기까지 하였던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라가라 바보’ ‘멍청이라고 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다가 만약 네 형제와 불화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난 후에 예배를 드리라.’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지금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는 다 우리의 가족입니다. 디모데전서 5:8절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자기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을 배반한 자.’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배후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는 불신자도 자기 가족은 사랑하고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문 삼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런 가족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 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생명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가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그 형제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볼 때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륜에도 어긋나 보이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의 계명이나 말씀과도 어긋나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족까지도 미워해야 내 제자가 될 수 있다.’라고 하신 말씀과 가족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조화될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로 성경을 보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누가복음 14:26절 말씀을 보면, 미워해야 한다.’라는 이 단어는 정말로 미워하고 싫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셈족 특유의 언어적 표현법으로 덜 사랑하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말씀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 10:37절 말씀을 보면 더 확실해 집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을 보면 부모나 그 자녀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아주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라 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랑하는 두 대상이 우리 앞에 있을 때, 어느 것을 더 중하게 여기느냐, 어느 것에 더 우선권을 두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덜 중히 여기고 우선권을 두지 않는 대상은 마치 미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아 막 선교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 그 부모는 하나 뿐인 그 자녀에게 내 나이도 많고 몸도 아프니 나를 떠나가지 말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와 같이 지내자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자녀는 여러 날 밤을 지새우면서 기도한 후 결정을 내립니다. 그 부모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선교지로 떠납니다. 이 선교사는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선교사로 사명까지 맡겨주신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선교지로 떠나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선교사님이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 부모를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부모님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마치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 부모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네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마치 부모나 처자나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는 것 같이 대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까지 각오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각오까지 되어 있어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할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4:26절의 이 말씀은 그 어떤 인간관계도, 심지어 내 목숨까지라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부모, 처자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이 되는 아픔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둘째,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14:2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그 모든 은혜는 무조건적인 은혜이고, 거저주시는 은혜이고, 공짜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은혜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전혀 수고하지도 않았고, 전혀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은 것뿐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며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는데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이렇게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무리도 있고 제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무리는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면 무슨 좋은 일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치 관중이나 구경꾼처럼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어떤 일도, 어떤 수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렇게 무리와 같은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고 싶어서,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서, 어떤 사람들은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믿고 따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누구나 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믿음 안에서 변화되어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누가복음 14:27절 말씀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도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입니다.

이 때 아담에게 속하여 죄의 종이 된 자기 자신은 죽고,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함께 부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자기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된 사람들은 아담의 죄 안에서는 죽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무슨 요구를 하시든지 순종하게 됩니다.

 

자기가 죽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진급에 지장을 주고, 경제 적으로 손해가 나게 하고, 때로는 핍박과 박해와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지라도, 믿음으로 묵묵히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상황이 좋을 때는 예수님을 따르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그 삶에서 당하는 고난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약점을 십자가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 가족을 십자가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가정의 어려움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육신의 질병과 아픔과 고통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없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이런 사람들만이 예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믿고 따라가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그 말년에 믿음에서 떠납니까?

왜 수 십년을 잘 믿던 교회 중직 자들이 이단에 빠지게 됩니까?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은 아직 자기가 죽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도 자기 뜻대로 믿고, 예수님을 떠나 돌아설 때도 자기 뜻대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주인인 자기 뜻대로 믿기도 하고 돌아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은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미 자기가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성령이 그 마음에 강한 소원을 주시면, 그 말씀을 따르고, 성령이 주신 소원을 따르는 것이 내게 손해가 될지라도 따라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이 우리가 가지고 고백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셋째,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4:33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렇다고 이 말씀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다 정리하여서 하나님께 바치고 교회에 바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잠시 내게 맡겨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 자기의 소유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돈의 노예가 되고, 탐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돈의 노예, 탐욕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소유권을 내려놓고, 그 모든 소유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난 후에 나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청지기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도, 지혜도, 건강도, 가정도, 물질도, 자녀도, 직장도, 사업도, 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그 모든 것들을 바르게 관리하고 또 바르게 사용하다가, 하나님께서 돌려 달라고 하시면 돌려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청지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집에 어린아이가 구슬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슬이 가보로 내려오던 조선시대 백자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백자 속에든 그 구슬을 빼내려고 백자의 조그마한 입구에 속을 밀어 넣었습니다. 아이 손이 워낙 적어서 겨우 손이 백자 속으로 들어갔고 아이는 그 안에 있는 구슬을 손으로 잡았습니다.

 

구슬을 잡은 아이는 이제 손을 빼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슬을 잡은 손은 그 좁은 백자의 입구에 걸려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그럴수록 더욱 힘을 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손만 더 아파왔지 그 손을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이 아이의 팔은 백자의 좁은 입구에 눌려서 점점 부어만 갔습니다. 아이는 손이 아파서 백자 속에 손을 넣은 채로 막 울었습니다.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듣고 그 부모가 달려왔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손을 빼 보려고 하였지만 구슬을 쥐고 있는 손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는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백자를 깨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망치질을 하며 가보로 내려오던 그 백자 항아리를 깨었습니다.

 

그랬더니 구슬을 꼭 잡은 아이의 손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부모는 아이가 잡고 있는 구슬과 가보로 내려오던 백자를 바꾸게 된 것입니다.

이 아이의 행동은 어른 들이 보기에는 아주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입장에 서서보면 아이가 그 구슬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아이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물질을 포기하는 것이 쉽습니까?

그 가진 물질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물질을 포기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내려놓는 것은 쉽습니까?

물질에 초연하고 명예에 초연한 삶을 살겠다고 하던 목회자들이, 그 말년에 명예를 포기하지 못하고 물질을 포기하지 못하여서 종종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목회자들도 이렇다면 이 세상 속에서 매일 매일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것까지 다 내려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내려놓지 못한 물질, 명예 때문에, 주를 부인하는 삶을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그 부모를 섬기기 싫어하여서 고르반제도를 악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물은 하나님께 바친바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부모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요즘에는 부쩍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녀로써의 역할을 하지 않는 자녀가 많이 있습니다. 아내로서의 역할과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형제가 작은 이익을 위해 다투고 심지어 법정에서 싸우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일은 내가 당해 봐야 그 아픔을 압니다.

그러면 이런 일을 당하게 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아픈 마음을 토로하는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한나가 이런 아픔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는 것 때문에 당하는 아픔과 설음을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합니까? 저는 한나와 같은 기도를 수도 없이 많이 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이런 시대적인 경향을 극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기 목숨의 문제까지 후순위로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기 목숨을 마치 미워하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다른 것을 다 포기해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청년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부자청년은 모든 삶이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유한 물질을 내려놓지 못하여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희생적인 마음, 대가를 지불하려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비유

그러면서 말씀해 주신 것이 망대 비유와 전쟁의 비유입니다.

그러면 이 두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1) 망대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 망대를 세울 수 있는지를 먼저 계산을 해 보듯이, 2) 전쟁을 앞에 두고 있는 왕은 과연 내가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먼저 계산해 보듯이, 3)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도 먼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계산도 해 보지 않고 무턱대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다가 중도에서 포기하면, 그것은 사람들 앞에도 하나님 앞에도 부끄러운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내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희생하고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꼼꼼하게 점검하고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는 희생과 헌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게 될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광도 있고 축복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축복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고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 영광과 축복의 보화가 묻혀 있는 밭인 천국을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 치루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얻게 되는 영광이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든지 말든지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시작만 했다가 끝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면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꼼꼼히 따져보고 자신이 없으면 처음부터 제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따르려고 할 때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사는 재미를 잃게 될 수 있고, 세상 친구를 잃게 될 수 있고, 세상적인 야망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과의 관계가 불편해 질 수 있고,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드려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믿고 있는 신앙 때문에 환란과 핍박까지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잃게 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얻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얻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저주에서 해방되고 죄의 저주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며 살게 되는 특권과 권세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혜와 풍성한 은사들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가 된 사람들은 날마다 살아가는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살며, 또 부활과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는 이런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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