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성도인가?
사도행전 10:34-35
이제 2021년도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불과 몇일 후면 2022년이라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 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하게 되는 뜻깊은 계절에, 나는 어떤 성도로 한 해를 살아왔는지, 또 어떤 성도로 새로운 한 해를 살아갈 것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성도였습니까? 내가 어떤 성도였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첫째 살펴볼 것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정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때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이런 차이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가지고 사는 마음의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잠언 23:7절 말씀에서는 ‘대저 그 마음이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은 그 가지고 있는 마음에 따라 그 하는 말과 그 하는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가지고 있는 마음이 다릅니다.
그 가지고 있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살아가는 삶이 다르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살아가는 삶의 차이는 사실 그 가지고 있는 마음의 차이에서 시작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성도인가를 살펴보면서,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 가지고 사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신앙을 가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어서 긴급히 돈이 필요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 돈을 주셨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전 보다 더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재물을 얻게 되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과 재능과 능력으로 재물을 얻고 소득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도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조되는 사람들의 예를 성경 속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본다면, 예수님께서 약 3년 6개월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고칠 수 없었던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합니다. 왜요.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침 받았다는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고, 예수님에 대한 유대 당국자들의 적개심이 점점 커져가서 예수님을 계속 따르다가는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불이익이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두 사람 예수님을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마태복음 11:20-24절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을 많이 행하시며 아낌없이 사랑을 해 준 이런 도시들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병을 고침 받은 감격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그 감격이 식어지고 상황도 변해가자 하나 둘 예수님을 떠나가고 나중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간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왔다가 기적을 체험하고 은혜는 체험하였으나, 이 기적의 체험이 은혜의 체험이 그 마음속에 역사하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던 이 사람들은 상황이 변하자 곧 그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받은 은혜를 유지하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나의 삶에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해 주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이렇게 서로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5000명,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치면 적어도 약 20,000명가량의 사람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기적을 5병2어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기적을 체험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기적을 통해 배 고품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또 기적을 통해 로마의 군대도 물리치고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의 기대를 채워주려고 온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려고 온 세속적인 메시야도 아니다.’ ‘나는 아담의 죄 안에서 그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의 주는 메시야로 왔다.’ ‘나는 너희에게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왔으며, 나는 너희의 영적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신령한 음료로 왔다.’ 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내용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따라보았자 ‘아무 이득이 없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다 떠나갔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이렇게 쉽게 예수님을 떠나갔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실망한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저 사람들과 같이 나를 떠나가려느냐?” 그 때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당시 제자들도 군중들과 같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었다면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베드로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떠나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5병 2어의 기적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동일한 기적을 체험하고, 동일한 은혜를 체험하여도, 그 보이는 반응이 다르고 그 살아가는 삶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하나님께서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주실 때에는 잠시 감동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않고 곧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은혜가 되고 내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믿음으로 열광하며 따르다가도 상황이 바뀌어서 나에게 주는 유익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곧 바로 냉담하게 돌아서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 그 삶이 어려워지더라도 쉽게 믿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이 어려울수록 더 믿음으로 나아가는 특징을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믿음을 한 가정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욥의 가정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이들 가정보다 더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산 가정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실재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고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향해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시절이 끝이 나고 까닭을 알지 못하는 고난이 욥의 가정에 찾아왔습니다.
이 고난 앞에서 욥의 부부가 보인 반응은 달랐습니다. 욥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21-22절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요 여호와시오 거두신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욥의 아내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온 몸에 욕창이 나서 흉한 모습으로 고통하고 있는 그 남편을 향해 욥의 아내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구차한 모습으로 더 살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는 폭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도 욥은 그 순전한 믿음을 지킵니다.
욥기 2:10절입니다. “그대의 말은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합니다. 아내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 사람이라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말을 듣고서도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욥은 대단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욥은 어떻게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욥은 믿음이 확실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않고,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아내는 달랐습니다.
욥의 아내는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나온 삶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사는 기쁨에서 나왔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그 복이 다 사라지고 그 삶이 힘들고 어려워지게 되자, 곧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였고, 그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부인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욥의 아내는 그 남편 욥이 누구보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런 남편이 온 몸에 욕창이 생겨서 흉악한 모습을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남편이 믿고 섬기는 삶을 살았던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파할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만약 욥의 아내가 믿음이 신실한 여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그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믿음으로 그 남편을 위로하고, 사랑으로 격려하고 용기는 주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욥의 아내는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당신의 추한 모습을 더 이상 보기 싫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라.’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아내는 이 말을 통해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합니까?
우리는 상황이 좋을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이 살다가 상황이 악화되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던 욥의 아내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삶의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 오히려 더 진실한 믿음으로 나아갔던 욥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사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것을 말로 삶으로 보여주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믿음이며, 이런 성도들이 장차 하나님이 약속하고 있는 그 나라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요즘 세상을 보면 곳곳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요즘은 가정들이 불안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부모와 자녀 사이가 정상이 아닌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는 사랑과 신뢰로 묶여 있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도와주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고, 서로를 세워주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약점을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하고, 그 약점을 비난하고 헐뜯다가 내 뜻대로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으면 이혼도 불사합니다. 젊은 사람들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70, 80을 넘긴 노인들의 황혼 이혼이 그렇게 많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아내와 남편에게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 위해 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사랑과 이 마음은 반드시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을 덮어주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이 깨어지는 모습들 속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위해주고 섬겨 주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은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제가 전에 사회복지사 실습을 할 때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러 명의 여자 분들과 함께 실습을 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점심으로 복지관 구내식당에서 2,500원짜리 밥을 사 먹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식권을 사려고 3,000원을 내었는데 직원이 100원짜리 다섯 개로 거스름돈을 주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실습 동료인 어떤 여자 분이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제게 주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100원짜리 동전과 바꾸어 갔습니다.
나중에 왜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동전을 넣고 짤랑 짤랑거리며 걷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남자에게 이것보다 더 보기 흉한 모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인 제가 직원에게 받은 동전을 바지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고, 제가 하루 종일 동전소리를 내며 다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의 100원짜리 동전 다섯 개를 자신의 500원짜리 동전으로 바꾸어 준 것이었습니다.
이분의 마음속에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이 분은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남편도 아들들도 모두 집에 하나 뿐인 여자인 자기를 도와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이분이 목회자인 저에게 하듯이 그렇게 남편을 위하고 또 자녀들을 위하는 삶을 살자, 그 남편도 그 자녀들도 기쁘게 그 아내, 그 엄마의 일을 도와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한 아내가 남편을 섬기며 살고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는 삶을 살았더니, 결국 돌아오게 된 것은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는 어머니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멘.
이후에도 이분은 거듭거듭 저를 섬기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실습 동료인 어떤 한 아줌마가 나서서 막았습니다. ‘터치플레이 해요. 목사님 어떠세요. 터치플레이가 부담도 없고 좋지요.’ 그런데 이 아줌마는 부동산 중계 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업은 무시할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 속담에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황금 율의 말씀도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6:28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시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고도 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섬기며 살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마음속에 자기 자신을 두고 자기 체면과 자기가 받게 되는 평판에 신경을 쓰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선행을 해도 상대방을 위한 선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통해 받게 될 나의 평판을 생각하며 선행을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는 구분할 수 있습니까?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상대방의 의도를 금방 구분하게 됩니다. 고여 있는 물에 우리의 얼굴이 비취듯이 우리마음도 그렇게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하며 살되 위선적으로, 외식 적으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을 담은 선행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삶은 바로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행입니다. 아멘.
신앙을 가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 발견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하여 그 가진 재산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지불하고서라도 그 발견한 하나님과 그 나라를 사는데 기쁘게 지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바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잡아 오려고 예루살렘 공의회의 공문서를 받아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가까이에 이른 때에 자신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증거 해 오던 고난의 메시야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고 복음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사도 바울은, 세상에는 이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천하를 다니며 그 귀한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는 삶을 사는데 평생을 바쳐 헌신하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들도 버렸습니다.
결혼하는 것도 포기했습니다. 그 조상들로부터 전해 받은 유대교도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 깨닫게 된 복음을 위해 그가 세상에서 누리며 살 수 있었던 모든 특권들을 마치 배설물 버리듯이 그렇게 버렸습니다.
또 이런 모습을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특별함은 그가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받아들인 후에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보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마리아를 이 세상중심의 관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믿음이 좋았던 그 언니 마르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이기적인 내 동생 마리아를 좀 책망하시고 혼자 음식 준비하는 일에 힘겨워 하는 나를 도와주라고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르다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그런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해 주시면서 “마리아는 더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리아를 나는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대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대제사장들을 보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지위나 신분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목회자라고 해서 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음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복음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임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대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일반대중들은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때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선한 역사를 보면서 예수님을 좋게 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군중심리에 이끌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무리가 되었습니다.
자기 의로 사는 사람들은 보통 신앙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아가 너무 강하여서 하나님을 섬겨도 자기 의나 자기 평판이나 자기공로를 의식하면서 섬깁니다. 왜요. 자기 의로 사는 사람들의 중심에는 자아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고, 선한 일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셨을 때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을 해도, 기도를 해도, 구제를 해도,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여도, 모두 자기를 들어내 보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부자청년은 아주 좋은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부자청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부자청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청년은 좋은 마음이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역시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신앙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부자청년의 마음을 아시고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네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좋은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부자청년이 이제는 자기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세상과 물질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게 하시려고 그런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좋은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살기 보다는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을 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자청년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지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 성향을 버리기 힘든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다른 사람들 위해 살기 어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았던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
마르다입니다.
마르다는 부자청년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청년은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자기가 영생을 얻고 자기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삶을 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자기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전도여행에 피곤한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이 섬기길 원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마르다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의 대표 격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두 세계에 속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속해서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늘에 속해서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모두 이 두 세계에 속해서 살아갑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셨던 고차원적인 삶을 누가 이해해 주었습니까? 아무도 예수님의 삶을 이해해 주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살았던 제자들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주 오해하였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오해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한 나머지 스승인 예수님을 은 30에 팔기 까지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삶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2장을 보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주셨다” 고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 모두는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예수님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셨던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보는 하늘의 가치관이며,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가치관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차원 높은 성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마리아는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라다닌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였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깨닫고 이해했던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해 오신 메시야로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래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은 마리아의 이런 행동에 어떻게 비난했습니까? 제자들은 분개하면서 “왜 이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었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같습니다.
하늘에 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와 뜻을 깨닫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런 이해를 갖지 못한 저급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성도들의 삶은 너무 그 가치가 높아서 이 세상의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은 아무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세계를 보면 이 세상은 이전에 보던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지고 사람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지고 사물들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상만사를 보고 판단하는 판단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많은 예배를 드리고 또 많은 설교를 듣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기회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이 귀한 기회를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한번 예배를 드려도 한번 말씀을 들어도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귀한 은혜를 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만이 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신앙의 삶을 우리 모두 다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어떤 성도입니까?
우리는 어떤 성도로 한 해를 살아왔으며 또 어떤 성도로 새로운 한 해를 살아가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2022년 새로운 한 해를 우리는 어떤 믿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이런 마음이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과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지위가 아무리 높고 또 그 맡은 직책이 아무리 중요하여도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고, 또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바뀌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귀한 믿음과 마음이 ‘나는 어떤 성도인가?’라는 것을 살펴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