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문의 기적
사도행전 3:1-10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 중에 ‘블랙스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블랙스완’이란? 극히 예외적인 일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지만, 일단 그 일이 일어나면 경제에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미치는 사건을 말합니다.
‘블랙스완’이라는 말이 생겨난 배경은 이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조라고 하면 당연히 흰색의 백조를 생각합니다. 왜요. 사람들이 그 때까지 본 백조는 모두 흰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697년 호주의 서부에서 검은 색의 백조가 발견되었습니다.
검은 색의 백조를 발견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후 사람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을 ‘블랙스완’이라고 불렀습니다.
세계경제를 불황으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 사태도 ‘블랙스완’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전에 경험한 국가부도사태인 IMF도 바로 ‘블랙스완’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사도행전 3장의 말씀은 종교적인 ‘블랙스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당시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등장하는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걸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 후 40세가 넘도록 성전 입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 중에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1년에 세 번씩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던 유대인들까지도 이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고, 스스로 걷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전 미문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기적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어떻게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첫째, 성전을 가까이 하는 생활을 하다가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구약시대 성전은 오늘날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르게 표현하면 이 놀라운 기적은 교회를 가까이 하다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어떤 곳이기에 교회를 가까이 하다가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대사관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면 대사관은 어떤 곳입니까? 대사관은 다른 나라 안에 세워지지만, 그 대사관을 세운 나라의 주권과 공권력이 미치는 장소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와 능력이 교회를 통해 세상 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이 사람이 기적을 경험한 곳이 성전 문 앞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전 문 입구에서 구걸하다가 병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교회를 가까이 하다가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고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곳이 바로 교회이며,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로 역사하시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은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산에 있는 절간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회교 사원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으려면, 하나님이 이 세상 속에 세워주신 하늘 대사관인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아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 그 백성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그 백성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교회를 가까이 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을 경험하고 은혜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어떻게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까?
둘째, 기도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역사하실 때,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십니다.
교회사를 보면 병 고침의 역사는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기도에 헌신하였던 사람들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기도원을 통해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데, 제자들에게서는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서 물었습니다. 예수님 왜 우리에게서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느니라.”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적은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왜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입니까?’ 기도하는 사람들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기도의 유무에 따라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고 기적이 나타나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살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그 어느 시대 교회보다 더 열심히 기도했던 교회였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하루 3번씩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성전에 나아가 기도에 헌신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성전 미문에서 일어난 기적도 이렇게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에 헌신하였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에 헌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성도들, 기도하는 교회들, 기도하는 민족들을 사용하셔서 그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어떻게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까?
셋째, 남다른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이 사람은 평생을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해 오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지난 3년 반 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다 경험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 약 50일이 되는 날인 오순절에, 성령이 120명의 사람들에게 임하심으로 상황은 극적 반전을 이루었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운 일이 없는 세계 각국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세계 각국에서 오순절을 지키려고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자 한꺼번에 3,000명, 5,000명이 집단적으로 회개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상주하고 있었던 사람의 숫자가 약 50,0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의 숫자를 약 20,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이 사람도 당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폭발적인 복음의 역사를 보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라는 한계 때문에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생각해 낸 방법은 매일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날도 성전 미문에 나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성전으로 나아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눈빛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지하철 계단이나 도로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걸합니까?
돈을 넣어둘 수 있는 통을 앞에 놓아두고, 그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서 구걸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그 통에 돈을 넣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구걸하는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빤히 올려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그 눈총을 위협으로 느끼고 구걸하는 거지를 피하여 지나갈 것입니다.
이 사람도 같았습니다.
이제까지 이 사람은 구걸하는 통을 앞에 놓아두고, 고개를 숙이고 땅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달랐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눈을 들고 성전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나아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쳐다보는 눈빛이 얼마나 간절했든지 그 간절함이 베드로와 요한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의 역사는 언제 일어납니까?
기적은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경험하고 은혜를 경험하고자 하는 남다른 사모함이 있습니다. 왜요. 우리 하나님은 ‘사모하는 심령에 만족함을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사모함이 있는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는 공부를 잘 해야겠다는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수한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잘 믿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바라는 것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나라 대사관으로 세상 속에 세워주신 교회를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는 기도에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바라고 기대하는 그것을 얻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또 어떻게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까?
넷째,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믿음으로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에 들었던 한 가지 간증이 생각납니다.
어떤 여인이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 생을 마감하기 위해 강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변 인근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릴 때 교회 다닌 적이 있었던 이 여인은 찬송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그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맨 뒷좌석에 앉아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갑자기 하던 설교를 멈추시고는 ‘하나님께서 지금 애타게 찾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생의 의미를 잃고 죽으려고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맨 뒷좌석에서 설교를 듣고 있던 이 여인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부르면서 찾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그 마음의 상처들을 다 씻어버리고 이후 새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고 하는 간증입니다.
그러면 이 목사님은 어떻게 이 여인의 이름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이 목사님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시고 계시해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도 같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그 사람을 보니 그 전날과는 달랐습니다. 전에는 늘 땅에 엎드려서 구걸하고 있었는데, 이 날은 마치 베드로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멀리서부터 빤히 쳐다보면서 무언가를 갈구하는 간절한 눈빛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성령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감동하셨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사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평생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며 살아온 사람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먼저 ‘은과 금 얻기를 구한다면 네게는 네게 줄 은과 금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네가 구하는 것이 병을 고침 받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내게 위탁해 주신 권세로 명령하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을 듣고 이 사람은 일어나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곧 “발과 발목에 힘이 주어졌으며, 곧 서서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
이런 결과를 통해 우리는 이 사람이 베드로에게 구하였던 것은 은과 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병 고침의 역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는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권세가 있습니다. 모든 죄와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런 권세는 2000년 전에도 유효한 권세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권세입니다. 아멘.
정리해 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3장의 말씀을 통해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요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과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와 똑 같은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기적은 과학의 원리와 수학의 공식과 같이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기적을 살펴볼 때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살펴봐야 합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외부적인 요인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요인입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3장의 기적사건이 보여주고 있는 또 다른 요인은 무엇입니까?
다섯째,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입해 주실 때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아주 특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은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는 인성과 신성의 두성이 있어서(있는데), 각 성은 (각각)완전하고 (상호)유기적이며, 또 나눌 수 없이 (하나로)연합되어 있으나, 오히려 제3의 (새로운)성을 형성하지 않는다.’ 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2성 즉 신성과 인성 두 성을 가졌으나, 그 인격은 1인격 즉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칼케톤 회의에서 2성 1인격 교리를 확정한 후,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지가 하나이냐 둘이냐? 하는 것을 가지고 논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680년 6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1 인격 2 의지설이 정통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의지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이 신성과 인성 중 어느 성을 사용하셨을까요?
여러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신적인 능력을 행하실 때는 신성을 사용하시고, 인간적인 면모를 나타내실 때는 인성을 사용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는 언제나 인성으로 사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성으로 사셨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율법의 동해보상원칙에 따라 사람이 지은 죄는 반드시 무죄한 사람만이 대속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대속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만약 신성으로 공생애 기간을 사셨다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성으로 그렇게 기도에 헌신하셨다면 이 기도의 헌신은 단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쇼맨십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철저히 인성으로 사셨음에 대해 빌립보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빌립보서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때 품으라고 하신 그 마음은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의 마음이면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전혀 품을 수 없는 마음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품으라고 하신 이 마음은 신성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공생의 사역을 하실 때 가지고 사셨던 인성의 마음입니다.
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을 사람으로 사셨고, 결국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으심을 죽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사건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 등등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보면 이런 일들은 예수님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행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행하였고, 바울사도도 행하였으며, 기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기적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기적을 행하였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아멘.
이것은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 모든 기적들은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기적이 화학반응이나 수학공식처럼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어떤 때는 기적이 일어나고, 어떤 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믿음에 응답하시고 개입하시면 기적은 일어나고, 성령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으시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멘.
다니엘이 세 친구
구약성경을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신상에 절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 앞에 잡혀갔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이 세 사람을 아껴서 지금이라도 절하라 그리하면 살려 주겠노라 라고 했습니다. 그 때 이들이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
이들이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능히 자신들을 맹렬이 타는 풀무 불 가운데서, 바벨론 왕의 손에서 건져내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권적인 섭리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믿음대로 그렇게 해 주실 수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분명히 느부갓네살 왕은 풀무 불 가운데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그 안에 다니고 있는 사람은 네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풀무 불 가운데 개입해 주신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고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혈액 투석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혈액 투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여자 목사님도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하여야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회에 여러 번 참석하시더니, 어느 날 기도원에 가 있으니 기도해 달라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이제 투석을 중단하고 살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께 생명을 걸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 목사님이 생명을 걸고 금식기도 할 때 어떤 믿음으로 했겠습니까?
참 믿음으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기적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투석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적은 우리가 수학 문제를 풀듯이 그렇게 공식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우리 믿음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입해 주실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없으면 기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수년 동안 목회를 해 보니 목회도 공식처럼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기도만 하면 교회는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만 잘 전하면 교회는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는 좀 못해도 인격만 훌륭하면 교회는 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목회의 긍정적인 요인은 될 수 있으나, 목회도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당시의 상황
우리 삶에 기적은 언제 일어납니까?
기적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3장에서는 왜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까?
이 사건이 있기 이전에도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이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까?
이 당시에는 하나님이 꼭 개입하셔야만 했던 확실한 이유와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고 50일 되는 때였습니다. 이때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불과 같이 뜨거웠던 초대교회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성도들의 뜨거운 믿음은 온 예루살렘을 다 태우고도 남을 만하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상주인구를 약 5만으로 보는데, 오순절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약 2만 명 정도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이런 폭발적인 성장은 사회, 정치, 종교적인 긴장을 불러 왔습니다. 그래서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산헤드린 공회가 다시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통치자였던 헤롯왕도 이 신생교회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유대총독도 경계심을 가지고 밀정을 풀어서 초대교회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후에 얼마 있지 않아서 사도 바울에 의한 종교 박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정치적인 실권을 쥐고 있었던 헤롯왕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박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로마에 의한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가 곧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시는 이런 긴박한 상황들의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막 새롭게 시작된 초대교회에 이런 정치적인 박해와 종교적인 박해가 시작되면, 예루살렘 교회는 그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초대교회를 견고히 세울 계획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런 필요성에 의하여 하나님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고, 베드로를 통해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개입해 주신 것입니다.
이 때 성령 하나님의 개입으로 일어난 치유 기적은, 정치 종교적인 대적 자들의 공세를 무력화 시켰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시간을 두고 앞으로 다가오게 될 극한 고난과 박해도 이겨낼 수 있는 신앙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행전 3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 기적 사건은 개인적인 치유 사건이 사건만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가 견고한 신앙위에 세워지도록 주권적인 섭리와 통치로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그 포인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믿음으로 구해도 성령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적은 수학공식이나 화학 원리와 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실 때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현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왜 기적이 드물게 나타나는 시대가 되었습니까?
오늘 이 시대는 아는 것이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우리 이전시대 사람들에게 단비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더 이상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는 기상 현상을 관측하고 예측하는 고도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신화의 시대는 지나고 과학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나타날 토양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 힘만으로도 많은 일들을 해결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녀가 아프면 어떻게 합니까? 병원에 가면 해결됩니다. 건강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합니까? 각종 건강식품을 이용하면 됩니다.
오늘 날은 하나님이 아닌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별로 없습니다. 오늘날은 돈으로 안 되는 것이 별로 없는 시대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도 있고, 심지어 돈으로 사람의 마음까지도 얻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돈이 오늘날의 도깨비 방망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 풍조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쳐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지 않고 돈을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가 약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가 그 효력을 다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사용하면, 예수 이름의 권세는 여전히 믿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능력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이렇게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험계약을 할 때 그 회사 사장과 보험계약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회사의 대리자인 생활설계사라는 외무사원과 보험계약을 합니다. 그러나 그 계약서는 대표이사나 사장의 이름으로 체결되기 때문에, 그 계약이 성립된 그 시간부터 거기 기재되어 있는 모든 권리를 그 회사가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으므로 그 권세를 사용하고, 또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전하는 말을 믿고 순종하게 되면, 그 다음의 모든 책임은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이 믿음에 굳게 서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삶 속에서 사용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살피는 이유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3장의 말씀을 살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우리 시대는 심각한 이념의 갈등과 계층 간의 갈등을 겪어오고 있습니다. 또 안으로는 지역갈등과 밖으로는 남북대립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또 경제적으로는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사람들은 힘들어하고 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취직을 하고 싶어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사회 안에는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사회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도무지 새롭게 변화될 것 같은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무기력함을 해결해 나가고 변화시켜 나갈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지혜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힘으로 이런 상황을 새롭게 해 나가야 한다면, 우리는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유는 사도행전 3장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시대와 상황을 우리의 힘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성령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변화는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 속에 개입하시면,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이 사람과 같이, 내 힘으로는 전해 해결할 수 없었던 내 개인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고, 어찌할 수 없었던 우리 교회의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우리 민족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고통당하며 수탈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삶에 개입하셔서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셨고, 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우리 민족은 희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3장 말씀을 살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 속에도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나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전에 평양에서 은혜로 역사해 주셨던 것 같이, 오늘 우리 삶속에, 우리 교회 속에, 이 민족 가운데 은혜로 역사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행전 3장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 속에, 우리 가정과 직장의 삶 속에, 교회의 사역 가운데, 우리 민족의 장래 역사 가운데 성령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기만 하면, 우리 개인이 변화되고, 우리 가정이 살아나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교회로 회복되며, 우리 민족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한국교회와 이 민족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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