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교회
사도행전 2:42-47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교회를 세우는 사람, 혹은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개척할 때 그냥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세우려고 하는 교회 보다 앞서 세워진 어떤 교회나 혹은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교회를 모델로 삼아서 교회를 세웁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교회는 제자훈련을 하는 ‘사랑의 교회’ 같은 교회를 세우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교회는 사도바울의 신앙과 사역과 삶을 본받으며 사는 교회를 세우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안디옥 교회’와 같이 선교에 힘쓰는 교회를 세우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를 닮은 교회를 세우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게 될 때, 자기들이 세우려고 하는 교회의 모델이 될 만한 그 어떤 교회를 바라보면서 교회를 세웁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제적으로 이 세상 속에 세워나가려고 하시는 교회 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 상에 부합되는 교회가 이 세상 속에 세워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는 우리들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속에 세워지기를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교회의 모습을 알고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워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이 세상 속에 처음 세우셨던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 속에 세우시길 원하셨던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세워나가야 할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 세우시길 원하셨던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세우시길 원하셨던 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1:8절의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어떤 교회가 세워지길 원하셨습니까?
첫째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세워지길 원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하심으로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은 언제 임하셨습니까?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루살렘교회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요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던 120명의 성도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신약시대 교회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구약성경에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성령이 오심으로 유대인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가 이 세상 속에 세워질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약성경의 말씀을 근거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구약성경에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몇 날이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정확하게 10일 후에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주신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이 일은, 이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가고 은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습니다. 이제까지 유대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던 구원의 시대는 지나가고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구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는 신호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바로 성령 충만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으로 충만 함을 받는 것은 개인의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모두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사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늘 성령 충만함을 구하는 성도, 그래서 늘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한번 정리해 봅니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처음 세우신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첫째,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어떤 교회가 세워지길 원하셨습니까?
둘째는, 성령의 권세와 능력을 소유한 교회가 세워지길 원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절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이 주시는 권세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권능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존재와 신분을 변화시키는 권능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권능입니다. 셋째는 표적과 기사로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우리의 존재와 신분을 변화시키는 권능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가 변하고 신분이 변화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13절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나야 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 번 태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육신에 속한 자녀로 태어나고, 그 다음에는 영에 속한 자녀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은 그 출생이 완전히 다르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6절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존재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또 요한복음 1:12절에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의 존재의 변화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도 있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의 우리의 신분은 죄의 종, 마귀의 종이었다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이후에 우리는 의의 종,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살게 된다고 합니다. 성령이 그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에게 이런 존재의 변화와 신분의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아멘.
다음에 살펴볼 것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권능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존재와 신분의 변화를 주시면, 전에는 죄의 종으로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의 권능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살아가는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그러면 성령이 주시는 이런 변화가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예수를 믿었던 부유한 성도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기 집을 개방하고 그 소유의 모든 것을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부유한 성도들이 자기 소유재산을 팔아서 교회 공동체 앞에 내어 놓아서 필요한 성도들이 나누어 가지게 하는 가족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난 후에, 그 사람이 변하고 그 삶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웃에 사는 어려운 성도들을 돕고 구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이 성령 받기 이전에는 육신에 속하여 육신적인 가족 중심의 이해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이후에는 영적인 눈이 떠져서 영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를 섬기며 사는 영적인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입니까?
가족은 그 소유와 물건과 재산을 함께 공유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되자, 영적인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성도들에게 자기들의 가정을 개방하고, 자기들의 소유와 물건들을 함께 사용하며 살아가는 유무상통의 공동체를 이루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살피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유무상통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자기 소유의 땅을 팔아서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음으로 이해하게 된 이 영적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이 영적 가족 공동체가 예루살렘 교회라는 형태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 완성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때때로 한 가족 공동체로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다투고 분쟁하고 있는 교회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교회가 아직 완성된 영적인 가족 공동체가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적 가족 공동체의 완성은 장차 천국에서 이루어집니다.
천국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완성된 영적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어떤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까?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영적인 가족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이 땅 위에서 그런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려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며, 성령은 지금도 그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 세워 나가시고자 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아멘.
그 다음에 살펴볼 것은, 표적과 기사로 나타났던 권능입니다.
표적과 기사로 나타났던 성령의 권능은 사도행전 3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던 이 사람이 고침을 받게 된 것은, 그 일을 주도하였던 베드로의 권세와 능력이 아니며,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신 성령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난 표적과 기사였습니다.
이후 사도행전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든 표적과 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다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께서 그 따르는 표적으로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증거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 해 주었다.’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또 이렇게 표적과 기사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아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시길 원하셨던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첫째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둘째는 성령의 권세와 능력을 소유한 교회였습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세우시길 원하셨던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셋째는,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교회가 세워지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는 그 존재와 신분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인격과 삶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이 주시는 표적과 기사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한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주시는 이런 권세와 능력을 받아서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성령은 왜 성도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증인의 삶을 살게 합니까?
성령은 그 권세와 능력으로 죄인이 의인이 되게 하고, 깡패가 성자가 되는 변화를 이루어가십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이런 역사들은 그 어떤 힘으로도, 그 어떤 교육으로도, 그 어떤 훈련으로도 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변화와 역사와 표적과 기사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놀라워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런 역사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령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절 말씀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시길 원하셨던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교회를 세우시길 원하셨습니까? 첫째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둘째는 성령의 권능을 소유한 교회였습니다. 셋째는 복음의 증인이 된 삶을 살아가는 교회였습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진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길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해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로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2:46절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예루살렘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던 교회”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말은 ‘날마다’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얼마나 자주 모였으면 “날마다” 모였다고 했겠습니까?
물론 교회에 자주 모인다고 반드시 그 사람의 신앙이 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교회에 자주 모이기에 힘쓰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종말시대 교회의 특징은 모이기를 폐하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이 모이기를 점점 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기보다 자기를 중심으로 살게 되기 때문에 모이기를 폐하게 되고, 또 성도들이 영적인 것 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기 때문에 모이기를 폐하게 되고, 오늘 우리 시대를 보면 코로나19 라는 전염병의 창궐이 또 모이기를 폐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는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보면 볼수록 더욱 더 서로를 권면하여 모이기에 힘쓰라.’ 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종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힘써야 할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다고 할 때 그 강조점이 단순히 자주 모였다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열심히 성전에 모였던 데는 중요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매일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였고, 또 말씀을 연구하고 성도들과 친밀한 친교를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모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루살렘 교회는 예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목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들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는 사두개인들의 의식적인 예배와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예배와는 달랐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교회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 예배 가운데 충만한 은혜가 있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예배에 은혜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가르침에 힘쓰는 교회였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서 흩어진 성도들이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이렇게 세워진 안디옥 교회가 가르침에 힘썼던 교회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1:25-26절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 교회가 가르침에 힘썼던 교회였다는 것에서 우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예루살렘교회가 가르침에 힘썼던 교회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나바 혼자 안디옥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교인의 숫자가 늘어나자 혼자서 다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다소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바울을 초청하여 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가르침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롯왕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자 유대인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이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잡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무교절 기간이라 명절이 끝나면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사도행전 12:5절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그 당면한 문제를 가지고 뜨겁게 기도하던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도 당면한 문제를 가지고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비록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였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완벽한 지도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도자의 허물을 들추어내기보다 그 허물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됩니다. 왜요. 성도들이 서로의 허물을 감추어주는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기도하는 성도님과 기도의 대상이 되는 성도들에게 공히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예루살렘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 위한 목적으로 모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은 먼저 개개인들이 자신들이 소유한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44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그 다음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내어 놓았던 일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45절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그리고 그 다음은 교회의 중요한 일군을 다른 교회로 파송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15:22절입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 소유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통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자기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내어 놓는 일은 더욱 쉽지 않습니다. 또 교회적으로도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였던 유다와 실라를 다른 교회의 유익을 위해 파송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구원받은 은혜의 감격을 가지고, 개인적으로도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았고, 교회적으로도 자기희생적인 결단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이나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예루살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또 어떻게 보였습니까?
둘째, 칭송을 받을 만한 교회로 보였습니다.
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루살렘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았던 교회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말은 바로 ‘온 백성’ 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몇몇 사람에게서는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혹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서는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히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흠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가 있습니다.
이 일곱 집사에 대해 사도행전 6:3절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이 말씀을 보면 이때 선택함을 받았던 일곱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이 일곱 집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백부장 고넬료입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고넬료에 대해 사도행전 10:22절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리라 한대” 이 말씀을 보면 고넬료는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온 유대 족속의 칭찬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고넬료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 보입니다.
또 후에 합류한 사람인 디모데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디모데에 대해 이렇게 증거 합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있었던 디모데를 그의 복음사역의 동역자로 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렇게 칭찬받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일꾼을 세울 때에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함을 받는 그런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이 교회는 자연스럽게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그런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습니까?
셋째, 성장하는 교회로 보였습니다.
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 성장은 사람들의 칭찬과 아주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를 연구한 바에 의하면 성장하는 교회는 모두가 다 소문이 잘 난 교회더라는 것입니다. 소문이 잘 났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그 만큼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만한 일을 많이 한 교회라는 말이 됩니다. 좋은 교회라고 소문이 나고 칭찬을 듣는 교회가 되면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있던 성도들이 흩어지는 교회는 어떤 교회들입니까?
교회가 둘로 나누어져서 분쟁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또 성도들이 학연과 지연 등으로 서로 분리 되어 있는 교회, 또 장로와 목사가 분쟁하고 있는 교회, 당회와 교인들이 서로를 고소 고발하고 있는 이런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흩어지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교회로 만드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입에서 교회는 작지만 사랑이 있는 교회더라. 작은 교회지만 나누어 주는 교회더라. 영혼을 사랑하여서 복음전함에 열심히 있는 교회더라. 등등 좋은 소문이 나면 교회의 성장은 따라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 성장에 대해 세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칭찬받는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성장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을 경험한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니 그날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서 성령 충만함을 받았던 베드로의 설교가 예루살렘 교회 성장을 가져오게 한 것과 같이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본문으로 삼고 있는 2:47절의 말씀을 보면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은 바로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멘.
사도행전에서는 교회 성장에 대해 또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 번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장은 함께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5절입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 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 가니라.” 한국교회의 가장 약한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모두 내 교회 성장에만 목을 매고 있습니다. 내 교회만 성장하는 교회는 사실은 성장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런 교회는 다른 교회 성도들이 수평 이동해 와서 성장하는 것 같이 보일 뿐입니다. 진정한 성장은 우리교회와 다른 교회가 함께 성장할 때 이루어집니다.
평양 대 부흥이 일어날 때 그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던 장대현 교회만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세워져 있던 모든 교회가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또 한국교회의 성장기인 70-80년대에는 어떠했습니까? 당시에는 사과 괴짝 하나 갖다놓고 교회를 개척해도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던 시대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장은 언제나 이렇게 함께 성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함께 성장하지 않는 성장, 특정 교회만의 성장은 참된 성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개 교회를 성장시키는 묘책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우시길 원하시는 교회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고 세웠던 예루살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보였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살핌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우시길 원하시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이며, 성령이 권능이 역사하여 변화와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이며, 그리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여 주는 증인된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였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교회, 함께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세워야 할 교회도 바로 이런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도 믿음과 희생, 수고와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길 원하셨던 그런 교회, 세상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그런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모두 다 이런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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