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역사서

두 가지 질문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12. 18. 08:28



두 가지 질문

사도행전 22:6-10

 

1. 유대교인으로 있을 때의 바울

 

사도바울은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아버지는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일을 아주 중요시 하였으며, 조상들이 전해준 유전과 율법 준수에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당시 로마가 주도하고 있었던 세계 질서에 적응하고 순응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로마 군대가 필요로 하는 천막을 만들어서 납품하였던 사업가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부모님을 두었던 사도 바울은 어린 시절부터 조상들의 유전과 율법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당시 바울이 살았던 길리기아 다소 성은 헬라의 유명한 교육 기관들이 있는 교육도시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연스럽게 헬라의 학문들과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법률과 문화와 역사를 함께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바울에게서 뛰어난 학문적인 역량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자신과 같은 사업가로 만들지 않고, 이스라엘의 종교를 이끌어 가는 종교지도자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장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보내게 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가말리엘이라는 덕망 높은 종교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그 아들이 가말리엘의 제자가 되어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말리엘이 몇 명 안되는 제자 중에서 뛰어난 학문적인 진보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말리엘은 바울을 자신의 종교사상을 이어갈 수제자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장래 이스라엘의 신앙을 짊어지고 나아갈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 땅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그 어떤 기록에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고 경험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이 이 당시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유대 땅을 떠나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기독교신앙과 만나게 된 것은 오순절 이후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헬라 파 과부들이 교회의 구제 대상에서 빠진 것 때문에 일어난 갈등들을 해소하기 위하여, 헬라 파에 속한 성도들 가운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를 세웠고 그 중 한 사람이 순교자 스데반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스데반이 지도자로 있었던 헬라 파 공동체를 통해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됩니다. 이 때 바울은 스데반으로부터 유대인이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을 듣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를 주셔서 세워진 성전과 그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를 아주 중요시 여겼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율법, 그리고 그 조상들이 전해준 종교적인 전통을 아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데반이 하는 설교 속에서 유대교의 두 기둥과 같았던 성전과 율법을 공격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시 했던 성전은 그림자일 뿐이고 이 성전의 원형은 예수님이시라고 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면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키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이제 성전의 원형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오셔서 성전과 그 제사의식을 통해 보여주었던 인류 구속사역을 성취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성전과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더구나 차세대 종교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었던 바울이 볼 때, 이것은 유대교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이단적인 주장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또 스데반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율법과 계명들과 규례들 등등도 모두가 다 예수님을 증거 해 온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볼 때 맞는 말 아닙니까? 요한복음 5:39절에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으십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구약성경과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계명들과 율례들과 제사들과 절기들이 증거 해 오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인해 성경의 예언을 완성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조상들이 전해준 제사와 유전들과 전통들을 지켜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이제 약속들을 믿고 섬기는 구시대는 지나가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약속을 믿고 누리며 사는 새 시대가 열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스데반의 주장들을 바울이 용납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볼 때 스데반의 주장은 유대교를 말살하려고, 악한 세력들이 하게 되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바울이 볼 때 이제 구시대는 지나가고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신성모독자로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분노하여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유대인들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하며 그 겉옷을 벗어 유대인의 뜻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스데반은 분노한 유대인들이 던진 돌을 맞고 순교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바울에게 내가 유대교를 지켜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바울은 이단적인 공동체로 보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말살하는 선봉장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이후 바울의 박해가 얼마나 엄했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도 외에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성도들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박해의 와중에 살아남은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유대와 사마리아, 이방 나라로 도망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무너뜨린 바울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새로 생긴 교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있는 성도들까지 잡아오려고 산헤드린의회의 공문서를 받아 가지고 나바티아 왕국의 수도였던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 경험은 바울에게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회심을 하였고 그 삶을 180도 바꾸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 변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회심의 경험을 사도행전에서만 3번 기록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였던 곳곳에서 아주 자주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그 일을 간증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에서는 간증이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바울

 

바울의 다메섹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사람들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이후에는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런 변화를 성경은 거듭남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창조함을 받음이라고 합니다. 이 극적인 변화를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경험했고 이 경험은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예수님을 믿는 가장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은혜로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에 태어난 그때부터 하나님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게 될 때 그 삶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이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이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더 좋을까요?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더 좋을까요? 아니면 믿음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다가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더 좋을까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아기 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며 성경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늘 하나님이 계셔왔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을 확인하고 경험한 것을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상에서였지만, 하나님은 그 이전부터 역사하셔서 바울로 하여금 바리새인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시고, 유대교에 대해서 배우게 하시고, 이방나라에서 헬라와 로마의 언어와 관습들을 배우고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바울을 나중에 유대인과 헬라인, 로마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쓰시기 위해서이지요.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예비하심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별로 어색하지 않습니다. 낯설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사람에게는 믿음과 그 살아온 생활이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자신의 구주가 되심을 믿게 됩니다. 이 일은 철저히 하나님이 예정해 두신 그날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 후에는 새로 가지게 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세우고, 참 믿음과 참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도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에도, 어떤 때는 하나님이 믿어지다가 어떤 때는 믿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기복이 심한 상태로 살다가 일부는 구원 받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일부는 그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믿음을 주십니까?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수학공식을 가르쳐 주면 그 아기들이 알까요? 모를까요? 우리나라에게 가장 수학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와서 가르쳐 주어도 그 어린 아기들은 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말 그 자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에서도 같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 사람의 육신적인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영적으로는 이제 막 태어난 어린 아기와 같습니다. 이런 어린 아기와 같은 성도들은 말도 할 줄 모르고, 글도 쓸 줄 모르기 때문에 말로 글로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어떻게 가르칩니까? 아기를 가슴에 안고 사랑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아기가 조금 크면 엄마 아빠라는 말을 가르치고, 또 조금 더 크면 그림을 갖다 놓고 이것은 강아지이고 이것은 참새야 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ㄱㄴㄷㄹㅁㅂㅅㅇ의 글자를 가르치고, 12345678910의 숫자를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는 다 부모님을 통해 이렇게 배우며 자랐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가지게 되는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실까요? 죄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꿈을 통해서, 환상을 통해서, 또 각종 신앙체험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은 많은 신앙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신앙의 체험과 경험을 하면서 그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 가진 신앙이 성장하게 되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장성한 사람처럼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섬기게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결단과 선을 행하며 사는 삶이 억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으로 행하며 산 삶에 대한 은혜와 복을 사람들에게 돌려주시고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변화와 성장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가진 사람들은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남은 시간 동안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꼭 해야 하는 두 가지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 질문이 무엇입니까?

 

3.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두 가지 질문

 

첫 번째 질문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한 질문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2:8절입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첫 번째 한 질문이 바로 주님 누구시니이까?”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만이 해야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도 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을 바로 하지 못하여서 이단에 빠지고 잘못된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질문을 바로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을 받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잘못된 신앙으로 빠질 수가 없습니다. 이 질문을 하지 않아서 내가 믿어야 할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고 유혹자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과거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했습니까?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평판만 골라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에 대한 나쁜 평판도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슬람에서는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로마에 반역을 꾀한 반역자로 보고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류의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주시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사도바울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바울은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구약성경을 줄줄 외웠던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이었지만 예수님이 구약성경이 약속해 온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에게 진리의 성령이 역사하시자 영적 세계를 보는 바울의 눈이 열렸습니다.

요한 12:20, 27절입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바울은 이 때 자신에게 있었던 영적인 변화를 고린도후서 4:6절 말씀에서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그 즉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약속하고 계신 그 메시야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는 대속적인 고난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바울의 고백처럼 사람에게 배우고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1-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에게 임한 이 구원계시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정말 감격적인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 때 복음의 진리 안에서 놀랍고도 감격적인 구원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과 같이 바울은 이 때 진리가 주는 참 자유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이 믿음에서 한 번도 떠난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동안 이 믿음 안에서 충성하고 헌신했습니다. 이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이 믿음 안에서 일생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같은 믿음 안에서 같은 승리를 확신하며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바른 믿음에 굳게 선 바울은 예수님을 향해 두 번째 질문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 질문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 두 번째 질문을 바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입으로는 신앙이 있다고 말하나 그 삶으로는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살게 됩니다. 왜요. 이 질문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신앙인다운 삶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 두 번째 질문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바울의 자기 부인의 목소리입니다.

 

바울은 과거 유대교의 열심 있는 신자로서, 유대교의 파괴자요 유대교의 이단이라고 생각되었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이 일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은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까?

자신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 모든 삶들이 하나님을 위해 산 삶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 바울이 받은 충격과 놀라움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혼란이 오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은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삼일밤낮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3일 동안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겠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던 철옹성 같은 유대교 신앙이 무너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쌓아올렸던 그의 교만과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이 아무쓸모 없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바로 바울이 자기 부인을 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게 되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우리는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라고 묻고 있는 바울의 고백 속에서 자기가 살아온 그 모든 삶을 부인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 그가 이전에 가치 있다고 생각하였던 그 모든 것들을 마치 배설물 같이 여기며 버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예수를 믿고 변화된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당했던 섭섭한 일을 잊지 못하고 삽니다. 그리고 그 섭섭한 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그 상대방을 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들은 옛날 당했던 섭섭한 일도 함께 무덤에 묻어 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죽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영광도 있지만, 이 자기죽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살아가는 우리 생활을 보면 어떻습니까?

누가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섭섭한 말을 하고,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그 섭섭함과 무시와 멸시를 마음에 품고 그 사람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자기부인이 없는 사람들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가롯 유다는 왜 실족했겠습니까? 자기가 죽고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그 이해할 수 없는 말씀에 반발하여서 예수님을 은 30을 받고 대제사장들에게 팔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직까지 자기 부인을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주기도문을 외울 때 얼마나 그 양심이 괴롭겠습니까?

 

사람들을 평가하는 우리의 기준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느냐? 얼마나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냐?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참으로 자기가 죽은 사람이냐?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평가기준이 됩니다.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될 때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될 것입니다.

한 부류는 자기가 이룬 업적과 성취와 역사와 능력을 자랑할 것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 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인정해 주실까요? 여러분들이 그 해답을 찾아보세요.

 

우리는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라는 바울의 말 속에서 예수를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바울의 자아와 그 살아온 모든 삶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소리를 듣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가장 먼저 내가 무너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 안에 참 신앙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우리에게서도 바울에게서와 같이 먼저 자기가 무너지는 자기부인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말속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첫 번째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바울의 말속에서 또 어떤 음성을 듣습니까?

둘째,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신앙과 삶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입니다.

바울은 우리와 달리 극적인 회심을 하고 삶의 터닝 포인트가 확실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진 후 확실하게 그 삶의 변화를 가져왔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파에 속한 사람들은 이 바울의 극적인 회심을 보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런 극적인 회심과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바울과 같이 당신은 몇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는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육신의 생일을 알 듯 영적인 생일도 알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도 시간이 많이 지나서 거듭난 그 날이 언제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모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생일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이 말씀 속에 나타난 바울의 신앙태도를 아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굉장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그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인 유대교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도 기쁘게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그간 생명처럼 귀하에 여겨왔던 그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인생의 열차는 다메섹이라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절망 속에서 바울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 물음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앞으로는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가장 귀한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진지하게 드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쁨 마음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후에도 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 성도들도 그런 삶을 살 것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로마서 12: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자신이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글로 기록하여서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에 보냈습니다. 나중에 이것들이 모여서 오늘날 우리가 애용하는 성경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지금은 계시가 완성된 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뜻을 알려 주시려고 성경을 기록해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그 뜻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늘 가까이 두고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를 들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했던 두 가지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도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너희들도 바울처럼 주님 어떻게 할까요?” 라는 질문을 하며 살 필요가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질문하며 사는 사람들을 향해 시편에서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네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깨어 있는 성도, 복 있는 성도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바울의 말속에서 또 어떤 음성을 듣습니까?

셋째,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바울의 결단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을 보면 철저히 자기가 중심이 되었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이후에는 그 삶이 철저히 하나님과 그 말씀이 중심이 된 삶이 되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삶의 결단을 우리는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던 바울의 고백 속에서 듣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순교하는 그 날까지 오직 자신을 복음 전파자로 불러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그 일을 누구보다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보낸 선지자들은 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언하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믿고 있는 대로 예언하고 설교 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인 제가 설교할 때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자 뿐 아니라 설교를 듣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과 자기 입장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누구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다고 생각합니까?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바리새인이었던 사도바울은 지금 누구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나이까라고 하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 중요성을 예수님께서는 양의 우리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알아듣고 따른다.’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내 양이 아닌 사람은 내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말씀을 듣고도 따라오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이지만, 자기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마음, 다른 생각, 다른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향해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이 마음으로 똑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처럼 첫 번째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단사설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들도 바울처럼 그 살아갈 삶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바른 삶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우리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금년 마지막 남은 이 한 달 동안, 사도바울과 같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신앙과 또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야할 삶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2019년 마지막 남은 이 한 달을 은혜 속에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 역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말을 전하라  (3) 2023.03.12
예루살렘 교회  (0) 2022.03.20
나는 어떤 성도인가?  (0) 2021.12.19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0) 2021.08.22
미문의 기적  (0) 2021.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