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되어 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14:6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국 개척사를 읽어보면 미국의 역사는 동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새롭게 편입된 서부의 광활한 땅과, 그 땅에 묻혀 있다는 노다지에 대한 소문들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서부로 서부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동부에서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서부로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큰 강을 건너야 했고, 때로는 끝도 없이 펼쳐진 드넓은 초지를 지나야 했으며, 또 북미 대륙을 남북으로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로키산맥을 넘어가야 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그 땅에서 이미 북미 대륙의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부에서 서부로 가려고 하면 먼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인디언들을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인디언들을 그 삶의 터전에서 쫒아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는 생사를 건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서부로 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모든 어려움들을 다 극복하고, 기대의 땅 가능성의 땅인 서부로 가는 도로와 철도가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길이 없는 곳에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사람들은 선구자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구자의 삶은 힘들고 또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려고 나섰다가 포기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희생을 각오하지 않는 사람들은 선구자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선구자의 삶을 산 사람들을 존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개인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새로운 길을 놓으며 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개척사역도 어쩌면 새로운 길이 닦아가는 사람들과 같아 보입니다.
교회 개척에는 앞서 누군가가 닦아놓은 길이 없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 나가야 합니다. 마치 미국서부개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서부로 향하는 길을 닦기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였듯이, 개척교회 목회자와 그 가족들과 성도들에게는 남다른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개척에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자기희생을 각오한 사람들만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믿음의 길, 은혜의 길을 놓아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앞에 믿음의 길, 은혜의 길을 놓아주신 예수님, 우리의 길이 되어주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삶고 있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미국의 서부 개척자들과 같이,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과 같이,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닦아 놓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다.’라고 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길이 되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길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불교에 참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유교를 믿는 사람들은 유교에 참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회교를 믿는 사람들은 회교에 참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참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이런 종교들과 기독교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다른 종교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참 길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자신들의 종교에 참 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친히 참 길이 되어 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어디서 왔습니까?
종교가 해결해 주어야 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죄가 인간의 모든 악과 고통과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그 종교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참된 길이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의 근원적인 문제인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종교는 참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불교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 자신도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으로 살다가, 결국에는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몸입니다. 그런 석가모니가 어떻게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유교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유교의 시조인 공자는 인간의 최고의 덕을 인에 두었습니다. 그는 인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이 인의 수양을 위해서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와 제사를 중요시하고 이것을 인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공자는 사람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말했을 뿐,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회교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회교의 시조 마호메트도 인간입니다. 그는 610년경에 천사장 가브리엘로부터 알라신이 계시를 받고, 자신을 하나님의 사도라고 하면서 이슬람교를 창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 죄의 삯으로 죽어서 지금까지 무덤이 누워 있습니다.
인류의 대표적인 고등종교인 불교와 유교와 회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다 죄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서 지금까지 그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 종교의 시조들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그 종교가 죄의 지배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길이 되려고 하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이 죄의 처리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 누구도 여기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길이 되실 수 있으셨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 하나의 죄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오직 죽음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본래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신성을 부인하시고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심으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는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뿐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지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우리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이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사람들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휘장을 걷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후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 사도행전 4:12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하나님이 주신 예수라는 이 이름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이외에 인간이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내가 곧 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멘.
로마서 3:25-26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이 요한복음 1: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을 “내가 길이요”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보면, 우리가 길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데, 그 방법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모셔 들임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이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으며,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독선적이라고 합니다.
외골수적이고 꽉 막힌 사람,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 하나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리에 이르는 길을 하나라고 보지 않고 여러 서로 다른 길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산 정상에 오르는 방법을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려고 할 때 그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가지있다고 합니다.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고, 산에서 능선을 타고 올라갈 수도 있고, 산허리에 난 등산로를 타고 우회하면서 올라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진리에 이르는 길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록 산 아래에서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서로 다를지라도, 올라가고 올라가다가 보면 결국에는 산 정상이라는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나게 되는 그 산 정상이 바로 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비록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고, 불교를 믿고, 천주교를 믿고, 회교를 믿어도 진실하게만 믿으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곳은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다른 종교와 대화도 하고 같이 예배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TV로 잘 보지 않았습니까?
로마 카톨릭의 신부님이 4월 초팔일이 되면 절에 가서 미사를 집행하고, 또 불교를 믿는 스님들이 성탄절이 되면 성당에 와서 불법을 논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말대로 정말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진리에 이르는 길 또한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만이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다른 복음을 믿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 이외에 다른 무엇을 첨가하여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또 다른 복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절 말씀을 보면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러면서 그 아들이 누구라고 합니까? 3-4절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 예수님이 유일하신 복음이 되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멘.
예수님의 말씀에서 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저는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시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런 주장들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오신 우리 구주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길이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믿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모든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다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곧 바로 죽음이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반드시 먼저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에도 진리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종교에서도 이 죄의 처리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죄의 문제 처리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합니까?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처리해 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전혀 없어야 합니다. 자신도 죄인인 사람이 그래서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은 거룩한 천사들과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천사들과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처리해 줄 수는 없습니다.
왜요. 율법의 동해보상의 원칙에 의하면 인간이 지은 죄는 반드시 죄가 없는 인간이 대속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천사들이나 하나님은 비록 죄는 없으시지만 인간의 죄를 처리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죄가 없는 천사나 하나님이 그 죄가 없는 상태로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와야 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비록 죄는 없으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천사가 자기 마음대로 인간이 되어 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인간 예수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아멘.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 성육신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마서 1장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3-4절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러므로 불교나 유교나 회교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종교임을 증명해 보이려면 그 종교의 교주는 반드시 자신이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물어 보겠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가 하나님입니까? 유교의 공자가 하나님입니까? 회교의 마호메트가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다 아담의 후손으로 다 아담의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 약속해 오신 메시야로써,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성령을 통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셨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아멘 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다’ 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로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삶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분이 참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살아오신 삶을 통해, 그 하신 역사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이 부활의 생명은 예수님이 보내 주신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 부활의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됩니까? 성령 하나님은 거룩하신 영이십니다. 그래서 죄인과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다 죄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 죄의 문제를 처리해야 성령이 임하실 수 있으시고,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의 생명을 은혜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믿음 안에서 성령을 받아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보다 더 복된 사람들은 없습니다. 아멘.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 방법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 완전하신 인간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놀랍도록 조화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에는 이 십자가 복음, 이 십자가의 은혜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소금은 맛이 있어야 하고, 빛은 어둠을 밝혀야 하듯이, 기독교에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이 십자가에는 어떤 은혜, 어떤 복음,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고난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주신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창세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 주셔서 죄를 사해 주신다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짐승을 죽이시고 그 가죽으로 옷을 지으셔서 아담과 하와의 죄의 수치를 가려 주신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이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후 제도화된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가 예시적으로 보여주었던 죄의 속죄는, 여자의 후손으로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속해 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사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속죄 사역에 대해 이사야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에게는 고난의 길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은혜의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 구주가 되시는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참 쉼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희생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고린도 전서 1:18절 말씀을 보면,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에게 도대체 어떤 능력이 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없이는 우리에게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는 우리의 죽은 생명을 다시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는 나는 ‘오직 십자가만 붙들고 살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십자가가 예수님에게는 희생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증오이지만 우리에게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형은 가장 증오스러운 죄인들이 받는 극형이었습니다.
로마 시대 당시에 십자가형을 받았던 사람들은 살인자, 강도, 강간범, 로마에 대한 반역자 등등 온갖 포악하고 무자비한 죄를 범한 죄인들이 받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증오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유대교도였던 바울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증오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단자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선봉장으로 나섰습니다.
이런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 인생은 180도 확 바뀌게 됩니다.
전에는 복음의 대적자요. 박해자요. 핍박 자이었으나, 이제는 복음의 증인,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십자가에 대한 생각이 180도 확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십자가를 증오의 십자가로 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드러내신 사랑의 십자가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바울은 로마서 5:5-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그러면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함으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어 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증오의 상징으로 비쳐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 이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나고 있는 사랑의 십자가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저주이지만 우리에겐 축복입니다.
로마시대 십자가는 저주받고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매달아 사형시키는 형틀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지 축복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로마 시민권자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십자가에 달아 죽일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지만, 로마 시민권이 있었던 사도바울은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며 순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이,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실 때 침묵으로 외면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5:34절 말씀을 보면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부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구원을 부르짖으실 때 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대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 주시기 위해 당하고 계신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갈라디아서 3:13절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우리들에게는 축복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아담 안에서 죄와 저주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축복의 문입니다. 이 귀한 은혜를 받고 사는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다섯째,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었지만 그 실패는 결국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확인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결국 승리했다고 하면서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이들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었던 사단도 자신이 승리자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채 3일이 지나지 못하여서 그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언뜻 보기에는 패배와 같았으나 그 너머에서는 부활의 새벽 승리의 아침이 동터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성소 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려 잠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불안한 예감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안해했던 대로 ‘예수님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가 되고, 사단에게는 처참한 실패를 안겨준 것’이 되었습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길이 되어 주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을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사는 모든 은혜는 이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아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예수님에게는 고난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희생이지만 우리에겐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증오였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저주였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지신 이 십자가는 세상 속에서는 실패의 상징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승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승리를 주는 역사로 나타나서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대적이 되고 있는,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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