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시는 은혜
마가복음 7:31-35
요한 계시록 3:7절 말씀을 보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이르시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열고 닫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가복음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에바다” 즉 ‘열리라’ 라고 말씀하시자 귀먹어서 말을 못하던 사람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말씀 또한 열고 닫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말씀에서는 여기에서 좀 더 나가서, 예수님이 열어 놓으시면 그것을 닫을 사람이 없고, 예수님이 닫아놓으시면 그것을 열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 구체적인 예를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을 홍해라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홍해 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홍해 바다가 어떻게 열렸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홍해 바다를 열고 길을 내어 주실 때 열렸습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에게는 달랐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홍해 바다 길로 들어섰을 때, 하나님이 그 열어 놓으셨던 홍해 바닷길을 닫으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군대는 홍해에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현장에 가면 전차와 전차에서 빠진 바퀴와 같은 유물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능이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재능과 능력보다 더 중요하고 더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함께 해 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면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이나 조건들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이나 조건을 넘어서서 역사해 주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의 역사를 우리도 누리며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나, 이 말씀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속에,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성경은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의 역사가 언제 나타났다고 합니까?
첫째, 예수를 믿을 때 나타났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1:9-10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시는 일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전해주고 있는 의미를 알려면 세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씻는 종교의식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와서 세례를 받았고,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 받으러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 세례는 이방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 신앙으로 귀의할 때 받았습니다.
이렇게 세례는 이방 죄인들이 자기 죄를 씻고 나아오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방 죄인들은 세례를 받은 후에 유대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주로 어떤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입니까?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죄인으로 정죄되어 이스라엘 종교에서 배척받고 있었던 세리와 죄인들이 나아왔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받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세례요한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미 심판하는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그 장소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도 죄인들처럼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세례 요한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지 어떻게 당신이 내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왜 이 말을 했습니까?
세례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온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주기를 거절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죄인들처럼 세례를 받겠다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시려고 하였던 그 세례는 자신을 위해 받는 세례가 아니었습니다. 범죄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받으시는 대속적인 세례였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마치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세례요한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가지게 된 세례요한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만약 이런 깨달음이 없었더라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은,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 문을 열어주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세례로 시작되었던 속죄사역을 통해, 장차 하늘 문이 열리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그 때에는 하늘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 때 우리는 죄를 밥 먹듯이 지으며 살았고, 심지어 죄를 즐기며 살아왔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지으며 사는 죄를 정죄하면서, ‘나는 저 사람들보다 의롭다. 깨끗하다. 정직하다.’ 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살 때 우리에게는 하늘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써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가져다 준 공포와 절망감 속에서 우리 영혼이 심한 죄의 압박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 때 우리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 그 영혼을 짓눌러 오는 죄를 괴로워하며 보냈듯이, 사도바울이 은혜를 입기 전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죄에서 건져내 주랴?”라고 하며 탄식하였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영혼을 짓눌러 오는 죄의 고통 속에서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이 죄의 짓눌림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죄의 눌림이 얼마나 심했든지 일상생활이 지장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 나는 나와 같은 고통을 경험한 루터와 사도 바울과 다윗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죄가 가져다 준 고통을 시편 32:3-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이 죄의 고통에서 언제 해방되었습니까?
5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다윗은 이렇게 그 죄를 회개함으로 죄를 사함 받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죄 사함의 경험은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른 수 있습니다.
루터는 어떤 경험을 했습니까? 로마서 1: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떤 경험을 했습니까?
로마서 7: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죄 사함을 경험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죄 사함을 경험한 바울의 고백이 로마서 8: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렐루야! 이런 믿음의 고백이 은혜의 고백에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보통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 받기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달랐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후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후 나의 가장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수고와 노력을 다했습니다.
저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회개기도도 많이 하고, 때로 작정기도도 하고, 때로는 기도원을 찾아가서 금식기도도 하고, 때로는 안하던 새벽기도도 하는 등 몸부림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신앙에 열심히 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 구역장, 주일학교 교사, 청년부 성경공부 리더, 청년부 회장, 서울노회 청장년 연합회 부회장 등의 직분을 맡겨 주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회 전도사님들과 같이 활동했고, 청년들도, 성도들도 저를 장차 신학을 할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나도 어찌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영혼의 눌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성경을 보고, 더 많이 은혜를 사모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가능해 보였던 죄의 눌림에서 저는 한 순간에 해방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고 한 10년이 흐른 후에, 죄를 사함 받기 위해 행한 나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처분에 나 자신을 맡기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 후에 그간 나를 절망케 해 오던 죄의 눌림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임하였습니다. 저는 이 때 하늘 문을 열어주시고 죄를 사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런 죄 사함의 경험을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다윗도 그 죄를 인정하고, 죄를 자복하고, 죄를 숨기지 않고, 낱낱이 회개하며, 하나님의 처분에 그 자신을 맡길 때 하늘 문을 열어주시고 죄를 사해 주시는 구원을 경험 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하늘 문을 열어주십니다. 닫힌 하늘 문을 열어 주셔서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늘 문을 열어주시는 그 사건이 바로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이 구원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있어지길 바랍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우리 가족과 이웃의 삶 속에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앞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또 언제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가 임합니까?
둘째,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그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고 그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신명기 28장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살았던 사람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족장들의 복된 삶에 대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도 같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여 실망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고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온 베드로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갈릴리 바다의 고기는 수초가 많은 얕은 곳에 주로 살기 때문에 깊은 곳에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낮에는 고기가 수초 깊숙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물을 내려서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낮에 그것도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상식에 맞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베드로는 약 1년 전에 그 형제 안드레와 함께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으로 갔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났고, 권세가 있으시고 은혜로우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만남과 가르침을 받으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이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로 돌아오는 길에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는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적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자기 삶을 포기하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베드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전처럼 생계를 위해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 1년이 지난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고기 잡고 있는 그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배를 잠시 빌리겠다고 하시면서, 베드로의 배를 타고 호수 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주옥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서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1년 전에 예수님을 처음 만나 말씀을 들었던 그때를 기억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때 말씀을 들으면서 받았던 감동과 감격이 다시 그 마음에 밀려들어 오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다 전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으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것은 제 전공입니다. 낮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더구나 깊은 데는 고기가 없습니다.’ 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른 말을 했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 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하면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상식에 맞지 않았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까?
베드로는 1년 전에, 가나 혼인 잔치에서, 종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였기에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믿고 순종하는 베드로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경험들은 너무 소중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해서 받은 은혜의 경험은 너무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이익보다는 손해가 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늘 문을 여시고, 그 주시려고 예비해 두신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공히,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시고 또 하늘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철저히 말씀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신앙에서 순종하는 삶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불순종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거역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시고, 그 열린 하늘 문을 통해 내려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언제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가 임합니까?
셋째, 기도에 헌신 할 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달라고 재판장을 찾아가서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호소를 들은 재판장이 생각해보니 이 과부는 가난한 사람이라 그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어봤자 자신에게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했던 이 재판장은 못들은 척 무시하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날마다 재판장이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재판장이 무엇이라고 하면서 이 과부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줍니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이 말씀을 하고 난 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도 없고, 또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였던 이 불의한 재판장도, 과부의 끈질긴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귀찮아서라도 해결해 주지 않았느냐? “하물며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밤 낮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를 외면하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그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이다.”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셔서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에 헌신하는 삶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전에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잘 살지 못할 때 성도들의 기도는 살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정도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약화된 것이 바로 기도생활입니다. 오늘날은 기도하지 않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하늘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신 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에스겔서에 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에스겔이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서 29: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70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면 고국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깨달음을 가진 에스겔에게 한 가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스겔서 36:37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70년 바벨론 포로생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 하셨어도, 그 일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의 말씀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대로 이루어주기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시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서 원망하고 불평하였던 사람들에게는 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약속에 땅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구한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 두 사람만 그 믿고 기도한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분이십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확실해도, 그것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만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에 헌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기도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기도한대로 은혜를 베푸시고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과 교회를 들어 쓰십니까?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우리 교회에 맡긴 사명이라는 것을 믿고, 기도하는 개인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서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요청하였습니다.
골로새서 4:3절입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바울은 왜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런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를 듣고,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시고, 전도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주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잘 전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골로새 교인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또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언제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가 임합니까?
넷째, 믿음의 사람들이 죽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의 역사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동안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때에도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사도행전 7:56절을 보면 돌에 맞아 순교하던 스데반에게 하늘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실 것을 보노라” 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죽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질병으로 죽는 사람, 자살로 죽는 사람, 박해를 당해 순교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죽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죽음을 죽든지 성도들이 죽는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존귀하게 보시고 또 하늘 문을 여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 땅에 살아 있을 때에는 복음으로 사망의 문을 열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런 스데반이 순교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하늘나라로 그를 영접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죽는 죽음을 세상 사람들은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가가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은 세상과는 전혀 다른 평가를 하십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어진 생애를 다 살고 죽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은 다른 기도는 많이 해도 예수님이 빨리 오시기를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박해를 받아 죽을 그때는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던 성도들은 ‘마라나타’ 즉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며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장차 종말의 날이 임박하게 되면 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종말의 날은 극한 환난의 날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죽음과 마주서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의 시대를 끝내 주실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전에 신앙이 없을 때 우리의 답답함이 무엇이었습니까?
단 한치 앞의 삶도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에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시작과 과정과 끝을 이미 다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고, 이 세상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미리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까지도, 우리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죽음을 존귀하게 보시고, 그 성도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하늘 문을 열고 영접해 주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는 우리가 가진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잘되고 복 받고 사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복은 일시적인 복이고, 순간적인 복이고, 아주 작은 복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받게 될 참 복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며 살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받게 될 영원한 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고난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것까지 기쁘게 감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시 잠깐 고난 받고 나면 영원한 복이 우리 앞에 예비 되어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하여 이 땅에 속한 것을 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보물을 좀과 동록이 해하는 이 땅에 쌓아두지 말고 좀과 도둑과 동록이 전혀 해 할 수 없는 하늘나라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죽을 때, 하늘 문을 여시고 영접해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참 소망입니다. 이 소망으로 충만한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 문을 열어서 주시는 은혜는 도대체 어떤 은혜입니까?
말라기 3:1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주시는 은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는가 보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늘 문을 연다는 이 말씀은 ‘아주 급작스러운 풍요가 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런 복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창세기 6장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어떻게 온다고 생각합니까?
봄에 씨를 뿌리면 뜨거운 여름을 지나 가을에 추수를 하게 되는데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농부가 소를 키우면 1년에 한 번 그 새끼를 낳는 부요로 오기도 합니다. 어부가 바다에 나가 그물을 드리우고 고기를 잡을 때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는 부요로 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부어주시는 은혜는 이것과 다릅니다.
평상시에는 하늘에서 비가와도 그 비는 땅을 적시고 강을 채워서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물이 쏟아지게 하셨을 때 그 물의 쏟아짐은 전혀 차원이 다른 쏟아짐이었습니다. 창세기 7:11-12절입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이 때 하늘 창문이 열려 물이 땅으로 쏟아지는 모습은 마치 양동이로 물을 쏟아 붓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어떤 복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복을 요즘 말로 하면 마치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습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한 순간에 풍요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복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언제나 이렇게 임합니다.
우리는 한 순간에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않았습니까? 세상 죄 가운데 죽어 있던 우리가 한 순간에 하늘 소망을 가진 하늘 백성이 되게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한 순간에 내 안에서 나를 주도하고 있었던 마귀는 떠나가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성전 삼고 거하시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 순간에 존재가 변하고 사람이 바뀌고 삶이 새롭게 되지 않았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말씀에 보니 예수님께서 열어주시는 은혜가 임하자, 한 순간에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이 온전해 졌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열어주시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도 한 순간에 막혀 있던 생활의 문제가 열리고, 건강의 문제가 열리고, 막히고 꼬여 있던 인간관계의 문제가 열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부어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와 복을, 우리 모두 누리며 살아가는, 금년 하반기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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