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
요 21:11-18
교회가 지키는 중심적인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입니다.
이 두 절기는 예수님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성탄절은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이며, 부활절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을 고난 주간으로 보내고 오늘 부활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난 주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우리가 의식이 있는 성도라면 고난 주간에 두 가지를 생각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하나는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입니다. 또 하나는 죄가 가지고 들어온 고난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 삶들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고난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난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매일 수십만 명의 확진 자가 발생하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으로, 사고로, 질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불변하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사람들이 당하며 사는 그 모든 고난들이 부활의 소망으로 열매 맺게 되는 날이 올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부활을 통해 첫째, 죄와 사망을 정복하신 주님, 생명의 주되심을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둘째,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장차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을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예수님의 출생기념일인 성탄절도 중요하게 지키지만, 이 부활절을 더 큰 절기로 지키며 기쁨으로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 바로 승천하시지 않으시고 지상에 40일을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금년 부활절에는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살펴볼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이 세상에 더 계셨던 이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이 땅에 더 계신 이유는 제자들 때문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가롯 유다와 함께 온 군병들이 예수님을 붙잡자, ‘주와 함께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라고 장담하였던 베드로는 칼을 빼들고 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혼자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도망을 가게 됩니다. 베드로가 도망을 가자 다른 제자들도 모두 다 베드로를 따라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배신은 이미 성경에 예고되어 있는 배신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메시아가 당할 일을 예언을 하면서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사53:3)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을 배반한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배반하여 왔습니다.
이 배신의 역사는 예수님의 공생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며 종려주일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던 백성들도 불과 몇일 후에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하며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시면서 3년 반 동안 양육해 온 그 제자들까지 위기의 순간이 오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네 번씩이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제자들이 보고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 눈으로 보면서도 의심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 40일 동안 이 땅에 더 계시면서, 그렇게 배반을 잘하고 그렇게 잘 믿지 못하던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가셔서 그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가르침과 믿음의 체험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세상에 더 계신 이유는 당시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배반한 것 때문에 그 마음에 되돌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자의 증거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에 있는 이런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려고 하면 먼저 그 마음 안에 있는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곧 바로 하늘나라로 돌아가시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하였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자책감으로 그 마음은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마음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기 위해서, 40일 동안 이 땅에 더 계시면서 제자들을 만나 주시고 그 마음에 입은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살펴볼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만나주신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만나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만나 주신 사람 중에는, 졸지에 예수님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한 목숨 살아보겠다고 예수님을 버리고 배반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믿음을 일깨워주시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찾아가 만나주신 사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6:9절입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쫒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막달라 마리아는 정말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 받게 된 비참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서 일곱 귀신에게서 해방된 것을 감사하면서, 이후 예수님의 전도 대를 따라다니며 지극 정성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을 섬겼든지 악의적인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내연의 여인이라느니,’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은밀히 결혼을 했다느니’ 라고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오늘날 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것보다 더 슬픈 일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한 밤을 뜬 눈으로 꼬박새우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의 문은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체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안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슬프게 우는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런 마리아를 그냥 두고 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 아버지를 뵙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를 먼저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20:17)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남다르게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그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에 응답해 주셔서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만나주셨습니다. 아멘. 우리에게도 이런 남다른 사모함이 있었으면 합니다.
두 번째는 여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먼저 만나 준 사람은 제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섬겼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 택하신 12제자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겼던 이 여인들을 먼저 만나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이 여성들에게는 제자들에게 없었던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틀을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예수님을 따라 갔던 사람 중에 남자는 예수님과 사촌지간이었던 요한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는 다 자기 살겠다고 도망을 가서 숨어 있었습니다.
이 위기의 때에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던 사람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 중에는 가까이서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따라갔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25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마가복음 15:40절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으니”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모하는 영혼에 만족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면서 사랑하고 사모했던 여인들을 먼저 만나주시고 위로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을 보아도 같습니다.
늘 설교를 해야 하는 목사님들보다 그 배후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에 헌신하는 사모님들이 더 큰 은혜를 체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사는 비결,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은혜를 받으며 살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남다른 은혜를 경험하고 싶은 성도들은, 그 누구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고 싶은 성도들은, 성경 속에 나오는 여인들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하고 사모하는 크기만큼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모하는 마음 그릇의 크기’에 따라 부어주시는 은혜가 다르십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는 만나주셨습니다. (눅24:34,고전15:5).
고린도전서 15:5절입니다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베드로는 사실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이런 베드로는 수제자는커녕 12제자로서 자격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가 어떻게 그 믿음과 지도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베드로는 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통곡하며 회개’하였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날 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네가 닭 울기 전에 3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서 통곡하며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찢으며 회개한 이 베드로를 세 번째로 나타나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밤 베드로만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제자가 다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51: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상한 마음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사람을 귀히 보시고, 만나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의 일을 수종 들며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될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는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신도입니다.
이들은 그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슬픔과 절망에 빠져 낙담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만나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들이 믿음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처럼 세상에 묻혀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히 그들이 가고 있는 길까지 찾아가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영혼도 잃지 않으시려고 찾아가시는 참 목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 회복시켜 주셨습니까? 누가복음 24:32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님은 슬픔에 싸인 채 힘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십자가는 이미 구약성경에 예고된 사건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람들 대신 죽으셔야만 죄인된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하신 성경 말씀을 풀어 자세히 설명해 주심으로,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때 이 두 제자는 냉랭하게 식어졌던 그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믿음을 다시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멘.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목회자인 저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이런 은혜의 역사를 늘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은혜를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 다시 우리들의 마음을 뜨겁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섯 번째는 10명의 제자를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 저녁 10명의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을 두려워하며 한 집에 모여 있습니다. 그 당시 분위기에 대해 요한복음 20:19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당시 제자들은 이미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다른 여자들을 통해, 베드로를 통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통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증언들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까봐 두려워하여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은 믿음도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의리도 없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찾아가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이들의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복된 말씀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 자격도 없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너무나 황송한 말씀 너무나 감사한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들이 다 이런 말씀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너무나 황송한 말씀 감사한 말씀들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애독하고 사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주신 은혜의 말씀들이 성경에 가득 주어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 말씀을 애독함으로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들을 누구보다 더 많이 받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여섯 번째는 도마를 만나주셨습니다.
도마는 10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요20:26).
그래서 다른 제자들에게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 모두가 만나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마는 이 말을 들으면서 제자들이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 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 20:25)라고 하였습니다. 도마가 여기서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한 이 말은 나는 너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 라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해도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라는 불신앙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예수님이 이런 도마를 찾아가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못 박히셨던 손과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도마로 하여금 만져 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라도 도마의 불신앙을 깨뜨려 주시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도마로 하여금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해 주시려고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이 세상에 더 계셨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께서는 왜 아직까지 재림하시지 않고 계십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해 재림하지 않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다 구원 받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해 재림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전도인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나가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일곱 번째는 갈릴리 바다에서 다시 고기를 잡고 있던 일곱 제자를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 이렇게 여러 번 제자들을 만나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어부 출신인 베드로와 여섯 명의 제자는 다시 전처럼 고기를 잡으면서 살아가려고 갈릴리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예수님은 자신들이 원하고 따랐던 그런 왕이 되실 분은 아니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가들도 그 메시야의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기대를 하며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도 이 세상에 세우실 메시야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만 주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을 따라다닐 이유도 목적도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을 때 얻게 될 그 무엇을 바라고 믿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을 때 받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이 세상 속에서는 고난과 수고와 희생까지 각오하고 믿고 있습니까?
이 믿음의 자세가 이후 우리의 신앙과 삶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가 영광 받는 길, 평탄하고 그 길이 넓어서 가기 편하고 쉬운 길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그 길이 험하고 좁아서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제까지 예수님을 따르면서 가고자 했던 길은 넓은 길이었습니다.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고 있는 길 앞에 십자가라는 고난이 오고 시험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고 뒤돌아섰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물으신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대표자였던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를 사랑하기는 하느냐’ 라고 3번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 자기 영광을 추구하며 따랐던 베드로의 마음을,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고난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예수님이 사랑하여 죽어주신 그 양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마음으로 고쳐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일은 베드로에게만 하신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를 통해서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아멘.
사실 제자들의 배반은 마가복음 14:27-28절에서 미리 예고하신 바 있으십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 말씀은 ‘내가 잡혀서 십자가에 죽으면 너희는 모두 다 나를 버리고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도망가게 될 그 갈릴리에 내가 먼저 가서 거기서 너희를 만나주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나를 실망시키고, 나를 배반하고, 내게 등을 돌리겠지만, 나는 그런 너희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찾아가서 마음을 돌이키게 하여 다시 사용하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신 사건은 바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벌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아 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래 참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덟 번째는 500여명의 형제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6절입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오백 여 형제라는 말은 당시 예수님을 믿었던 모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특별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하고, 유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 양과 같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은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우리는 당시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이었던 500여 형제를 동시에 만나주신 사건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약한 자 소외된 자에게 더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도 동일하게 믿음이 부족한 사람, 별로 자랑할 것이 없는 못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해 준 일을 예수님에게 한 것으로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약한 자를 베려하시는 예수님의 이 세심한 배려 속에 나타나고 있는 따뜻한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어떤 처지에 처해있든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홉 번째는 야고보를 만나주셨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이고 동생이었습니다.(고전15:7).
야고보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야고보는 장차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를 만나 주심으로 12제자가 아닌 야고보의 사도적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열 번째는 다시 열 한 제자를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마지막으로 11제자들을 만나주시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렇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 주시는 일을 해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을 찾아가시고 만나주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 성령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일을 계속해 오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도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만나주신 예수님은 우리를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 가족을 우리 이웃을 만나주시는 일을 해 가고 계십니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이며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아멘.
세 번째 살펴볼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주신 목적입니다.
첫 번째 목적은, 그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이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찾아가 만나주셨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두 제자에게는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여!”(눅24:25)라고 하시면서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도마에게는 “네 손 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라고 하시면서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증인의 사명 곧 전도의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던 일을 이제 그 제자들이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라고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라는 하심으로 증인의 사명과 선교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대신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목적은, 목양의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요21:15-17)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나라로 돌아가시면서 그 남겨 둔 제자들에게 목양의 사역을 위탁하셨습니다. 목양을 하되 예수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명이고 우리 교회가 받은 사명입니다. 아멘.
네 번째 목적은, 믿음으로 순교하는 순교자의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증인’이라는 말과 ‘순교’라는 말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순교자가 되라’는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21:19절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순교자로서 로마에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도마도 순교자로서 인도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 되었고, 다른 제자들도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곳곳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에는 전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이상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도 장차 부활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까?
우리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그렇게 열심히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까?
오늘날 성령께서는 왜 그렇게 열심히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것입니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바로 서게 하는 것, 우리가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는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을 위해서 지금도 계속 우리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번 부활주일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믿음을 회복해 나가는 기회로 삼아나갑시다. 그래서 우리 믿음이 회복되고, 가치관이 회복되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고, 복음을 위한 헌신과 각오가 새로워지는 복된 2022년 부활 주일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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