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언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4. 10. 16:51

하나님의 사랑

호세아서 3:1-5

 

오늘은 교회 절기로 종려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이 고난 주간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고 우리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말은, 기독교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사랑 자체이실 뿐 아니라,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말로 기독교 신앙이 다 이해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의 종류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종교라는 말 하나로 기독교신앙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몇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는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은 두 가지 사랑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세 가지 사랑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네 가지, 여섯 가지, 아홉 가지, 열두 가지 사랑이 있다고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십 가지, 사십 가지 사랑이 있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할 때 그 사랑은 이 많은 사랑 중에 어떤 사랑을 말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성경에는 네 가지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일방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오는 사랑' 이라든지 혹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등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다른 말로는 '베푸는 사랑'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사랑은 '필리아' 사랑입니다. 필리아는 아가페와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신 부모에 대한 자녀의 사랑' '나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신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 , 나에게 이익을 준 대상을 사랑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유아적 자아'가 행하게 되는 사랑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사랑은 '스톨케' 사랑입니다. 스톨케는 '건전한 교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자면 '친구들 간의 우정' 혹은 '형제애' 혹은 '동료 간의 의리' 등등이 여기에 해당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에로스' 사랑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그 단어로도 알 수 있듯이 남 여 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에로스 사랑은 남녀의 육체적인 접촉이라는 통속적인 사랑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아가페입니다. 여러분은 아가페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또 이 사랑을 어떻게 경험해 오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호세아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호세아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첫째, 기대를 포기하고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호세아서 3: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이 말씀을 보면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어떤 아픔이 있었습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음란한 여자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고멜은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은 후에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서 호세아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남자에게서 버림을 받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1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서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간 아내, 그 따라간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고멜을 찾아가서 그 불행한 삶에서 건져내 주고 다시 사랑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일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자신과 자녀와 가정을 버리고 가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불행에서 구해내 주고 다시 사랑해 주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에 근거하여 이 요구를 하고 계십니까?

1절의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며 그 신에게 바쳐 친 건포도 과자를 즐기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 준 것 같이, 너도 범죄한 고멜을 다시 사랑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사랑은 거의 무조건적인 사랑’, ‘아무 기대도 하지 않으시고 하신 사랑’, 받을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고 해 주신 일방적인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 죄의 종으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선한 것이나, 의로운 것이나, 신실한 것 등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가 그 자녀를 사랑할 때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사랑해 주듯이, 그렇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 백성 삼아주신 이스라엘을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우리는 기대를 포기하고 하신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요구하신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3절입니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남편이 아내에게 요구할 수 있는 그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음녀가 되어 불행 속에 빠져 있는 그 아내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대를 포기하고 하신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사랑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그만 기대라고 가지고 계셨더라면 하나님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를 포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듭되는 불신앙과 범죄 속에도 계속 사랑해 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사도바울이 남편들에게 요구하였던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도요한이 성도들에게 요구하였던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러면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이 성도들과 남편들에게 왜 이 사랑을 요구하였습니까?

우리 속담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가지는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한 실망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커진 실망감은 섭섭한 마음을 가져다주고, 그 섭섭함은 마음에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는 우리의 사랑하려는 마음을 막아 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계속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기대를 버리고 기대를 포기하고 하는 사랑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남편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기대까지 포기하고 또 다시 고멜을 사랑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해 주는 이 사랑 이외의 그 어떤 사랑이 언제나 사랑하게 해 주고,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가정으로 치면 부모로서,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가지게 되는 기대가 있고, 교회로 치면 목회자로서 성도로서의 기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기대들이 다 채워지고 있습니까?

아마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대가 다 채워지지 않는데도 어떻게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대를 포기하고 해야 하는 이 사랑은 아픈 사랑이며 슬픈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아픔이 치유되지 못하면 그 아픔은 때로 우리 마음에 심한 상처를 주고, 때로는 마음에 병이 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랑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아픔은 어떻게 치유되는 것입니까?

나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 마음의 아픔은 치유됩니다. 나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때 이 아픔은 치유됩니다.

 

1절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어떻게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고 그 아내를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고 합니까? 호세아는 기대를 포기하고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범죄한 그 아내 고멜을 다시 사랑해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믿음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기대를 포기하고 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본성과 어긋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여 결혼까지 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실망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헤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결혼한 것을 후회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여자 집사님의 경험

 

어떤 여자 집사님이 신앙이 없는 남편과 결혼하고 함께 30-4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삶의 고난과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 여자 집사님이 제게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남편에게 할 만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남편이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남편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남편만 바뀌면 우리가정은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남편이 변하지 않고 있어서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기의 신성을 부인하고,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우리들이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고 기대를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이 집사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집사님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남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남편을 사랑하려고 하니 그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를 부인하고 기대를 포기하고 하는 사랑 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멘.

 

에베소 교회의 경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이 칭찬을 많이 했던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남달랐던 교회입니다. 주를 위해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교회이고,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사람들을 시험하여 그 정체를 드러낸 교회였습니다. 또 초대교회 이단이었던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던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장점이 많았던 이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에베소교회의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처음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처음 사랑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시되 기대를 포기하고 일방 적으로 사랑해 주신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아담 안에서 죄인 되었던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놀라워서, 나의 지식, 나의 건강, 나의 삶, 아니 나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고백하며 믿음생활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에베소 교회도 그랬습니다.

에베소교회는 하나님이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해 주신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을 받은 후에, 자신들도 기대를 포기하고 에베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했던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가 나중에는 그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사람들을 시험하여 그 정체를 드러내고, 니골라 당이라는 이단을 대적하는 삶을 살다가 보니, 이런 사람들은 사랑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에베소 교회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니골라 당의 악한 행위는 미워하셨지만 니골라 당에 빠진 사람들은 기대를 포기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다가 보니 니골라 당에 빠진 사람들까지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에베소 교회를 향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에 빠진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기대를 포기하고 하신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에베소교회를 향해 하나님촛대를 옮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촛대가 무엇입니까? 촛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옮기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음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기대를 포기하고 하는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지만, 만약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사람들과 사랑하지 않을 사람들을 구별하며 산다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기대를 버리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따라 우리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기대를 버리고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리에게 무슨 기대하실 것이 있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목회자로 세워 주심도 제게 무슨 기대할 것이 있으셔서 세워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믿음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또 때때로 말씀해 주시고, 성령이 주시는 은혜와 감동 안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난 척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있다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우쭐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직분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고 더 큰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나서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은사를 주실 때 무슨 특별한 기대를 하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잘 난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그 모든 것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부자가 되었어도 겸손할 수 있고, 남다른 능력과 은사가 주어져도 겸손할 수 있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는 삶을 살면서도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교만합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거만하게 건방을 떨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늘 겸손한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둘째, 사랑할 것만 생각하시는 사랑입니다.

 

호세아 3:4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이 말씀을 보면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이방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 살게 될 삶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큰 슬픔이 무엇입니까?

그 가진 믿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며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꼭 북한에 남아 있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성도들은 우리와 같이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이방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아픔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저는 기회가 주어져서 북한에서 온 사람에게 북한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믿음을 표현하며 살 수 없는 북한교회 성도들이 남한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자유롭게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북한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북한 교회 성도들이 남한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부끄러워졌는지 모릅니다.

그 때 제 마음은 이러했습니다. 마치 많은 재산을 가진 나는 전혀 선을 행하며 살고 있지 않은데, 이웃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 늘 선을 행하며 산다는 말을 듣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부끄러운 마음에 들었던 생각, 어쩌면 극한 고난 중에 살고 있는 북한교회가 웅장한 건물을 자랑하고 있는 남한 교회보다 더 믿음이 큰 교회, 더 믿음이 부유한 교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환난과 궁핍 중에 있었던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실상은 네가 부유한 자라고 하셨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교회였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가난하고 곤고한 교회라고 하신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참 모습이 아닐 때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오직 사랑하실 것만 생각하시는 그런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이 이런 사랑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다가 이방 땅에 끌려가서 마치 이방인들처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실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사랑하는 것 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모르시는 분처럼 그렇게 이방 땅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 줄 때 내가 사랑해 준만큼 나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받을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랑하실 것만 생각하시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에 비겨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줄 부모가 없듯이,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구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해 주신 일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하고 있는 사랑을 보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전에 방송을 보니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노숙생활에 타성이 젖어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는 어쩔 수 없어서 노숙생활을 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내가 도움을 주어야 할 노숙자와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될 노숙자를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구분은 노숙자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병 고침을 받으려 나오는 사람들에게 너는 재산도 많고, 권세도 있으니, 의사를 찾아가 고치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한결 같은 사랑으로 대해 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삶을 사셨습니까?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은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시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지 구분하시지 않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예수님과 같이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살아야합니다.

다른 것은 다 하나님께 맡기고, 상대방의 양심에 맡기고, 우리는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언제나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멘.

 

에베소 교회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에베소 교회는 교회의 거룩 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구분하다가 보니, 예수 믿고 가졌던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구분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사랑해 줄 것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볼 때 아내를 볼 때 내가 사랑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볼 때, 부모님을 볼 때, 성도들을 볼 때,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내가 사랑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언제나 우리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어떻게 성도들과 자기들의 물건을 통용하고 그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까? 만약 자기 육신의 가족을 생각하고 자기의 안락한 미래를 생각하였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성도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창조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인류는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한 가족이라는 이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속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육신에 속하여서 자기 육신의 혈육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성령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안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구원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한 가족이 된 성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며 살되 하나님을 따라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셋째, 회복에 그 목적을 두고 계신 사랑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첫째, 기대를 포기하고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둘째,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사랑으로 사랑해 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깨어진 관계의 회복에 그 목적을 두고 그렇게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은 사랑으로 인류를 사랑해 오신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 주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입니다. 5절을 보면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될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결말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미음은 다툼을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켜도’ ‘사랑에는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아주 아름다운 노래가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로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랑 안에는 깨어진 관계를 하나로 회복시켜 주는 마력이 있습니다.

사랑은 깨어진 부자 관계를 회복해 주고, 깨어진 부부관계를 회복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이 회복 안에서 우리는 천국의 모습을 미리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랑의 회복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며 살게 되는 가장 큰 복은 물질적인 복이 아닙니다.

명예도 아닙니다. 권세도 아닙니다. 또 우리가 누리면 사는 영광도 아니고, 장수도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며 살아가는 가장 큰 복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복, 화평을 누리며 사는 복입니다. 아멘.

 

고린도후서 5:17-18절에서는 믿음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이 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저는 우리가 누리고 사는 복 중에 이보다 더 큰 복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의 복을 누리며 사는 우리들에게 화목의 직분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함 속에서 누리며 살게 되는 평화, 기쁨, 만족보다 더 큰 은혜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큰 은혜와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해 주셨고, 사랑할 것만 생각하면서 사랑해 주셨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의 회복에 그 목적을 두고한결 같으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오늘도 주께서 주신 화목의 직분을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된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믿음 생활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첫째, 기대를 포기하고 사랑하신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둘째, 오직 사랑할 것만 생각하고 사랑하신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셋째,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그 목적으로 하신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와 우리교회는 이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사랑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될 뿐 아니라, 아직도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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