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정한 다니엘
다니엘서 1장 8-9
여러분 중에는 한 번이라도 미국을 다녀오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큰 나라입니다. 이 미국의 켈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 가면 새들백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세운 릭 워렌 목사님은 누구를 만나든지 제일 먼저 이렇게 질문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당신의 교회를 움직이고 있습니까? 교회전통입니까? 재정입니까? 프로그램입니까? 카리스마적인 인물입니까? 아니면 잘 건축된 건물입니까? 사실 이런 것들만 잘 갖추어 놓아도 이것이 강력한 힘이 되어서 교인들을 모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노원구에도 제법 큰 교회인 노원 순복음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그 규모가 힘이 되어서, 차량으로 교회 주변을 넘어서서 당 고개 있는 사람들도 끌어들이고, 의정부에 있는 사람들도 끌어들입니다. 교회 규모가 작은 교회들에게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에 나옵니까?
일단은 한 번은 교회에 나와 봐야 결단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작은 교회는 사람들이 한 번 교회에 나와 보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규모가 작은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릭 워렌 목사님은 단순히 큰 교회를 이루고 싶다면 앞에서 말한 조건들을 잘 갖추어 놓으라고 합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경제논리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슈퍼를 해도 규모가 큰 슈퍼와 작은 슈퍼가 같이 있다면 어느 슈퍼가 경쟁력이 있겠습니까? 물론 큰 슈퍼가 경쟁력이 있습니다. 큰 슈퍼에는 물건이 많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찾으니 작은 슈퍼보다 좀 싸게 팔아도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 그 규모가 힘이 되어서 경쟁력을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이런 경제 원리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의도에 있는 본 성전 이외에 각 지역마다 지 성전을 많이 세웠습니다. 이렇게 지 성전을 세우는 것이 성경적이냐 성경적이지 않느냐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지 성전을 세우는 것을 보면 언제나 그 지역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세웁니다. 신개발 지역이면 장래발전 가능성이 있는 자리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규모도 그 지역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지 성전을 세웁니다. 그래서 경쟁력 있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순복음 교회는 지 성전들은 철저한 경제 원리에 기초하여 세워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큰 교회가 목적이 아니고 건강한 교회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 추구하는 어떤 목적이 교회를 이끌어 가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만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과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삶이 다릅니다.
우리는 ‘나는 왜 사는가?’라는 삶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라는 신앙에 대한 분명한 목적도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건강한 인생,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니엘서 1장에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서 1:8절 말씀을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그 삶의 목적을 정하고 살았다.‘ 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뜻을 정하고 목적을 정하고 믿음으로 살았더니,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정한 뜻과 목적대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떤 뜻을 정하고, 어떤 목적을 정하고 살았습니까?
첫째,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다고 뜻을 정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족의 일원이었던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불의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친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망국의 한을 품고 이스라엘 왕 여호야 김과 함께 전쟁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전쟁 포로의 생활은 건강한 청년이었던 다니엘에게도 쉽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동족들이 이유 없이 살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수많은 동족들이 힘든 포로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친히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니엘은 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 자기 조상들과 부모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신 율법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하고 죄를 지으며 살다가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망하고 왕과 자신과 백성들은 전쟁 포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인식 속에서 다니엘은 뜻을 정하게 됩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구별된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살겠다는 뜻을 정하게 됩니다.
다니엘이 이럴게 뜻을 정한 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감사 속에서 믿음의 선한 결단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삶에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신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떤 은혜의 경험을 하였습니까?
다니엘은 이스라엘과 바벨론이 전쟁을 할 때 청년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청년의 신앙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졌고, 다니엘은 전쟁의 포로가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 이스라엘의 왕과 이스라엘 귀족들의 자녀들이 볼모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전쟁포로의 삶은 비참합니다.
전쟁포로가 되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다니엘 시대는 더했습니다. 그 당시 전쟁포로는 비록 살아있으나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기록을 보면 당시 전쟁 포로들은 포승줄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포승줄에 묶여서 끌려가는 포로들은 걸어가는 속도가 늦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포로들을 오랜 시간 동안 먹이면서 바벨론까지 끌고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가서 노동력으로 쓸만한 사람은 남기고 그 나머지는 중도에서 죽이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포로 중에는 나이 많아 늙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예레미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바벨론과 전쟁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바벨론과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다.’라고 예언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이것을 알고 있었던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는 죽이지 말고 놓아 주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이 예레미야는 살아서 애굽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다니엘은 이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 종 선지자 예레미야를 어떻게 살려주시는지를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어떻게든지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죽지 않도록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죽지 않고 바벨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 확장된 제국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 전쟁포로 중에서 지혜로운 몇 사람을 뽑아서 교육을 시킨 후 관리로 등용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여기에 지원을 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선발되었습니다. 1:3-5절입니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여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함이었더라.” 이렇게 다니엘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입으며 살았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뜻을 정하고 결단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10이라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10이라는 감격과 감사를 가지고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100이라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100이라는 감격과 감사를 가지고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랍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은 생애를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뜻을 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평생 갚아도 못 갚을 빚이라고 생각하고 그 진 빚을 갚아나간다는 심정으로 누구보다 더 수고하고 누구보다 더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만큼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해야 될 일은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헌신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대우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깨달았던 다니엘은 오직 그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겠다고 뜻을 정하고 살았더니, 하나님께서도 이런 다니엘을 높여 주셔서 바벨론의 총리가 되게 해 주시고, 때로는 권능의 손을 펴서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서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우해 주십니다. 우리에게도 먼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사도바울과 다니엘과 같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고, 받은 은혜의 빚을 갚아나가겠다는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이런 사람들의 삶 속에 오늘날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또 다니엘은 어떤 뜻을 정하고, 어떤 목적을 정하고 살았습니까?
둘째, 다니엘은 왕의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예비 관리후보로 뽑힌 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왕이 차세대 인재들을 위해서 자기가 먹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했기 때문입니다. 5절입니다.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함이었더라.”
당시에는 짐승을 잡으면 먼저 신전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다니엘이 생각할 때 신전에 바쳐진 왕의 진미를 먹는다는 것은 그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 장에게 구하게 됩니다. 8절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환관 장은 다니엘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 일로 인해 왕의 문책을 받게 되면 자기 지위와 목숨이 위태해 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10일 동안 시험해 보아서, 왕의 진미를 먹는 사람들보다 우리 얼굴이 더 좋아지면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1:15절입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보인지라” 그래서 채식을 위주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우리말에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구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응답해 주시고 은혜로 역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우리가 가진 뜻과 우리가 가진 믿음에 따라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시고 독단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2022년도를 살아갈 때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고 믿음으로 도전해 나아가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어떤 때는 뜻을 정하고 믿음으로 도전했으나 실패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실패하였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믿고 다시 도전하고 인내하면서 또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도전하고 또 도전하다가 보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7전8기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여러 번 찍고 또 찍으면 넘어가지 않을 나무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인내하며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그 계획하고 목적했던 일들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니엘서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믿음으로 나아간 대로 역사해 주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10을 헌신하기로 뜻을 정하고 10을 헌신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그 10을 헌신한 만큼의 은혜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10을 헌신하고도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100을 헌신하기로 뜻을 정하고 100만큼 헌신하면 하나님은 또 그 100 만큼의 은혜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100을 헌신하고도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런 은혜의 경험은 우리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은혜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이후에는 더욱 담대한 믿음의 헌신을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내가 믿음으로 10을 헌신하면 내 삶에 10의 손해가 나고, 내가 믿음 안에서 100을 헌신하면 내 삶에 100의 손해가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믿음으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나는 단 한 번 믿음으로 10의 헌신을 했는데, 나는 단 한 번 믿음으로 100의 헌신을 했는데, 우리 하나님은 그 단한번의 헌신을 영원히 기억하시며 은혜를 주시고 보상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은혜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이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솔로몬은 일평생 단 한 번 일천(1,000)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이 드렸던 그 일천(1,000)번제를 기쁘게 받으시고 솔로몬으로 하여금 평생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만약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네 제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쫒으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더라면, 예수님은 그 청년의 일생의 삶을 책임져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에게는 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본 사람들만 아는 비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도들의 단 한 번의 헌신을 기억하시고 평생 동안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헌신을 하게 되면 헌신하기 이전과 헌신한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가지고 사는 신앙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렇게 신앙과 삶의 변화가 있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받으시고 세상 속에서 존귀한 자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새롭게 시작되는 2022년도에는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 헌신하는 삶을 보면 우리는 작은 것으로 헌신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많은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뜻을 정하고 믿음으로 헌신하여 살아가는 삶들은 별 것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별 것 아닌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또 우리의 헌신은 단회적인 헌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우물물과 같습니다. 우물물은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함이 없이 계속 솟아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역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생동안 계속 되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은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내가 가진 신앙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산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아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 중에서 십일조를 구별하여 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 십일조를 낸 만큼 손해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것이 믿음 없는 세상의 계산 방법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다릅니다.
내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로 주셨다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통해 이 물질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득 중에서 십의 일조는 물론 심지어 십의 이조, 십의 삼조까지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드리는 삶을 살지 않습니까? 그 주신 소득으로 나도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십의 이조, 집의 오조, 십의 팔조 까지 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의 양을 보시지 않습니다.
그 십일조를 드리는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의 양이 아니라 십일조, 십의 이조, 십의 삼조를 드리고 있는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을 보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일조를 양으로 계산하여 드리지 않고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말라기 3:10-12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그 때부터 사람이 변합니다. 이렇게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헌신할 기회를 찾으며 삽니다. 그러다가 헌신할 기회가 오면 기쁘게 자원하여 나서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나는 월급쟁이라서 소득이 고정되어 있는데 내가 십일조를 바친다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려고 합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오늘 우리의 말로 하면 공무원이었고 월급쟁이였습니다. 다니엘은 사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다니엘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하나님께 헌신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번민하게 하셨고 다니엘로 하여금 그 꿈을 해몽해 주도록 하셔서 높여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에는 제한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상식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뜻을 정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뜻을 정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우리 믿음에 응답해 주시고 우리 믿음대로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2022년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또 다니엘은 어떤 뜻을 정하고, 어떤 목적을 정하고 살았습니까?
셋째, 다니엘은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지 오래 된 성도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진 믿음이 더욱 자라게 하고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과는 더욱 친밀해져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친밀해 지게 하는 중요한 도구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생활보다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다니엘이 다니엘 될 수 있었던 것은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루 세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며 산 것에 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수의 방해공작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다니엘서 6:10절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의 대적들이 다니엘의 뒤를 조사해 보았으나 고소할 조건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기도하며 사는 다니엘의 기도생활을 문제 삼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왕을 위하는 척 하면서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못하도록 어인을 찍은 조서를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총리였던 다니엘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기도생활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다니엘에게 기도는 그 영혼의 호흡이었으며 영이신 하나님과의 대화였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어떤 관계 속에 이루어집니까?
가깝고 친근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니엘은 그 믿고 섬기며 사는 하나님과 하루 세 번씩 기도로 대화하며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그 만큼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 속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니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원수의 악한 의도를 이기고 물리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후에도 다니엘은 기도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니엘서 9:2절입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 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속국이 된지 70년이 지나면 다시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속성상 사람이 범죄 하면 징계하시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면 다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사사기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원의 역사에 대해 70년 전에는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을 하셨고, 지금은 다니엘로 하여금 그 말씀을 확인하고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시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복된 성도가 되려면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셔서 그 뜻을 그 계획을 알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그 뜻과 계획을 알려주십니까?
하나님의 관계가 친밀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뜻과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하실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하실 일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함 받으며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고 행하셨습니다. 심지어 아모스서 3:7절에서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왕 하나님을 믿으려면 아브라함과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비밀을 알려 주시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우리는 늘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바로 우리가 가진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큰 교회 성도들은 수많은 군중 속에 묻혀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군중 속에서 활동할 때는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비밀스런 관계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저 무리 속의 한 사람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또 사람들은 큰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신의 믿음을 보장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은 다니는 교회의 규모를 통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평가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인격체입니다. 인격체의 특징은 개별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서로서로를 잘 알게 되어가게 됩니다.
참 신앙은 인격적인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해 줍니다.
다니엘은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섬기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들도 기도생활을 결단하므로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다니엘과 같이 기도생활에 헌신함으로, 하나님과 친근하게 지내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레미야에게 다니엘에게 장래 일을 알려주셨던 것 같이, 우리들에게도 장래 일을 알려 주시는 그런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종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장래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인식하고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살 뿐 아니라, 성도들과 교회와 세상을 향해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하도록 하는 일에 쓰임 받으며 사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바로 이렇게 시대적인 사명을 받아 쓰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도 다니엘과 같이 종말 시대 속에서 쓰임 받는 성도로 살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다니엘은 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 살게 되었습니까?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첫째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기로 뜻을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삶의 결심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왕의 진미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결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삶의 결단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니엘을 특별대우 하셔서 하나님의 계획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늘 기도하며 살므로 하나님과 친근한 성도로 하나님이 그 계획들을 알려 주시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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