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언서

이사야를 만나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8. 15. 18:41

이사야를 만나주신 하나님

이사야 6:1-3

 

이스라엘의 상태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말씀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언제입니까?

이사야서 6장은 남 유다의 10대 왕 웃시야가 다스리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1절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 웃시야 왕은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였던 왕이었습니다. 역대 하 26:4-5절입니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웃시야 왕이 다스렸던 남 유다에 형통함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와 번영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에서는 타락하고 부패한 사회가 되어 갔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의 아이러니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 생각에 그러면 더 잘 믿어야 할 것 같지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던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서 그 삶이 부요해 지면, 그 뒤를 따라오는 것은 부패요 타락이요 범죄입니다.

 

사사기는 이런 신앙의 부정적인 사이클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이런 부정적인 사이클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깨어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경건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

 

오늘날 우리나라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거의 선국국의 문턱에까지 이르러 있습니다. 역사상 이렇게 잘 살았던 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큰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졌지만 윤리 도덕적으로는 그 어느 시대보다 더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타락과 경제적인 불균형과 사회의 부패는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과 사회지도층의 부패는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외곡은 매우 심각합니다.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층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공인이면서도 아주 뻔뻔스럽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국가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한 말과 행동을 많이 했으면, 대통령이 임명한 각료들이 그 임기를 채우지 않고 뛰어 나와서 야당의 대선후보로 활동하며 망가진 나라를 바로 잡겠다고 공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매일 같이 사람들이 납치 되고 또 실종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질서 있고 규모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 무질서하며 무절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시대입니다.

 

이런 사회에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타락한 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뭔가 나름대로의 부족한 점이 있고 약점들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부족과 약함을 인정하고, 서로를 사랑으로 보는 따뜻한 마음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너무 냉담하다는 것입니다. 냉담함은 타락된 사회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냉담한 사회는 결국 남아 있는 희망의 작은 불씨마저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문제 가정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문제가 있는 가정의 회복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비록 서로 서로에게 약점이 있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 서로 서로를 향해서 따뜻한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닥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서로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비난하면서 냉담함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삶의 태도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결국 곪아서 터지게 할 것입니다. 이런 가정은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가정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이웃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웃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뉴스를 보면 이웃에 사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한 달이 지나도록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주 냉담한 사회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대가 또 있었습니다.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던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피리를 불러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슬퍼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냉담했든지 그 이웃집에서 혼인 잔치를 한다고 피리를 불어도 그 기쁨을 함께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이웃이 초상을 당하여 슬퍼하며 애곡하여도 그 슬픔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에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무정하고 냉담한 사회에서 희망을 바라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국제적인 상황

 

이사야가 살았던 당시 남 유다는 신앙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으로는 부패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 어려움이 없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웃시야 왕 말년에 북쪽의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근동지방은 마치 전쟁 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게 됩니다.

조국의 장래를 염려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남 유다의 미래를 걱정하며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았습니다.

 

당시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이사야를 만나주셨겠습니까? 오늘은 먼저 이 문제를 살펴봅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 만나 주신 이사야입니다.

 

거울 뉴런을 주신 하나님

 

심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거울 뉴런이 있다고 합니다. 거울 뉴런은 다른 사람의 삶을 마치 나의 삶이나 되는 것처럼 내 마음 속에 거울처럼 반영시켜 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연속극을 볼 때, 그 영화나 연속극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실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일들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거울 뉴런은 그 사람들의 일을 마치 나의 일인 양 느끼고 생각하도록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거울 뉴런을 주셔서 상대방의 삶을 공감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사야는 예민한 거울 뉴런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같아 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사야는 선견자의 눈으로 조국의 현실과 국제정세를 바라보면서, 당시 신흥 강대국으로 등장하고 있었던 앗수르의 포악함이 장차 남 유다 백성에게 미칠지 모르는 일들을 생각하면서 깊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가졌던 이런 마음은 사실 하나님이 가지고 사신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살고 계시지만,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행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형상을 닮게 창조한 아담의 범죄를 보시면서, 그 죄가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가져다 줄 비참한 결과들을 가슴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시도록 작정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이 창세기 3: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오면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만나주신 이사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가지신 긍휼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공감할 수 있는 예민한 거울 뉴런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차 그 민족이 당할지 모르는 불행을 미리 내다보며, 마치 그 불행을 자기가 당하고 있는 불행처럼 느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사야를 만나 주시고 사명을 주셔서 그 동족에게로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만나 주시고 사명을 주어 부르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민한 거울 뉴런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마치 내 아픔처럼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서 도우심을 바라고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사야를 만나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 줄 시대적인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님이 주신 예민한 거울 뉴런을 통해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또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나 주시고 사명을 주신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거울 뉴런이 고장 난 사람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 마음이 고장 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악하고 타락한 시대일수록 하나님이 주신 거울 뉴런이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정한 시대가 되고, 무감각 한 시대가 되고, 무자비한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감정은 헤아리지 않고 애정이 없는 말을 하고 배려함이 없는 행동을 할 때가 아닙니까?

 

사람이 모여서 이룬 가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야 건강한 가정이 되고, 자녀들이 건강한 인격자로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과 배려가 없는 가정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가정에서는 형제간에도 서로 편을 가르고, 서로를 배척하고, 소외시키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런 가정보다 더 불행한 가정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뉴스 중에는 이런 뉴스도 있습니다.

아직 철없는 어린 사람들이 부모가 되어서, 자기의 어린 자녀를 혼자 집에 놓아두고, 그 부부는 밤낮 오락실에서 게임을 즐기다가 자녀를 굶어 죽게 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바로 지난주에는 20대의 엄마가 그 애인과 23일 여행을 즐기기 위하여, 3살 난 어린 아기를 혼자 집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기는 금년의 그 무더운 여름 날씨에 몇 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밤새 울다가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거울 뉴런이 마비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이 거울 뉴런입니다. 우리는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며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면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들과는 함께 기뻐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사람의 감정을 헤아려 줄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회복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만나 주십니다.

이렇게 마음이 회복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불러서 쓰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예민한 거울 뉴런을 회복하여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성도들이 되고, 가정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에게도 이런 마음의 회복이 있어서, 종말 시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교회가 되고 민족을 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가진 사랑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반드시 우리 마음을 주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주게 되면 결국에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귀한 것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주게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커지고 또 커지게 되면 결국에는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나 자신까지라도 내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역사입니다.

 

이런 사랑의 역사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사랑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주시고, 부르시고, 사명을 주어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입니다.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였던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앗수르의 등장으로 남 유다는 그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사야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사야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스랍들은 그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신 양심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 양심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도덕적인 기능을 하는 양심을 사람들 속에 창조해 주실 정도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 아니시라면, 피조물인 사람들을 양심을 가진 도덕적인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율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율법을 볼 때, 그 율법을 제정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셋째,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와 무관한 삶을 사신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 백성들에게 소개할 때 거룩하고 의로우신 자(3:14) 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이 증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예수님의 삶에 반영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넷째,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인 도덕법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또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고 드러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주는 의미

 

그러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사야서를 보면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랍들이 부른 찬양의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죄악 됨과 대조되는 신적 본질입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은 죄악된 인간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불가해한 신비입니다. 스랍들이 세 번을 반복적으로 거룩하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임을 강조해 주는 강조적인 표현법입니다.(7:4,21:27)

 

거룩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자르다’ ‘분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은 분리된 상태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분리된 상태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본질상 분리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엄위와 위엄 가운데 모든 피조물들과 분리되어 홀로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위엄적 거룩 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분리 되시고, 죄와는 전혀 무관하시며, 죄와는 전혀 교제하지도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10, 1:13) 우리는 이것을 윤리적 거룩이라고 합니다. 이 윤리적 거룩은 하나님이 지니신 본래적 거룩에서 파생된 의미의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울 앞에 비추어 봐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바른 모습을 알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추악한 존재인지, 나약한 존재인지, 더러운 존재인지를 똑똑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을 알게 된 사람들이 될 때 오만하고 독선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동일한 죄인으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처지를 해아려 주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비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들이 갖게 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희망을 사라지게 합니다. 죄에 대한 진노의 두려움 속에서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를 위해서 우리는 거룩하시면서 또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죄의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이 때 우리는 죄인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됩니다. 아멘.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비로써 희망을 갖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아무 사람이나 다 사랑해 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서 사랑을 입고 살아가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거룩함은 우리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칭해 주실 때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습니다.’ 아멘.

 

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이 세상사랑은 거룩함이 없이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함이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함이 함께 하는 사랑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역사했던 현장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성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섬기며 삽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의 다른 점입니다.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하나님을 피하고 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게 섬기며 예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크기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을 따라 거룩해 지려고 하고, 성결해 지려고 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가려고 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런 우리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서 죄와 악을 물리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도록 하십니다.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거룩하심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은 백성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 안에서는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거룩한 백성들이 될 뿐 아니라, 그 삶 속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백성답게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신앙 안에서 생활 속에서 회개하고 돌이켰으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불행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앗수르를 들어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그래도 회개하지 않자 나중에는 바벨론을 들어서 심판하셨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이 언제 회복됩니까?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한 후에, 마른 뼈와 같이 죽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뼈가 다시 들어맞고 그 위에 살이 붙으면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또 성령을 통해 살아 있는 하나님의 군대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도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은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에 힘쓰고 애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오늘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만나 주신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만나주셨습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예민한 거울 뉴런을 통해 사람들의 불행을 자기 불행처럼 생각하며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 만나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까?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고 살면서도, 우상숭배 하며 살고 불의하고 탐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해야 했던 가장 시급한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와 불의한 삶을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주시는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도 같습니다.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가지신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예민한 거울 뉴런을 가진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신앙과 삶을 되돌아보며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