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언서

마음의 변화에 달려 있는 당신의 미래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8. 6. 20. 15:15




마음을 변화에 달려 있는 당신의 미래

이사야 58:1-14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생각과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살 뿐 아니라, 주를 위해 이런 저런 일을 하고 또 교회가 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활동에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표자가 아마 바리새인들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조상들이 전해준 신앙과 전통을 지켜 살려고 하지 않고,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과 같이 뜻을 정하고, 조상들이 전해 준 율법과 전통을 지키면서 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살아가는 삶이 남달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 아비는 마귀이니라.’ ‘심판의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이 예수님의 책망은 너무나 준엄해서 무슨 탈출구를 찾아볼 수도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볼 때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세리와 죄인들은 영접하고 환영해 주시고 함께 식사하시면서 기쁨으로 맞아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수근 거렸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도다.’(15:1-2)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은 책망하시고, 세상 이득을 취하면서 적당히 죄를 지으며 살아온 세리와 죄인들은 영접해 주신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 이 오후시간에는 이사야서 58장의 말씀을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사야서 58장 강해

 

이사야서 58:1절 말씀을 보면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이사야가 전해 주고 있는 이 말씀은 혼자 간직하고 있을 말씀이 아니고 또 숨겨둘 말씀도 아니고 소리를 낼 수 있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 크게 외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듣고 알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 외치는 목소리를 크게 내되 마치 나팔 같이 높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나팔수가 온 땅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알리려고 큰 소리로 나팔을 불듯이 그렇게 큰 목소리로 외치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하게 되는 말씀은 모든 백성들이 다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크게 외쳐야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백성들과 야곱의 집 사람들이 그들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팔 소리 같은 큰 목소리로 외쳐서 그들로 하여금 허물을 깨닫게 해주고, 그들이 지으며 사는 죄를 깨닫게 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얼마나 깊이 알고 통감하고 있습니다. 혹시 바울사도와 같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유대인들과 같이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께 선택함을 받은 백성이다. 나는 세상 죄인이 아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들이 있고,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들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부류 중에 어디에 속하여 있습니까?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판단은 어떠합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속한 죄인들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의 이해와 자기 자신을 보는 바리새인들의 이해의 차이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해 세례자 요한은 무엇이라고 책망했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책망했습니다. 너희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라고도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온 나를 대적하지 않았을 것이나, 너희 아비는 마귀이니 마귀를 따라 진리를 대적하고 있구나,’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의 일을 함께 행하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첫째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라고 합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입니까? 아니지요.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지만, 우리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의인이라 칭함을 받게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보는 바른 견해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보면 죄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의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해, 이런 관점을 가지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 관점에 따라서 그 가지게 되는 믿음, 그 살아가게 되는 삶이 완전히 달라지지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8:2-3절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 도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갔던 삶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열심을 다해 믿음으로 살고자 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지난 한 주간의 삶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보면 어떻게 표현될까요?

여러분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즐거워하며 사셨습니까?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삶을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구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 삶을 사셨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살았던 삶을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입시켜 보니 이 사람들이 얼마나 열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을 다해 믿음으로 살았던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3절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삶에 열심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지도 않으시고, 알아주지도 않으시고, 전혀 관심을 가져 주지도 않으신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삶에 대입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목회자 같으면 모든 삶을 다 바쳐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고, 성도들 같으면 그 삶의 최우선에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주의 일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은 전혀 보지도 않으시고, 관심도 갖지 않으시고, 그 수고와 그 헌신을 인정해 주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여서 하나님을 찾고 불렀지만 하나님은 전혀 듣지도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경험을 한 일이 없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무관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도, 하나님은 한 번도 나의 삶에 개입해 주시고 가까이 하시면 돌봐 주시는 경험을 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경험하게 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이, 신앙에 무덤덤한 성도들만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열심인 성도들도 자신의 삶에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해 주시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16:7절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절제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근원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절 말씀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런 마음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고 배척당함을 받았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삶은 우리에게 행위 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왜 제가 하는 것을 봐 주시지 않고 제 행위들을 인정해 주시지 않으십니까?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사람들에게서 보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일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사야서 58:3절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사야서 58:3-4절입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 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식을 하면서도 일꾼을 학대하고 있었습니다.

금식을 하면서도 이웃 사람들과 논쟁하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몸을 괴롭게 하고,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있으면서도, 완고한 마음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은 금식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금식은 그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헌신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할 수 있는 한 오래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40일 금식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40일 동안 금식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금식하는 것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금식은 소용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금식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58:6-7절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바로 사랑과 배려와 관심입니다.

사랑과 배려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과 배려와 관심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일어난 변화, 즉 그 마음의 변화에서 나오는 사랑과 배려와 관심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릅니다.

종교적 의무나 종교적인 활동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는 세상 사람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이중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그런 나를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밖으로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하는 행동과 집에서 편한 사람 앞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고, 교회 안에서 하는 행동과 직장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면서도 하나님이 나의 그런 삶을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노인이 되면 외로움을 느낍니다.

노인들은 외롭기 때문에 그 며느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히 말하면서 시어머니인 자신에게는 퉁명스럽게 말하면 곧 바로 상처를 받습니다. 왜요. 외로운 노인들은 그런 며느리의 행동 속에서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자세 마음의 태도를 읽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의 입장에서는 며느리가 자신을 향해 좋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큰 아픔입니다.

 

그러면 며느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아니 나는 밥을 다 해주고’, ‘용돈도 드리고’, ‘뭐 필요한 것을 안 해 주는 것이 없는데 우리 시부모님들은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며느리들은 그 시어머니의 외로운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외로운 마음에 화답해 주는 것이 효도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같은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십일조를 내고.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깁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을 위해 할 만큼 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나를 인정해 주시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는 다하고 있지만,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의 마음의 변화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의 변화 없이 하는 그 모든 헌신들은 사실 위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헌신은 그 마음의 변화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행위를 말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가이고 다른 하나는 포이에마입니다. 엘가는 동기 즉 마음의 변화에서 나오는 행동을 말하며, 마음은 바뀌지 않았는데 나오는 행동을 포이에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은 바로 그 마음의 변화에서 나오는 행위인 엘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드러난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게 된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음이 통하면 그 행동이 다소 불손해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금이가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를 악으로 나아가게 하는 문을 닫으려면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으려면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고 살려고 하면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그런 우리와 가까이 하실 것입니다. 야고보서4:7-8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여기서 손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은 손으로 하게 되는 행동을 말합니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는 말씀은 마음을 변화시키라 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교회에 더 자주 가라교회에서 활동을 좀 적극적으로 해라일주일에 며칠은 금식하고 매일 말씀을 10장 이상은 읽으라.”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너희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 내가 너희 가까이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합니다. / 그러면서 야고보서 4:9-10절에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다시 이스라엘과 이사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말씀해주시고 있습니까? 이사야 58:8-14절입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아멘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놓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를 때 내가 여기 있다라고 하는 응답을 듣고 싶습니까?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사야 58장 말씀과 야고보서 4장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을 때,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마음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내가 먼저 변화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변화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면, 하나님께서는 생각지도 못한 아주 가까운 거리에 계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모든 사람들이 경험한 은혜의 경험입니다. 이런 은혜의 경험들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줍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마음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정하지 않은 일을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겠지만, 먼저 그렇게 하려는 결정은 우리가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실을 알기를 원하시지만, 그렇게 되고자 하는 결정은 우리가 내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행하심과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나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는 막연한 기대나 가정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라고 하셨듯이 확실한 내용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꾸지 않고 종교 활동만 하게 되면 하나님은 또 그렇게 내버려 두실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사랑받기를 원하신다(마태복음 22:37)!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2:37) 이렇게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신앙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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