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
느헤미야 13:28-31
사람의 기억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학습으로 얻게 된 지식을 약 10분 후부터 망각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고 나면 약 70% 정도를 잊어버리고, 한 달이 지나고 나면 약 80% 정도를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공부하는 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날 공부한 내용을 잊어버리기 전에 복습을 하는 것입니다. 복습을 통해 단기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지식을 장기기억 속으로 이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래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좋아도 복습을 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학생들에게는 예습과 복습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습까지 하기 에는 힘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습만이라도 반드시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나를 위해서 나의 장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나의 삶을 위해서라도 복습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학생들이 더 나은 장래를 보장 받고 사는 학생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학생들이 믿음 안에서 복 있는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까?
시편 1편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 즐거워하는 일을 잘 기억합니다. 또 반복해서 하는 일을 잘 기억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사람,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기억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의 진정한 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사람,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이 복 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야 그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야 그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말씀에 대한 이해력이 차이가 나고 기억력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연세의 많고 적음에 따라 말씀에 대한 이해력이 차이가 나고 기억력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이해력의 차이와 기억력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말씀을 들을 때 귀로만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들은 말씀, 마음으로 감동을 받은 말씀은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또 말씀을 들을 때 기록하며 듣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기록은 우리 기억력의 한계를 보완해 주는 아주 유용한 도구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외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며 사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도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의 말씀을 기억하라"라고 수도 없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엇인가를 알고, 이해하고,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알고,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도 아시고, 이해하시고, 기억하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편 139:1-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고 기억하는 것과 하나님이 알고 기억하는 것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기억하는 것은 유한한 지식에 근거를 둔 앎이고 기억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알고 기억하고 있던 내용들을 시간이 지나가면 잘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심과 기억하심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심과 기억하심은 전지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는 앎이고 기억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은 한번 아신 것과 한번 기억하신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느헤미야는 이 하나님의 기억하심에 호소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느헤미야는 먼저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전에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이스라엘이 범죄 하면 그 죄를 물어 이방에 흩으실 것이나, 그 가운데서 죄를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성실히 지키면 하늘 끝에서라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전에 약속하셨던 그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이제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3장에서 느헤미야는 자신과 백성들이 행한 선한 일들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재건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희생과 헌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또 자신과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서 헌신하고 있는 이 일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또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부임해 온 자신이 총독이 받을 수 있는 보수도 받지 않고 이스라엘을 다스린 일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총독인 자신이 주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개혁한 일 등등의 선한 행위들을 기억하셔서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느헤미야가 믿고 섬겼던 하나님은 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고, 또 그 행한 선악간의 모든 행위들을 기억하시면서 행한 대로 보응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동일한 하나님이 또 오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가 믿고 섬겼던 하나님에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믿고 섬겼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첫째,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느헤미야가 믿고 섬겼던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써, 그 장조하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다 보고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전지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전지하신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 아십니다.
육신을 가지고 3차원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한계, 공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영원에 계시면서, 모든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보고 계시며 그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직접 참여하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는 어제와 오늘이라는 시간의 구분이 무의미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는 이 지상과 우주와 천상의 세계라는 공간의 구분 또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영원의 차원에 계시면서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현존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한 후 가장 힘들었던 일은, 동역자도 없이 혼자 기도하는 일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사모님과 대학을 다니는 두 자녀와 함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넘도록 개척예배를 드린 첫날 참석한 한 할머니만 나오시고 다른 성도들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는 동안 개척의 열정을 다 잃어 버렸다고 합니다. 또 기도를 많이 한다고 소문이 났던 사모님도 기도할 힘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을 다니는 두 자녀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나중에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이런 절박한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나중에는 온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가셨습니다.
이 목사님의 이야기는 동역 자도 없이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동역 자가 없이 개척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바램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지나 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함께 기도했던 시간들도 은혜의 시간들이었지만 혼자 기도해온 시간들도 역시 은혜의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혼자서 기도 할 때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골방에서 혼자 기도할 때에,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5-6절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과 단 둘이서 아무도 없는 집이나 예배당이나 기도실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 우리가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는 가운데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때로는 세계를 품고 기도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기도하고, 또 때로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기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우리를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이렇게 홀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듣고 계신 그 앞에서 기도하는 그 시간이 힘든 시간이 되겠습니까?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그 시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은혜로운 시간이 되고, 그 어떤 시간보다 은혜 충만한 시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교회를 골방 삼아서 이렇게 수도 없이 많은 날을 기도해왔고, 교회를 서재 삼아서 이렇게 수도 없이 많은 날 동안 설교 준비를 하며 지내 왔습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그런 나와 함께 하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제가 묵상하고 있는 설교 말씀을 먼저 하나님께 들려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낸 시간들이 세상 적으로 보면 외로운 시간들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과 함께 보낸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골방에서 이런 은혜의 경험을 하며 지내왔기에, 혼자이기 때문에 힘이 빠졌다는 그 목사님의 말이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목회자가 바라보며 사는 것은 그 주어진 환경이면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목회자가 바라보며 사는 것이 성도들이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바라보며 사는 것은 환경도 아니고 성도들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켜 주시는 약속의 말씀들입니다. 또 성령을 통해 베풀어주시는 깨달음과 위로와 감동과 감화와 은혜와 은사들입니다.
만약 목회자가 혼자 있다고 해서 힘이 빠진다면, 복음의 불모지에서 홀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이 가장 먼저 힘이 빠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듣고 있는 소식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최 일선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에게서 가장 능력이 많이 나타나고 가장 역사가 많이 나타난다는 소식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역사의 최 일선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에게 집중적인 화력지원을 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역사의 최일 선에 나를 드리고 믿음으로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였던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멘.
골방은 장소적으로 가장 은밀한 곳을 말합니다.
골방과 같은 은밀한 장소에서 드리는 우리 기도를 사람들은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전지하신 하나님은 또 무엇을 보고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존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 보고 아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 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린 나이에 그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고 있었던 다윗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또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 양을 치고 있었는지를 다 보고 아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새의 아들 중에 나와 마음이 같은 사람이 있다. 너는 그에게 가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다윗은 나중에 자신의 속마음까지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놀라워하면서 시편 139편에서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 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 하나님이 바로 느헤미야가 섬겼던 하나님이고, 또 오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지난 한 주 동안 어떤 믿음으로 살았었는지, 또 여러분이 주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하며 살았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하여, 교회와 성도들과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기도를 드리며 어떤 수고를 하며 지내왔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전지하신 이 하나님의 아심을 깨닫게 되면 그 삶이 달라집니다.
다윗은 어떻게 그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그런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이런 이해를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다윗에게는 10년 동안 자기를 죽이려고 따라 다니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모든 상황들을 다 아시고, 하나님이 그 모든 상황들을 다 보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삶을 위탁하게 하였으며, 원수 같은 사울 왕에게도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느헤미야도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이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느헤미야에게는 어떻게 역사하였습니까? 이 믿음은 느헤미야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 수 있게 용기를 주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믿고 섬겼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첫째,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 표현대로 말하면 느헤미야는 안정된 노후가 보장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주전 5세기 중엽인 바사 왕 아닥사스다 1세 때 왕의 술 맡은 관원 장으로 있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기록들을 보면 술 맡은 관원 장은 매우 중요한 직분이었습니다. 이들은 왕이 마시는 술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왕의 옥새를 보관하고, 또 왕의 재정을 관리하는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왕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로서 늘 왕의 가까이에서 정책을 자문하고 보좌하는 왕의 최 측근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술 맡은 관원 장은 왕의 후궁에도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지 않은 사람은 술 맡은 관원 장이 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왕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그 생활과 노후가 보장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느헤미야가 왜 자청하여 페르시아의 수도 수산 성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개혁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재건하는 일에 헌신하기 위하여 갔습니다. 이 느헤미야는 자비량으로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마치게 됩니다. 또 총독에게 책정된 보수도 받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자비량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이 느헤미야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자신의 선한 행위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명백한 기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시는 것이 곧 바로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절대로 잊어버리시지 않으시는 기억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기억하심에 대해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12절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마지막 심판의 날이 되면 하나님 앞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책이 펼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단수로 말씀하고 있는 ‘생명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복수로 책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여러 권으로 된 ‘행위 책’입니다. 여기에는 이 세상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이 ‘행위 책들’을 근거로 해서 사람들을 심판하시게 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가 행한 선악간의 행위들이 ‘행위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행위들을 다 책에 기록해 놓으셨을 정도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억하고 있는 내용에 근거하여 심판을 집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자신의 결혼을 위해 준비해 둔 귀한 ‘옥합’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면서 제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에 이 여인이 행한 일도 전하여 기억하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헌신을 예수님도 기억하고 계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성도들도 계속 기억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성전 연보 궤에 자신의 하루 생활비였던 두 렙돈의 헌금을 하였던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시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얼마나 큰 헌신인지 기억하라고 이야기해 주신 일도 있으십니다.
또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이 떡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나의 살이며, 이 포도주는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나의 피’라고 하시면서 ‘내가 다시 오는 그 재림의 날까지 이 성만찬을 행하며 나를 기념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성만찬을 기념하며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1부예배가 끝나고 나면 2부로 항상 성만찬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는 1년에 몇 회만 성만찬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상당기간 성만찬을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의 표지’는 바로 ‘신실한 말씀의 전파’와 ‘온전한 성만찬의 시행’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권징’까지를 교회의 표지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권징은 사문화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권징을 행하면 권징 받은 성도들은 곧 바로 옆에 있는 교회로 가 버리면 끝입니다. 그래도 교회와 교단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성도들을 제제할 아무런 수단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한 헌신을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행한 선한 행위를 다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제까지 어떤 믿음으로 주를 섬겨 왔는지를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제까지 주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얻은 물질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 왔는지 다 기억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남모르는 수고와 선행과 기도와 섬김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한 일을 몰라주어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세월이 지나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을 사람들은 다 잊어버려도 우리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종말의 날에 예수님이 어떤 사람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하실 때에 그 사람은 예수님께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주여 제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 이 말씀은 이 사람은 자신이 믿음으로 행한 선한 일들을 다 잊어버렸지만, 예수님은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는지, 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리고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인류역사가 끝나는 그 날에 반드시 여러분의 섬김과 희생과 헌신한 삶에 대한 보상을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참고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게도 해 줍니다. 왜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그 모든 선한 행위들에 대한 열매를 거두게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믿었던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 하나님께 자신이 행한 선한 행위를 기억하시고 이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또 느헤미야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습니까?
셋째, 자신의 모든 행위를 아시고 기억하시고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책’속에 여러분의 믿음을 기록해 놓으시고, ‘행위 책들’ 속에 여러분의 선한 행위들을 다 기록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과 선한 행위에 합당한 보상을 반드시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보상이 있음을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종말에 있을 상급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달란트의 비유나 므나의 비유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들을 보면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시고 또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어 보상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서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이 현세에서도 있고 내세에서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과 같이 여러분이 믿음으로 행하신 그 모든 수고와 섬김과 희생에 대한 보상을 이 땅에서도 받으며 살게 되고, 천국에서도 영생으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과 선한 행위들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누가복음 6: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마태복음 10:42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0:35절입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해야 할지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있는 이런 말씀들처럼 우리의 믿음과 섬김과 수고와 헌신과 희생에는 반드시 합당한 보상이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있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느헤미야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억해 주실 뿐 아니라 그 모든 수고와 희생과 헌신과 눈물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그 보상은 이 땅에서도 여러 배로 갚아주실 뿐 아니라 천국에서 영생으로 갚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받으시고, 우리의 섬김과 희생을 기억하시고 보상해 주시되,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 땅에서도 물질로 건강으로 보상해 주실 뿐 아니라, 또 천국에서도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예언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 (0) | 2022.05.08 |
---|---|
하나님의 사랑 (0) | 2022.04.10 |
뜻을 정한 다니엘 (0) | 2022.01.02 |
이사야를 만나주신 하나님 (0) | 2021.08.15 |
오늘부터는 복을 주리라 (0) | 2021.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