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언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5. 8. 14:47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

미가서 6:8

 

본문을 살핌

 

오늘 우리는 미가서 6:8절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말 성경에서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아담아 그가 네게 보이셨다’ ‘선한 것이 무엇임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주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서, 미가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 당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시지 않고, 과거에 살다가 이미 죽은 인류의 시조 아담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면서, 왜 그 당시에는 살고 있지도 않은 아담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의 이름들을 부르지 않고 에서야 너는 사랑해라.’ ‘야곱아 너는 겸손해라.’라고 설교한다면 그 설교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말씀으로 들리겠습니까? 아니면 이미 죽고 없는 에서와 야곱에게 하고 있는 말씀으로 들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해 그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아담아 그가 네게 보이셨다’ ‘선한 것이 무엇임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신 이 말씀은, 미가 선지자와 그 당시 살고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아담의 후손으로 살게 될 사람들 즉 전에 살았고, 지금 살고 있고, 장차 살게 될 그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보십니까?

 

이렇게 볼 때 미가서 6:8절 말씀은

첫째,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미가 선지자를 통해 하고 계신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론이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이방 사람들 즉 아담의 후손으로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아 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말씀이 신불신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야할 말씀이라고 보고 아담아사람아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아담아 그가 네게 보이셨다’ ‘선한 것이 무엇임을...’ 이 원문의 순서로 볼 때 아담아 라는 말씀 다음에 나오는 단어는 ”(He)라고 하는 3인칭 단수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이 단어가 가리키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He) 라는 말을 쓰는 것은, 존칭어가 발달되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어법에는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에서는 사람아 그가라고 번역하지 않고 사람아 주께서라고 의역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는 보이셨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선언하다’ ‘알려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내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알려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선하게 보시는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보시는 삶은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말씀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은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미가서 6:8절의 이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은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있는 전 인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이 말씀을 미가를 통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멘.

 

또 미가서 6:8절 말씀은

둘째,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류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어디서나 진리의 말씀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구불변의 진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아멘.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최초에 기록한 사람이 모세라고 하면서 모세 이전에는 모세를 통해 기록된 것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 이전에는 비록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졌던 하나님의 말씀은 없을지라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모세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선한 일이고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에 처음 나옵니다. 그러나 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아담의 때부터 있었던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류최초의 살인자가 된 가인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동생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모세에 의해 십계명에 기록된 말씀들은 이미 아담 때도 있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2000년 전에 성자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으심을 죽어주심으로 성취해 주신 복음의 약속들도 이미 아담 때부터 있었습니다.

 

이 복음의 약속은 하나님이 창세기 3:15절에서 약속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속에 들어 있었고, 창세기 3:21절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신 사건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의 약속들을 계속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39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 전체가 바로 인류의 구세주로 오실 메시야를 증거 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아멘.

 

또 미가서 6:8절 말씀은

셋째, 하나님이 선하게 보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선하게 보시는 구체적인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알려주셨다고 하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이 선하게 보시는 구체적인 삶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요구하신 이 말씀들에는 모두 다 분사형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사형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요구의 계속성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가서 6:8절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계신 공의와 인자와 겸손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살아 있을 동안 계속 지켜나가야 할 윤리적인 요구라는 것입니다. 아멘.

 

이제 남은 시간 동안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계속 행하며 살아가야 할 공의, 인자, 겸손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첫째는,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공의라는 말은 미쉬파트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미쉬파트는 재판을 바르게 하다,’ ‘정의를 실현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공의를 행하며 사는 삶이란? 재판관이 재판을 공정하게 하여서 그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의는 다른 말로는 정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공의와 정직은 서로 호환되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와 정직은 또 구분되기도 합니다. 공의와 정직을 구분해보면, 공의는 사회적인 의를 강조하고 있고, 정직은 개인적인 의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옳고 그름, 의로움과 죄악 됨을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공의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불공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 18:1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택하신 이유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공의를 행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들어야 할 말은 그 사람은 정직해, 그 사람의 말이라면 틀림이 없어 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뿐 아니라, 우리가 하며 사는 말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생각에서까지 정직한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처음 예수를 믿고 난 후에 하였던 고민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예수를 믿고 난 후 그 행동을 보면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있으니 예수를 믿는 사람 같고, 그 하는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고 있으니 예수를 믿는 사람 같았지만,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제 마음 속에는 여전히 불의한 생각과 나쁜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자신의 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저는 정말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많이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을 언제 가지게 되었습니까?

은사를 체험할 때였습니까? 기적을 경험할 때였습니까? 아니면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였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를 체험하고, 기적을 경험하고, 기도응답을 체험하여도, 내 자아의 죄악 되고 부패한 모습을 보게 될 때는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신데 나 자신은 여전히 불의하다는 것이 확신을 흔들리게 합니다.

 

로마서 7을 보면 바울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죄악에 사로잡혀 있는 그 속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절규하지 않았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랬던 바울이 언제 그 고민을 다 떨쳐내고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까?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을 경험한 이후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 속에 한 고백이 바로 로마서 8: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그런데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공의를 미워합니다. 미가서 3:9절입니다.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악인들은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악인은 악한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공의를 사랑합니다. 아니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악도 용납합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은 소돔 사람들의 행악하는 불의한 일을 인하여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로 인하여 우리 마음도 심한 상처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주에 검수완박이라는 폭풍우가 지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검수완박을 시도했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공의를 사랑하느냐? 공의를 버리느냐?’ 하는 것을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사람들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보실 때 공의를 사랑하는 성도로 정의를 이루어 가는 성도로 보여질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공의를 행하라.’는 이 말 속에는 적극적으로 공의를 만들어가라.’라는 뜻도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생각 속에도, 말 속에도, 행동 속에도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뿐 아닙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공의가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공의를 만들어 나갈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공의는 우리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공의가 만들어져야 하고, 정의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보시면서 너희만 세상의 빛이다. 너희만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공의가 만들어지고 정의가 만들어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곳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검수완박이라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검수완박이라는 목적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온갖 편법과 반칙을 다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는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배운 사람들도 다 똑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또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설정한 목적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잘못된 방법인 줄 알면서도 그 잘못된 방법 이용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또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지극히 이기적인 판단의 잣대로 행동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요, 자기가 하면 로멘스라고 생각하는 의식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삶 속에는 공의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공의가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공의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그대로 두고 먼저 그 형제와 사화한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공의가 이루어진 후에 예물을 드려야 그 예물이 열 납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최고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의를 행하는 것, 공의가 없는 이 세상 안에서 공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바라시는 가장 첫 번째 요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한 주간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공의를 행하며 살아갈까?’ ‘어떻게 공의로운 삶을 만들어 나갈까?’ 하는 거룩한 고민을 하며, 우리의 개개인이 영적인 영역에서, 우리 가정생활에서, 직장생활교회 생활에서 공의를 이루어나가는 성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둘째는, 인자를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인자는 참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학 전문가들도 이 인자는 이렇게 번역된다.’라고 쉽게 정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인자라는 단어는 번역가들마다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자라고 번역하였고, 어떤 사람은 인애라고 번역하였고, 어떤 사람은 친절이라고 번역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충성이나 온유로까지 번역하였습니다.

 

물론 이 인자라는 말 속에는 이런 모든 뜻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 인자는 공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가지시고 계신 한 속성입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은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때 맺은 언약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자주 깨뜨리고 무시합니다.

우리는 그 예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대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셔서, 그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구원하시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할 때 이렇게 서약합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변치 않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어려울 때나, 끝까지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납해 주겠다고 혼인서약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혼인서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혼인 서약을 지키지 못하고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그 남편이 되어주시고,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가 된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고, 또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압제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 하셨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징계의 고통가운데서 깨닫고 뉘우쳐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징계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징계는 사랑의 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삶이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첫째,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베풀어주신 인자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입고 살아가는 성도답게 다른 사람에게 인자를 베푸는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인자를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받은 은혜를 누리며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며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가두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물이 흐르듯 저절로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로 흘러내려 왔듯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물과 같이 저절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즘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교만해 보입니다.

거만해 보입니다. 마치 자기 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자는 이렇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렇게 행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인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호수가 있습니다.

길릴리 호수와 사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물이 풍부하고 생명이 풍성한 곳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해는 죽은 호수입니다. 높은 염분으로 인해 물고기가 전혀 살 수 없는 호수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그 북쪽에 있는 헐몬 산으로부터 풍부한 물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또 요단강을 통해 사해로 풍부한 물을 흘러 보냅니다. 그래서 적당한 염도를 유지하여서 생명이 풍성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단강을 통해 흘러내려오는 물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그 물을 전혀 내 보내지 않습니다. 사해의 물은 뜨거운 사막의 햇볕을 받으며 계속 증발되어서 염분이 높은 죽음의 바다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은혜 충만한 성도들은 그 받은 은혜를 자신이 누릴 뿐 아니라 또 그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받은 은혜를 감사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갈릴리 호수 같이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에 목말라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기만 하고, 그 받은 은혜를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사해와 같이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가 받은 인자를 나누며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있는 삶입니다. 인자를 나누고 사랑하며 사는 곳에 풍성한 생명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인자를 나누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넘어뜨려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은 상대방을 세워주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우리 교회가 사는 길이고, 우리나라가 잘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고, 세워주는 인자가 풍성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있는 삶입니다. 아멘.

 

셋째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겸손이란? 말은 자신을 다른 사람의 아래에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겸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겸손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한 분으로 성부와 성령과 모든 면에서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겸손하셔서 철저히 자신을 성부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셨습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래 두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마땅히 주장하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만드신 사람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겸손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겸손은 가장 높은 종교적인 덕행 중의 하나입니다.(2:12)

초대교회 교부로 유명하였던 어거스틴에게 사람들이 와서 선생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3가지를 들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때 어거스틴은 대답하기를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어거스틴이 겸손을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겸손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18:27,31 32) 이웃과의 관계에서의 겸손은 자신을 다른 사람의 아래에 두는 것입니다. 또 나에게 있는 선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고전4:7)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일어나는 것임을 믿고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벧전 5:6-7)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에녹이 그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동일한 내용을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11:5)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 23:23절 말씀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믿음을 버렸다.’ 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라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그러면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시는 곳에 내가 하나님을 따라 가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는 곳을 따라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이 초막이든지 궁권이든지 겸손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삶이 이런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살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길을 겸손히 따라가는 삶입니다.

 

세 가지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신명기 10:12-13) 우리 모두는 또 하나님이 주신 한 주간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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