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는 성도
에스겔 47:1-12
1. 서론
오늘 우리가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에스겔서 47장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에스겔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보여주신 내용입니다. 에스겔이 보니 성전의 동쪽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그 물은 흘러가면서 점점 깊어지고 수량이 많아져서, 처음에는 발목에 차고, 나중에는 무릎과 허리까지 차고, 결국에는 헤엄쳐서 건너야 하는 큰 강물이 되어서 사해바다로 흘러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본 것은 이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각종 물고기들이 살아났고, 강 좌우 땅에서는 각종 먹을 실과와 약재료들이 자라 무성한 잎과 열매를 맺게 했고, 이 물이 결국에는 죽음의 바다인 ‘사해바다’까지 살아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흘러나온 이 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물은 인간의 생명과 아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태아는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약 9개월 정도를 자란 후에 태어납니다. 이뿐 아니라 신생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두세 시간 간격으로 모유나 우유를 먹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탈수 현상이 일어나 어린 아기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물과 인간의 생명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사람의 몸의 약 70% 정도가 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 몸에서 물이 2% 부족하게 되면 사람들은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음료수 회사에서는 2%라는 음료수를 내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음료수는 당신이 필요로 하는 2%의 갈증을 채워주는 좋은 음료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물이 5%로가 부족하게 되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고, 12%가 부족하면 죽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서도, 물만 계속 섭취해 주면, 100일 이상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물은 우리 인간의 구성요소 대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보니 생명을 상징하는 이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속에 세워진 성전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명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또 예수 믿는 성도들을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볼 때 예수를 믿는 우리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이 된 우리들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으로 죽어 있는 영혼들을 살려내는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어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됩니까?
우리는 어떻게 죽어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이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어 있는 영혼을 살리는 역사를 감당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보좌가 은혜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루살렘 성에는 강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과거 ‘아리우다’라는 사람의 타작마당이었습니다.
타작마당은 주로 어떤 곳을 사용합니까?
타작마당에는 물이 있으면 안 됩니다. 물이 없고 건조한 땅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은, 아리우다라는 사람이 타작마당으로 쓸 정도로 물이 없는 곳이며, 높은 장소에 있는 아주 평평한 반석으로 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나중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은 주변 땅보다 높은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물이 전혀 없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이 물은 평범한 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물은 하나님의 성전 즉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흘려보내 주시는 생명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물에 대해 요한계시록 22: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에스겔서의 말씀과 병행 구를 이루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오고 있으며, 그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생명수의 원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에스겔이 보았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이 세상의 물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수 물이 어떻게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이 생명수의 물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 나와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제단을 휘감고 남편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시 정리해 보면, 성전의 문지방 곧 지성소로부터 흘러나온 이 생명수의 물은, 성전 마당 오른쪽에 있는 제단을 한 바퀴 돈 후, 그 제단을 통과하여 남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물이 흘러나온 지성소는 어떤 곳입니까?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임재하시는 곳이며,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 주시는 곳입니다.
이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대제사장이 그것도 일 년에 단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깨끗하게 목욕을 한 다음, 정결한 짐승의 잡아서 그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 짐승의 피를 언약궤의 뚜껑에 뿌려야만 했습니다. 짐승의 피를 뿌렸던 이 언약궤 뚜껑은 속죄 소라고 하는데 이 속죄 소가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제일 중요한 곳은 성전이고,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지성소이고, 지성소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이 속죄 소였습니다.
이 속죄 소에서 나온 물이 흘러갔던 성전 앞마당 오른쪽에 있었던 제단은 어떤 곳입니까? 이 제단은 짐승을 잡아 드리는 곳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제단에서 짐승을 잡아 불태우고 그 죽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구약의 이 제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을 상징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이 제단에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위해 짐승을 제물로 바쳤듯이,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골고다 언덕에서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때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면서, 이제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피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산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전에는 1년에 한 번, 그것도 대 속죄일에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이 지성소 즉 은혜의 보좌 앞에, 예수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이제 믿음으로 언제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신 그 사건이 바로, 죄인 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 이외에 “천하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고, 유일한 진리이고, 유일한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는 어떻게 우리에게 임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부연해서 설명하시기를 “이것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을 말씀하고 있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사실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알게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에게 생명수를 공급해 주는 은혜의 원천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이 생명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생명수는 바로 우리를 성전 삼고 계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지금도 흘러넘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는 늘 이렇게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이여 우리게 임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큰 능력 내 심령 속에
주님은 생명수 결코 마르지 않는, 나를 다스리시는 나의 구세주
성령이여 우리게 임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큰 능력 내 심령 속에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결코 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받아 누리게 된 우리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둘째, 우리는 받은 은혜의 넓이와 깊이를 점점 더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47:3-5절입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척을 척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하나님의 사자가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에스겔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그 물에 발목이 잠겼습니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한 후 건너게 하시는데 이제는 물에 무릎이 잠겼습니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건너자 이번에는 이미 물이 허리에까지 미쳤습니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한 후 다시 건너는데 물이 창일하여 헤엄칠 물이 되어 사람이 능히 건널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온 생명수 물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그 넓이와 깊이를 더해 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신앙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은혜의 넓이와 깊이를 점점 더해 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 생명이 있는 신앙이라면, 신앙의 연조가 더해 가면 더해 갈수록 우리 신앙도 그만큼 넓어지고 깊어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그 논문을 보지는 못했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어떤 분이 한국의 대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내용을 가지고 논문을 섰는데 그 내용이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대형교회 성도들 중에 주일날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신앙인 말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약 7%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대형교회 성도들 중 약 93%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경험한 적이 없는 종교인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윤리와 도덕성의 부재, 교회의 세속화, 극단적인 개인주의 신앙과 이웃교회를 생각하지 않는 개교회주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사기 사건, 교회와 교단의 교권다툼 등등이 일어나고 있는 원인은 바로 교회 안에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가 10%도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교회 안에 10%-15% 정도라도 참된 성도가 있다면 그런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입고, 성전에서 흘러나온 성령의 생명수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어떤 신앙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까? 이런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가진 신앙이 점점 성장하고 점점 자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생명은 그냥 정체되어 있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은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못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끊임없는 움직임을 통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또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점점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계속 공급받고 있는 성도라면, 마치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깊어지고 그 범위가 넓어져 갔듯이, 그렇게 신앙과 인격과 삶이 점점 깊어져 가고 점점 그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가 넓어져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특성상 이렇게 자라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믿음이 자라지 않고, 그 삶이 점점 거룩해져 가지도 않고, 종교적인 행위로 만족하고 있는 성도가 있다면, 이런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 강물을 마시고 있는 성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를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우리들의 신앙이 점점 자라나야 할 것을 여러 비유로 전해 주셨습니다.
첫째, 천국은 마치 그 밭에 심은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로되 그 씨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점점 자라서 나중에는 새 들이 깃들여서 쉬어갈 정도의 큰 나무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둘째, 천국은 마치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은 누룩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루 속에 썩어 놓은 누룩이 그 가루를 점점 부풀게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 가진 생명력 때문에 점점 자라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이 생명수를 마시고 있는 성도들이라면, 신앙생활을 거듭하면 할수록, 우리의 신앙은 자라야 하고, 우리의 신앙은 깊어져 가야 하고, 우리의 신앙은 점점 더 그 넓이와 폭을 더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깊이가 점점 더 깊어져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점점 더 그 깊이를 더해 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에서도 점점 더 진보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역사에서도 더 깊어져 가고 더 넓어져 가야 합니다.
아직 얕은 물가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파도가 밀려오면 쉽게 넘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삶 속에서 적은 어려움을 만나도 쉽게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깊은 은혜의 강물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세상의 거센 파도가 밀려와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마치 파도타기 하는 사람들과 같이 요동치는 파도에 자신을 맡기고 순응하며 그 파도를 타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서 헤엄치는 신앙이란 바로 이런 신앙을 말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세상의 파도를 타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10절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로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점점 깊어져서 나중에는 생명수의 큰 강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점점 자라나서 풍성하게 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언제나 풍성하게 되어 갑니다.
요엘 선지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실 것인데, 그 성령의 부어주심이 얼마나 풍성하든지 마치 하늘에서 물을 쏟아붓는 것 같이 만민에게 성령을 쏟아부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이 쩨쩨하게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쩨쩨하게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쩨쩨한 하나님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고 풍성하게 헌신하고 풍성하게 주를 섬기면, 반드시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풍성한 은혜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은혜의 넓이를 점점 더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성장이 우리에게 있을 때 이런 우리 신앙을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47:9-10절을 보겠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여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성전 보좌 아래서 흘러나온 이 생명수 강물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깊이를 더하고 그 넓이를 더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 생명수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회복되고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생명의 물이 흘러가는 곳은 그곳이 어디이든지 상관없었습니다. 그곳이 사막이든지, 강둑이든지, 사해 바다와 같이 죽은 바다이든지 관계없이 모든 곳에서 회복되고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또 12절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생명수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각종 실과와 약초들이 자라나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다고 하였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이런 말씀 들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흘러가면서 점점 그 수량이 많아져서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 갔을 뿐 아니라, 그 물속에서 고기들이 살아나서 번성하게 되고, 또 그 강물이 영향을 미치는 강 좌우의 땅에서는 각종 나무들이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런 생명의 역사는 기독교사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는 12제자와 120명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역사는 얼마 있지 않아서 오백 명에게 또 삼천 명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나는 도시로 바꾸어 갔습니다.
이 생명수는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안디옥을 거쳐서 이제 유럽으로 건너가서 거기서도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 후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로 가서 거기서도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어 갔습니다. 이제 다시 태평양을 넘어와서 아시아에까지 이르러 저와 여러분도 이 생명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아에 온 이 생명수는 계속 서진하여 지금은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주시는 생명이 너희에게 주어질 때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생명수는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 생명 운동이 저 회교국가들에게도 들어가서 거기서도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고, 다시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는 그날이 바로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살아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한 이 생명 운동은 결코 정지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를 향해 계속 흘러갔듯이, 교회가 가진 생명력도 계속 움직이며 전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생명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과 성도들은 생명을 걸고 목숨을 바쳐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 때문에 당하는 극한 박해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이 생명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콜타르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달려 인간 횃불이 되는 박해 속에서도 이 생명을 전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무서운 짐승의 밥이 되는 극한 공포 속에서도 이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육신의 생명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세상에 증거했습니다.
이렇게 생명의 속성은 개인적으로는 점점 더 깊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개개인이 깊은 신앙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깊은 신앙은 주위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넓은 범위에 생명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얕은 물가에서 신앙생활하고 싶어 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 다 넘실대는 은혜의 강물 속에서, 생명수인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다 이 생명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이 점점 깊어지는 신앙생활 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신 생명수가 우리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수가 우리를 통해 우리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현장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말미암아 생명이 살아나는 풍성한 역사가 오늘날도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11절입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땅이 될 것이며”
셋째, 이 말씀은 우리가 은혜를 받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펄과 갯펄은 어떤 곳입니까?
진펄과 갯펄은 홍수 때나, 밀물 때에는 물로 덮이지만, 홍수가 그치거나 썰물 때에는 진흙땅 즉 갯벌이 되어 버리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런 곳에서는 아무 식물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진펄과 갯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벌과 갯벌과 같은 사람들은 생명의 복음을 전해 듣고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로 받으나 곧 그 들은 말씀을 잊어버리고 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때때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그 마음으로 받으나 그 감동을 통해 인도하심에는 순종하여 살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받으나 그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 결실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진펄과 갯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배드릴 때에는 은혜도 받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난 후 다시 그 삶 속으로 돌아가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그 삶의 변화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게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은혜의 원천입니다. 우리의 은혜의 원천은 하나님의 보좌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 근거하여 성령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생명수를 마신 성도들은 점점 더 그 은혜가 깊어지고 그 은혜가 넓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어 가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우리 모두는 진펄과 갯펄과 같이 은혜를 헛되이 받는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한 주간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을 통해 충만히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예언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옐로카드 (8) | 2024.10.13 |
---|---|
생명을 살리는 교회 (0) | 2023.07.16 |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 (0) | 2022.05.08 |
하나님의 사랑 (0) | 2022.04.10 |
기억하고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 (0) | 2022.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