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옐로카드
말라기 1:1-3
1. 성전 건축을 위해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말라기서는 에스라서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말라기서는 성전 건축을 마치고 난 후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레스왕의 명령으로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몰려와서 성전 건축을 훼방하고 방해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왜 성전 건축을 방해 하였을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의 입장에서보면, 가나안 땅은 지난 70년간 자신들이 살아온 땅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떼로 몰려와서, 이 땅은 자기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라고 하며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예루살렘에는 자신들이 섬기며 살고 있는 신의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것을 용납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의 입장에서보면, 예루살렘에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충돌하였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똑같은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약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와의 전쟁에서 져서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0년 동안 가나안 땅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48년 5월 1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유대인들이, 이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그곳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부당하게 여긴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이 독립선언을 한 그다음 날인 5월 15일에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5월 16일에는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5개국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습니다. 만약 미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스라엘 건국은 여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미국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영토까지 크게 넓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과 아랍인들 사이의 분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시작하더니, 그 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와의 전쟁으로 확전되었고, 얼마 전에는 이란까지 개입하여서 약 200발의 미사일을 이스라엘로 쏘았고, 그중 일부가 비행장이나 모사드 본부 등에 떨어져서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스라엘도 테헤란 지도층과 이란의 석유 시설과 핵 시설에 보복 공격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인의 전쟁은 인류 역사 끝날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앞으로 이 전쟁은 이란, 튀르키예, 러시아가 합세하는 더 큰 전쟁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7년 평화조약을 맺게 할 그날까지 이 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주 완강하게 나오기 때문에, 생사를 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나오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의 기초를 놓다가 중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을 중단한 채 1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16년 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들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바벨론에서 가지고 온 돈을 가지고, 자기들이 살 집을 건축하고, 그 주변에 있는 땅을 사기도 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일구면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살았던 삶이 이해가 됩니다. 성전을 지을 수가 없으니 우선 자기 집을 짓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 너희가 지금 살고 있는 그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삶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서의 삶을 목적 삼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학개, 스가랴 선지자
이럴 때 일어난 선지자가 바로 학개, 스가랴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학개서 1:3-6절입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찌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은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같이 되느니라.”
이런 삶은 너희가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을 목적 삼고 살아온 삶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것보다 더 힘든 삶이 있겠습니까? 너희가 많은 소출을 거두기 위하여 넓은 밭에 씨를 많이 뿌릴지라도 거둬들이는 소출은 적을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음식을 먹으며 살아도 배부르게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술을 마실 수는 있지만 흡족하게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옷을 사 입기는 하지만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그런 옷은 사 입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월급을 받아도 마치 구멍 뚫린 주머니에 넣음과 같이 돈을 모으지는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1:8절입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면서 성전 건축을 독려합니다.
그러면 지난 16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의 끈질긴 방해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성전을 계속 지었더라면 사마리아 사람들과 전쟁을 해야 했을 것이고, 자신들은 그 전쟁에서 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피하려고 성전 건축을 중단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학개, 스가랴 선지자가 전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보다 먼저 성전을 건축하고, 그 건축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전해 준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용기를 얻어, 중단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건축된 성전이 바로, 우리가 제 2 성전이라고 부르는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하며 아주 초라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소수의 사람들이 희생하고 헌신하여 지은 성전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을 짓고,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사람들보다 가난하게 살았고, 힘겹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선지자들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험에 빠졌습니다.
2. 옐로카드를 제시하신 하나님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다시 보내주신 선지자가 바로 말라기입니다.
하나님은 말라기라는 한 무명의 설교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고 옐로카드를 제시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옐로카드를 제시하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 감사를 잊은 마음에 옐로카드를 제시하셨습니다.
감사는 성도 됨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평 불만하며 살아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성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택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일이 잘될 때뿐 아니라 그 하는 일이 잘되지 않을 때도, 건강할 때뿐 아니라 건강을 잃게 되었을 때도, 자신에게 믿음을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삶을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는 원인이 되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살아가게 하는 대상이 되시는 분이십니까?
범사를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과 매사에 불평불만 하며 사는 사람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5: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인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인가? 하는 차이가 감사하는 삶과 불평하는 삶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사람들, 육신에 속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삶이 어려워지고, 건강이 나빠지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그 영이 거듭나 영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삶이 어려워지고, 건강이 나빠질 때 오히려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예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에게 10가지 재앙을 행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홍해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군사들에게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을 지새우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광야 생활에서는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대다수는 40년 광야 생활 동안, ‘목이 마르다고 원망하고, 배가 고프다고 원망하고, 매일 똑같은 음식 먹는 것이 지겹다고 원망하고, 삶이 조금만 불편해지고 힘들어 지면’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들, 그 육체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목마르다고 원망하고, 육체가 배고프다고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고, 그 영이 거듭나 영에 속하여 산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삶에 어떤 난관을 만나고, 어떤 어려움을 당하여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삶에 어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주옥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홍해 바다 앞에서 모세가 한 믿음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할렐루야!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여호수아 갈렙이 한 믿음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민수기 14:7-9)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그런가 하면 내가 살아 있고, 육체로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무엇이라 했습니까?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또 내가 살아 있고, 육체로 살았던 10명의 정탐 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온 회중이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범사를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고, 어떤 사람들이 불평 불만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차이가, 감사하는 삶을 살게도 하고, 불평 불만하는 삶을 살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거듭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영이 살아난 사람들은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고, 믿음이 없어서 그 영이 거듭나지 못하여서 여전히 육체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신앙은 불평 불만하며 살게 하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있는 신앙은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진 성도들입니까?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덧입고, 그 영이 거듭나서 영에 속한 성도가 되어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내가 살아 있는 성도, 육체로 살고 있는 성도가 되어서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입니까?
말라기는 왜 사람들이 선지자를 불신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험에 빠졌다고 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어려움만 찾아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신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리고 감격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생각은 부정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입에서는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신앙이 병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바로 감사를 잊은 삶입니다.
신앙이 병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그 첫 번째 증상은 바로, 자신을 택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두 번째 증상은 조그마한 일도 참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첫 번째 옐로카드가 무엇입니까? 창세 전에 자신들을 택해 주시고, 때를 따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옐로카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창세 전에 나를 택해 주시고 예정해 주시고 선택해 주시고, 때를 따라 불러주시고,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해 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데살로니가 5:18절에서는 이렇게 범사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 하나님이 말라기를 통해 옐로카드를 제시하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둘째, 믿음 없음에 옐로카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남녀가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합니까?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라서 사랑합니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나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고 상호 존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서 사랑합니까? 사랑은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눈이 높고 기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기대치를 낮추면 결혼하기가 훨씬 쉬워 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상적인 삶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눈이 높습니다. 이 높은 눈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면 결혼이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청년들이 이 높은 눈 때문에 결혼이 늦어집니다.
사랑은 우리 기대치대로 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갖추고 있어서 사랑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믑니다. 상대방에게 비록 약점이 있고, 단점도 있지만, 그 약점과 단점을 내가 수용해 줄 수 있을 때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얼굴이 좀 못생긴 것도 내가 수용할 수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학벌이 좀 부족한 것도 내가 수용할 수 있을 때는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건강이 좀 나쁜 것도, 가진 재산이 없는 것도, 내가 수용할 수 있으면 문제가 안 됩니다. 심지어 성격이 좀 모가 나도 그것을 내가 수용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소원들을 다 들어주셔서 평안하고 은혜가 충만하고, 감사와 감격 속에 살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상황이 나빠지거나, 삶은 어려워지거나, 고난의 날이 다가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 인생에 어떤 어려움과 좌절이 찾아올지라도 그 주어진 상황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요한 1서 4:10 절을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심지어 ‘이제 나는 망했다,’ 고 생각되는 상황이 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욥을 보십시오
욥은 그 삶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욥기 1:20-22절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시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하박국을 보십시오.
하박국은 전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태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하박국서 3:17-18절입니다. “비록 지금은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할렐루야!
정리해 보면,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상황과 그 어떤 환경을 만나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고 신실한 믿음을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선지자들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험에 빠졌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복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말라기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말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조그마한 어려움이 그 삶에 찾아오면, 곧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불신앙을 들어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야곱은 그가 노년에 고백한 것처럼 ‘일평생 험악한 세월을 보내며 살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그 형에서가 아닌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그 삶에 함께해 주신 하나님을 믿는 마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백성으로 택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세상 만민 가운데서 특별히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구원해 주셔서, 다시 그 고국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자신들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해 주셨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까?
우리가 바벨론에서 살 때 지금보다 더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믿음으로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보다 더 못살도록 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받으며 사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하시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를 사랑하신 구체적인 증거를 대 보시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을 잃으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됩니다.
믿음을 잃으면 우리 신앙은 형식화되고 율법주의화 되어 갑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으나, 우리 마음속에서는 감동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웠던 우리의 가슴이 얼음장처럼 냉냉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덤덤하고, 주를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적으로 습관적으로 주를 섬기고 예배드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믿음으로 건축하였습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이 전해 준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굳게 믿고, 힘겹게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으나 현실은 나아지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심하고 불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단기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모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를 믿는 우리들 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더 잘 되고, 더 잘 사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기간의 삶을 보지 않고, 일생의 삶을 비교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라기서 1:3절 말씀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전에 너희 조상 야곱과 그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목축업을 하며 살 때에, 에서는 이미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견고한 산성을 의지하여, 영원히 번영을 누릴 것처럼 살고 있지 않았느냐? 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하냐? 는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그 흔적을 찾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다시 옛고향 땅으로 돌아와서, 너희 옛 조상들이 누리며 살았던 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셔서 너희는 지금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고 있고, 에서는 미워하셔서 그의 산들을 황무하게 하셨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이셔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또 너희가 범죄 함으로 하나님이 너희를 바벨론의 손에 붙이셔서 전쟁포로로 끌려갔었지만, 하나님이 고레스에게 칙령을 내리게 하셔서 너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옛 기업을 회복해 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를 멸망시킨 그 강대한 나라 바벨론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강한 나라였지만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메데 바사 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간단합니다.
잠시 잠깐 볼 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더 번창하는 것 같고 더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그런 사람들은 다 망하고 멸망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망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단기적인 삶만 보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이 믿어 집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한 성도들은 오늘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연조가 짧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도 그렇게 실감 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확실한 믿음, 견고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님이 말라기를 통해 옐로카드를 제시하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셋째, 거룩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음에 옐로카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그 살아가는 삶을 보면 세상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신들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제나 사랑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완공하고, 그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제 삶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의식화되고, 형식화되어 갔습니다.
예배에 감격이 없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신앙이 없는 가나안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결혼했습니다. 하나님이 레위인의 기업으로 구별해 두신 십일조 드리는 것을 무시했습니다.
또 이들은 제물을 드릴 때 온전하고 흠 없는 제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즉 ‘병든 것, 저는 것, 눈먼 것들’을 제물로 삼아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말라기 1:6-8절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만 바랐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사람들이 복 받기를 바란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삶을 살며,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품고 있거나, 이기심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함께 해 주지 않으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비전과 어떤 꿈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영적으로 너무 큰 은혜를 많이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런 자신에게 영적 만족을 주는 영성 있는 교회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자신은 너무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영적으로 특별한 능력이 있는 교회에서만 만족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몇 개월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옮겨가고, 그곳에서도 몇 개월 다니지 못하고 또 다른 교회로 옮겨 다닌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어서 그 사람의 집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활이 엉망이었습니다. 집안에는 여기저기 물건을 쌓아 놓아서, 지나갈 자리,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생활도 얼마나 규모가 없었든지, 평일은 고사하고 주일날인데도 늦잠을 자느라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종종 인터넷으로 예배드린다고 했습니다. 그 자랑하는 영성은 어디 간 것입니까? 영성과 생활은 따로따로인 것입니까?
말라기서를 받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경고하심을 받고 성전 건축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성전만 완성되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복, 물질적 복을 내려 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완공한 후 많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질적인 복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면서 불평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너희의 ‘형식적인 예배와, 이방인과의 잡혼, 십일조를 무시하는 태도, 사회적인 불의’ 등과 같은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주시지 못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만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믿음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보시고, 우리의 생각도 보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함께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교회와 같이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그 결과 신앙의 신실 성은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이단이 발붙이지 못하게는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변질되어 가는 것은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강조해 온 만큼 생활을 강조하지는 못해왔습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독재 정부가 들어서도 침묵하고, 온 국민이 로또 열풍에 사로잡혀도 침묵하고, 경제적인 불균형이 도를 넘게 되어도 침묵해 왔습니다.
이런 분위가 속에 탄생한 것이 한국의 대형 교회들입니다.
대형 교회의 장점도 많이 있지만, 큰 약점은 생활이 없는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당에 있는 A 교회에서는 여기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서 다른 교회 성도들이 자기 교회로 오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도 충성하고 봉사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봉사할 수 있는 다른 교회를 찾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앙보다는 실천적인 삶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우리는 진보적인 교회라고 합니다. 진보적인 교회에서는 사회봉사나 사랑의 실천 등과 같은 실천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제가 과거에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와 연관이 있는 지체 장애인 시설에서는, 일년에 한 번 드림 랜드로 야유회를 갔습니다. 현장에 가서 보니 봉사하러 나온 청년들이 많이 있었는데 거의 다 한신대 신학생들이었습니다. 이 학생들은 봉사하고 섬기는 실천적인 삶에는 열심이었으나 신앙은 등한시하였습니다. 이들은 신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시간이 나면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가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한신대는 어떤 학교입니까?
한신 대에서는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목까지 잠기는 물가로 걸어서 홍해를 건넜다고 생각합니다. 한신대에서는 이렇게 성경을 우리와 다르게 봅니다. 성경의 기록들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한신대 출신으로 성공적인 목회를 했다고 보는 분이 바로 이중표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한신대 출신이지만 실상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입니다. 이분은 우리가 잘 아는 별세의 신앙이라는 책을 쓴 분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신앙을 버려야 합니까? 아니면 정통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 실천적인 삶을 버려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앙도 중요하고 삶도 중요합니다. 신앙과 삶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신앙만 있고 삶이 없다든지, 실천적인 삶은 있는데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번째 옐로카드를 제시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잘못되어 있고, 그 살아가는 삶도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삶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참믿음으로 돌아오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새겨듣고, 신앙과 삶이 균형 잡혀 있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이 말라기서를 통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감사를 잊은 마음에, 믿음 없는 마음에, 거룩함이 없는 그 삶에, 옐로카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 마음을, 우리 중심을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앞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견고한 신앙을 가질 뿐 아니라, 비록 그 살아가는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균형 잡힌 신앙, 성숙한 영성을 가진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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