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표
다니엘서 9:24-27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또 하나님이 마치실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이 정해 두신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진행되어 나갈 것입니다.
사람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정치인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철저히 주관하고 통제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지난 수천 년을 지나온 인류 역사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 가실 것인지를 미리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역사의 시간표를 알고, 그 시간표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참 지혜일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주식 투자를 많이 합니다.
처음 주식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투자에 실패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식 투자를 오래 해온 전문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유망한 주식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그 주식을 많이 사 놓았다가, 주식시장이 활황기를 맞이하게 되면 그 주식을 내다 팝니다. 그래서 많은 차익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주식 투자에 실패하는 초보자들은 다릅니다.
어떤 주식이 사람들의 관심 종목이 되어서 올라가고 있을 때 그 주식을 삽니다. 그리고는 ‘더 오르겠지, 좀 더 오르면 팔아야지’라는 생각으로 기다리다가, 주식 팔 타이밍을 놓쳐서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주식 투자에도 이렇게 주식을 사야 할 때가 있고 팔아야 할 때가 있듯이, 이 세상 역사에도 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알고 그 때와 시기에 맞는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큰 성공을 이루는 사람이겠습니까? 때를 알고 시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이며, 이런 사람들이 큰 성공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개화기에 큰 부자가 된 사람들, 또 산업화의 시기에 대기업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다 때를 알고 시대를 알고 민첩하게 대처했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경우에도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성도는 그때를 알고 그 시대를 알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이 어떤 때인지,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알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를 알려고 하면, 하나님이 정해 두신 역사의 시간표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 정해 두신 역사의 시간표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두신 역사의 시간표를 알아야 우리는 거기에 맞게 지혜롭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는, 오늘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 역사의 시간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정해 두신 역사의 시간표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보여주신 역사의 시간표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여주신 역사의 시간표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정해 놓으신 시간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정해 놓으신 역사의 시간표는 다니엘서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9:24 절입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을 보면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이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네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또 “네 거룩한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성이었던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여”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일흔 이레는 얼마의 기간을 말합니까?
한 이레는 7년입니다. 그러므로 일흔 이레는 70×7을 하면 490년이 됩니다. 이 490년이 지나면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성경에 예언되어 온 ‘환상과 예언’이 다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 역사가 끝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칠십 이레라는 시간을 정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칠십 이레 즉 490년이 지나면 인류 역사는 끝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490년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표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니엘서 9:25-2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 두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25절 말씀을 보면 그 칠십 이레의 출발점이 언제라고 합니까?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정해 두신 시간 즉 칠십 이레의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칠십 이레는 일곱이레(7)와, 예순두(62) 이레와, 한 이레(1)로 나누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후에, 일곱 이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즉 (7×7=49) 49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 성이 중건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시 예순두 이레 (62×7=434) 즉 434년이 지나가게 되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 이레와 육십두 이레 즉 육십구 이레(483년)가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육십구 이레가 지나고 나면, 이제 칠십 이레 중에 마지막 한 이레(7년)만 남아 있게 됩니다. 이 한 이레만 지나가면 인류 역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그런데 26절 말씀을 보면 이 한 이레는 얼마의 시간이 흘러간 후인 ‘장차’ 어느 시간에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라는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한 왕은 적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또 그때에는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27절 말씀을 보면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맺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적 그리스도가 이때까지 중동 지방에서 계속되고 있던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 전쟁에 개입하여서 이스라엘과 아랍인들 사이에 ‘한 이레 동안의 언약’ 즉 ‘7년 평화 조약을 맺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적 그리스도는 평화 조약을 맺은 후 3년 반이 지나갈 때 그 본색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어떻게 본색을 드러낸다고 합니까?
이레의 중간쯤에 적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 각종 신들의 우상을 세워놓고 성전을 우상을 섬기고 경배하는 장소로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일은 세상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이 적 그리스도는 성전을 차지하고 앉아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길 것을 강요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경배하는 백성이 되었다는 표시로 666이라는 짐승의 표를 받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이때는 하나님의 인을 맞고 사명을 받은 144.000명의 사람들이, 둘씩 두 증인으로 온 세상을 다니면서 예언자적인 사명을 수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이때는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이 쏟아지는 때입니다. 우리는 이때를 7년대 환난의 때라고 합니다. 이 7년 동안 세상에 임하게 될 환난은,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전무후무한 환난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7년의 환난 끝에 예수님은 재림하시고,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하고, 인류 역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위한 개략적인 하나님의 시간표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정해 놓으신 칠십 이레의 시작점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을 내릴 때”라고 합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칠십 이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일곱 이레와 예순 두 이레가 지난 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사건에서부터 인류 역사를 역추적해 들어가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을 언제 누가 내렸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 이렇게 역사를 역추적해 들어가 보겠습니다.
역사는 어떻게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어졌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탄생 전과 예수님의 탄생 후로 나누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의 기준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유대인의 나이로 30세에 세례를 받으시고, 3년 반 혹은 4년 동안 천국 복음을 전하시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에서 30세에 세례를 받으신 것과 그 사역하신 3년 반 혹은 4년을 더하게 되면 34년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으로 기원후 34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은 언제 내려졌다고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육십구 이레 전이니까? 69×7 하면 483년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483년 전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주후 34년 경이니, 483년에서 34년을 빼면 기원전 449년이 나옵니다. 이런 계산을 통해 기원전 449년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여기에 딱 맞는 사건이 없습니다.
예루살렘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고레스 왕 원년인 주전 536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두 번째는 아하수에로 왕과 유대인이었던 에스더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닥사스다 왕 7년인 주전 457년에 새로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물을 드리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세 번째는 이 아닥사스다 왕 20년인 445년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은 아닥사스다 왕이 기원전 445년에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역사를 역추적해 보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이 명령은 449년에 내려졌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 역사의 기록과 다니엘서의 말씀 사이에는 약 4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4년의 차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 4년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기점으로 주전과 주후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전과 주후를 나눈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후대 사람들이 ‘아마 예수님이 이때쯤 탄생하셨을 것이다.’라고 가정하여 정한 시간입니다.
당시 연대를 정하는데 참여했던 사람들은, 유대인의 연대 계산법과 헬라 인의 연대 계산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년의 차이가 나게 되었다는 것을 후대 학자들이 알아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해가 주전 4년이라는 것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보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첫째 근거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이, 주전 37년에 왕이 되어서 주전 4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4년 전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죽이려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주전 4년경에 탄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 근거는,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기 시작할 때가 디베랴 황제 15년경인데, 이 디베랴 황제는 주후 12년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디베랴가 황제가 된 주후 12년과 디베랴가 황제로 재임하고 있던 15년을 더하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해는 주후 27년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해는 주후 27년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님은 언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합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의 나이로 30세에, 헬라인의 나이로 보면 31세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세례받은 날짜가 주후 27년 되는데, 예수님은 헬라인의 나이로 31세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서도 4년의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일을 주전 4년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인류 역사는 4년을 앞으로 이동해 가야 그 연대가 정확해집니다.
지금이 주후 2025년입니다. 이 연대를 4년 앞으로 보내면 지금은 주후 2029년이 됩니다. 이것이 정확한 연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라고 했던 아닥사스다 왕 20년은 주전 445년이 아니고 주전 449년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속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연대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연대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주신 시간표대로,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483년이 지난 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말씀해 주신 유대인의 시간표 육십구 이레가 끝이 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유대인을 위해 정해 두신 역사의 시간표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하나님이 이방교회를 위해 정해 놓으신 시간이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교회를 위해 정해 놓으신 시간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방교회를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위해 정해 놓으신 시간표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정해주신 육십구 이레 끝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시작된 교회 시대가 바로 하나님이 이방인을 위해 정해 놓으신 역사의 시간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을 참 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 비유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 감람나무 가지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꺾으시고 그 꺾인 가지에 돌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을 접붙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방인들이 참 감람나무의 진액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교회로 넘어간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방교회의 시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방인들이 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표를 다니엘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위해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표를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바울은 누구입니까?
바울은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율법 학자 중 하나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바울은 구약성경을 통달하였던 율법 학자였습니다. 당시 바울만큼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울에게 이스라엘을 위해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 육십구 이레와, 장차 이루어질 한 이레 사이에, 이방인들을 위해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이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해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 섭리하심을 깨닫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로마서 11:33, 36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이방 교회를 위해 정해 놓으신 이방교회의 시간은, 유대인에게 남아 있는 한 이레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게 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 후에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가 다시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었던 다니엘에게는 유대인의 때 육십구 이레가 지나고 난 후에, 장차 한 이레가 또다시 올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었던 다니엘에게는 이방인의 시간표에 대해서는 알려 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시간대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라는 말로 이방인의 시간표를 건너뛰어서 유대인을 위해 남아 있는 한 이레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며 또 이방인의 사도였던 사도바울에게는 달랐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말씀하셨던 육십구 이레와, 장차 있게 될 한 이레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이방인의 때에 대한 하나님의 시간표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시간표를 하나로 결합해 보면, 인류의 구원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정확한 구원의 시간표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알려고 하면, 우리는 다니엘서와 로마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유대인의 때와 이방인의 때가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 살펴볼 것은, 유대인의 시간이 이방인의 시간으로 바뀌게 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심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유대인들이 고난받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부인하고, 거부하고, 대적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이방 교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때가 된 것입니다.
이 전환기를 사도바울은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 감람나무인 유대인을 택하셔서 이 땅에 심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셨는데 거부하고 부인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부인하였습니까?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개념은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실 메시아는 왕의 권세를 가지신 영광의 메시아로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림의 주로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영광의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심으로 죄에서 인류를 구원해 주시는 고난받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왕권을 가지신 영광의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인류의 구세주는 이 땅에 두 번 오시는데, 초림 때는 고난의 메시아로 오시고, 재림 때는 영광의 메시아로 오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오시지 않고, 고난받는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에 믿지 않고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재림의 때에는 영광의 메시아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 즉 참 감람나무 가지는 잘려 나가게 되고, 그 잘려 나간 참 감람나무에 전에는 하나님의 구원밖에 있었던 돌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이방인의 때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의 주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넘어짐으로 이스라엘의 때가 끝이 나고 이방인의 때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기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악하게 되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시대가 바로 이 이방인의 때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수십억 명의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아주 적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민족 종교인 유대교를 믿으면서 영광의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번째 살펴볼 것은, 이방인의 시간이 유대인의 시간으로 바뀌게 되는 사건입니다.
다니엘서 9:26절입니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장차 등장하는 한 왕 즉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이방인의 시간이 유대인의 시간으로 바뀌는 중요한 징조라고 합니다.
다니엘서 9:27절입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맺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적 그리스도는 이때까지 중동 지방에서 계속되고 있던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 전쟁에 개입하여서 이스라엘과 아랍인들 사이에 ‘한 이레 동안의 언약’ 즉 7년 평화 조약을 맺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이방인의 시간이 유대인의 시간으로 바뀌는 중요한 징조라고 합니다.
로마서 11:25-26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 받게 되는 것도 이방인의 시간이 유대인의 시간으로 바뀌는 중요한 징조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방인의 시간이 끝이 나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이스라엘의 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살펴볼 것은, 이 하나님의 시간표를 잘 보여주고 있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잘 보여주고 있는 비유의 말씀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4:32-34절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마가복음 11장을 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먹을 것이 있나 보시려고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직 무화과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라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예수님의 저주대로 그 나무는 말라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무화과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라면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죽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그냥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제 이스라엘의 때가 지나고 이방인의 때가 올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4:3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무화과나무로 비유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이 말씀은 무화과나무로 상징되고 있는 이스라엘이, 전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던 그 이스라엘이, 다시 한 독립 국가로 회복되는 것을 보게 되거든, 너희는 인자가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회복되는 것을 목도 한 그 세대 사람들이 다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은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약 2,000년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던 이스라엘이 언제 다시 독립을 했습니까? 1948년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을 본 그 세대 사람들이 다 죽기 전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섯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입니다.
전에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장림과 그를 따르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야단법석을 떨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4:32-34절 말씀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어떻게 잘못 이해했습니까?
사람들은 한 세대를 20년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30년이나 50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세대를 50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하였으니 여기에 50을 더하면 1998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환난 전 휴거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1998년에서 7년대 환난 기를 빼니 1992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992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던 7대 절기 중에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절기가 바로 나팔 절입니다. 이 나팔 절은 가을에 있었던 절기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짜를 10월 28일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한 세대는 50년이 아니고 120년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 이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수가 120년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6: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렇다고 1948 + 120 하면 2068년이 되는데 이 2068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도 맞고 저기에서도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6 절입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만약 예수님이 2068년에 오시면 그날과 그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이 말씀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는 그날과 그때를 사람이 알 수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보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심판은 2068년 전 어느 날에 이루어지겠지만, 그 이루어지는 날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성부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 말씀들을 통해 그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그날이 우리 앞에 아주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살펴볼 것은,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종말의 날이 아주 가까이 이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날과 그때가 언제일까? 라고 하며 날짜 계산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산한 날짜에 매여 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그날과 그 시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입니다. 종말 시대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은 우리 자신이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살아가는 삶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과 그 주신 약속의 말씀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현재 살아가고 있는 그 삶에 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 말씀과 같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슨 일을 하여서 돈을 벌까?’ 하는데 모든 관심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의 날이 가까이 임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의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때에도 땅의 상인들이 무엇을 위해 울고 애통했다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18:11절입니다.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종말의 심판 때문에 슬퍼한 것이 아니라, 그 심판으로 인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물건을 살 사람이 없어진 것을 보고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종말의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날이 어떤 날인지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생소하고 낯설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날을 무시하고, 그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종말의 날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얼마나 의식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가 땅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우리가 오락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그렇게 세상 종말과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말로만 ‘지금은 종말의 때야,’ ‘지금은 종말이 가까운 시대야’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종말 신앙도, 재림의 주로 오실 예수님도, 그 예수님이 가지고 오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성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직 땅의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종말 신앙은 종말에 대한 설교를 한번 들었다고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규칙적으로 밥을 먹고 있듯이, 그렇게 매일, 매 순간, 종말에 대한 말씀을 읽고, 듣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에서도 종말에 대한 부단한 가르침을 해야 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초림의 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처럼, 재림의 주로 오실 예수님도 우리와 친숙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유대인들이 고난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고 거부하였듯이, 신약의 교회도 재림의 주로 오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재림신앙은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이 재림신앙에 친숙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언제까지 가르쳐야 합니까?
재림신앙이 더 이상 이상한 신학을 가진 사람들과 이단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종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가지고 살아가야 할 신앙이라는 것을 성도들이 알게 믿게 될 때까지, 교회는 계속해서 종말 신앙을 가르치고 묵상하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그날과 그 때에 대해서는 과도한 관심을 갖지 말고, 거기 매여 살지도 말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6-7절입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성경은 왜 이렇게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그날과 그 때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날이 가까웠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는 다릅니다. 마태복음 24:40-41절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까?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웠다고 그 삶을 포기하고, 주님 맞이할 만반의 준비만 하고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이 날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성경은 노아의 때를 보고 교훈을 받으며 살라고 합니다.
노아의 때 멸망 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등 세상일에만 집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았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세상일에도 열심이었지만, 동시에 다가오고 있는 심판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임박한 종말을 앞두고 살아가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일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삶에 충실하는 것 같이, 다시 오실 주님, 재림의 주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재림을 눈앞에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살되,
마태복음 24:42절에서는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45절에서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5:1절 이하에서는 ‘기름과 등’을 준비하고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5:14절 이하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에서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이런 삶들이, 믿음으로 임박한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유대인의 때와 이방인의 때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유대인의 때인 육십구 이레가 끝이 나고, 그 후부터는 이방인의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이방인의 때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다시 유대인에게 남아 있는 한 이레를 향해 인류 역사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바른 믿음의 삶인지 고민하고, 깨닫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장차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게 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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