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영적 갈등
로마서 7:15-25
1.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7장 말씀에는 바울의 영적인 갈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7:21-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신약의 교회시대를 열었던 위대한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닙니까? 바울은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이나 기록하였던 성경 기록자가 아닙니까? 바울은 로마제국 안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던 교회개척 전도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 바울이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합니까? 처절한 영적갈등을 하며 살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성경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믿음이 부족한 우리들이 이렇게 갈등하였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과 같이 위대한 사도가 이런 갈등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우리들만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의 영적 갈등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였습니다.
바울의 영적 갈등을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 믿기 이전의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 믿은 이후의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느 견해가 맞는 것 같습니까? 바울이 구원 받기 이전의 갈등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구원 받은 이후의 갈등으로 보입니까?
2. 로마서 7장의 해석
먼저 로마서 7장 말씀의 해석을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성경 해석방법론 중에 가장 건전한 방법은 바로 문맥 속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맥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볼 때 내가 보고자 하는 그 구절만을 보지 않고, 그 전후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전후문맥 속에서 그 말씀들을 살피게 될 때, 우리는 성경 말씀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로마서 7장은 어떤 문맥 속에 있는 말씀입니까?
로마서의 구조를 보면 크게는 교리부분과 생활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교리 부분은 1-8장까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 7장은 교리 부분에 속해 있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 부분을 보면 정죄와 칭의와 성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죄를 다루고 있는 부분은 로마서 1:18-3:20절까지입니다. 그 결론이 무엇입니까?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칭의를 다루고 있는 부분은 3:21-5장까지입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4: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성화를 다루고 있는 부분은 6-8장까지입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8:29-30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볼 때 로마서 7장 말씀은 어느 부분에 속해 있는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성화 부분에 속해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 7장이 보여주고 있는 바울의 갈등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경험한 영적갈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갈등들을 통해 성화를 이루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바울의 이 갈등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갈등이 아니고,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경험한 갈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맥 속에서 해석해 보니 그 말씀의 의미가 아주 분명하게 이해됩니다.
그런데 왜 일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 왔습니까? 그 이유는 문맥 속에서 이 말씀을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못된 해석에서 이단이 나오고 또 내가 복음이 나오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일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을 문맥 속에서 해석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앞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 사람들과 신앙적인 논쟁을 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설득하고 논쟁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그 시간에 잘못된 신앙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결론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영적 갈등을 로마서의 문맥 속에서 살펴보니 예수 믿기 이전의 갈등이 아니고, 예수 믿고 난 이후에 한 갈등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멘
3. 신앙생활 속에 하게 되는 영적인 갈등
그래서 이제부터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갈등의 문제를 살펴봅니다.
바울이 경험하였던 이 영적 갈등은 바울만의 독특한 경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되는 갈등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경험하게 되는 갈등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을 위한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성화를 위한 갈등입니다.
먼저는, 구원을 위한 갈등을 살펴봅니다.
구원을 위한 갈등의 대표적인 예를 종교개혁자 루터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대학을 다니고 있던 7월의 어느 무더운 날에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소낙비가 와서 둘은 큰 고목나무 아래로 몸을 숨겼습니다. 바로 그 때 하늘에서 번개가 그 고목나무를 내려 쳤고 그 충격에 루터는 땅에 나뒹굴었고 친구는 그 나무 아래에서 죽었습니다.
이 경험은 루터에게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안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은 수도사가 되어 오직 주님만을 섬기며 살겠다는 서원을 하게 됩니다. 루터는 그때 서원한대로 대학을 졸업한 후 수도사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의 확신을 가져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첫째, 루터는 선행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져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나쁜 생각과 나쁜 말과 나쁜 행동을 하지 않고, 가능하면 선한 말을 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선한 삶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그 마음 안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죄의 욕망과 소욕들이 더 많이 일어났습니다. 루터가 죄를 멀리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 마음과 그 생각 속에서는, 마치 물이 끓어오르듯이 죄의 욕망과 소욕들이 올라와서 청년 루터를 좌절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루터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선한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 루터는 성인들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져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인들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하던 루터에게 어느 날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성인들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 비록 사람들에게는 성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모두 다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런 이해는 자신도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성인들이 그 자신의 공로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줄 수는 없다는 이해를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선행구원사상과 공덕구원사상에 회의를 가지게 되면서, 이런 회의는 이제까지 루터를 지탱시켜 주었던 신앙심마저 흔들어놓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루터가 다시 붙든 것은 고해성사였습니다.
셋째, 루터는 고해성사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져 보려고 했습니다.
이후 루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루터는 아주 사소한 죄, 작은 죄까지 모두 다 고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루터의 마음을 짓눌러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죄를 짓고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알지 못해서 회개하지 못한 죄나, 혹은 과거에 지은 죄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고해하지 못한 죄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늘 고해성사하고 살면서도, 고해하지 못한 죄에 대한 염려 때문에 구원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루터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것은,
넷째, 고난과 고행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져 보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루터는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당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앞에는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아주 높은 돌계단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매일 팔꿈치와 무릎으로 이 돌계단을 기어서 오르내리는 고행을 했습니다. 루터는 내리 쪼이는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그 살이 벗겨지고 피가 터져 나오도록 고행을 하였지만 이런 고행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욕망을 없애주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이 돌계단을 기어오르고 있는 루터의 뇌리 속에 로마서 1:17절의 말씀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이 말씀이 그의 마음을 채워오는 그 순간,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영혼의 자유함과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루터는 그 순간 너무 기뻐서 그 하던 고행을 멈추고 일어나서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자신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의 구원경험이었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구원을 위한 갈등 속에서 말씀의 능력,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루터는 나중에 이 당시를 언급하면서 ‘로마서 1:17절의 말씀은 나에게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이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루터가 겪었던 영적인 갈등은 사실 구원을 위한 갈등이었습니다.
루터는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루터는 복음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영적 갈등을 극복하고 구원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겪게 되는 가장 첫 번째 갈등은 구원을 위한 갈등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갈등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또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해 가시는 통로로, 우리들을, 우리 교회를 사용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정리해보면, 루터가 믿음을 가지게 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죄와 죄의 욕망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 심판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로마서 1:17절 말씀을 경험하면서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는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도 있지만, 죄인들을 의롭다 해 주시는 복음의 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이 루터로 하여금 죄인의 두려움,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의 신앙의 삶 속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다음은, 성화를 위한 갈등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로마서 7장을 통해 살펴보게 되는 바울의 갈등은 구원을 위한 갈등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성화를 위한 갈등입니다. 성화는 예수를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첫째, 루터가 경험했던 구원을 위한 영적인 갈등을 경험합니다. 둘째, 바울이 경험했던 성화를 위한 갈등을 경험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럼 왜 모든 성도들에게 성화를 위한 갈등이 일어납니까?
첫째는, 우리 마음의 타락된 본성 때문입니다.
로마서 7:15절의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바울은 예수를 믿은 후 그 마음 안에 치열한 영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적싸움의 현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영적인 싸움은 예수를 믿게 된 모든 신자들에게서 일어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죽은 영혼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 영혼과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육신의 소욕사이에 영적 전쟁이 있게 됩니다. 이런 영적인 갈등은 타락된 우리의 본성 때문에 일어납니다.
둘째, 우리가 불신앙적인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믿음 없는 이 세상과 치루어야 할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영적 전쟁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불을 던지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던져주신 이 불이 어떤 사람에게 붙게 되면, 그 때부터 이 불이 붙은 사람과 이 불이 붙지 않는 세상 사이에는 영적 전쟁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아비와 아들이 다투고, 어미와 딸이 다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족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이 영적 전쟁의 치열함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이 영적인 전쟁은 가족 안에서도 일어나고, 친척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더 잘 믿으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큰 영적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믿음을 가진 우리가 싸우고 이겨나가야 할 영적 전쟁터입니다.
셋째,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이 세상의 신인 사단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이 세상의 신인 사단과 마귀와 귀신들과의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마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대적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상계 3.4동은 특히 이 영적 전쟁이 심한 곳입니다.
오래된 집들이 있는 골목마다 흰 깃대, 붉은 깃대가 세워져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구조 안에는 미신적인 신앙이 편만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곳에 있는 교회들보다 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을 영적 전쟁의 최선봉에 내가 서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각오와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4. 로마서 7장의 사도바울의 갈등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의 약 절반을 기록하였던 성경기록자였습니다.
이방인의 땅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던 교회 개척자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충성스럽게 복음을 증거 하였던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이런 사도바울의 마음 안에 어떤 영적 싸움이 있었다고 합니까?
로마서 7:15절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자신은 선을 행하기 원하나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역사하여서, 자기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죄를 행하며 살게 한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인 싸움이 얼마나 힘이 들었든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탄식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서로 다른 두 본성의 싸움 즉 육체에 속한 죄의 본성과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한 본성 사이에 심각한 영적 싸움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영적인 갈등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이런 영적인 갈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첫째, 갈등의 긍정적인 면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이런 영적 갈등이 올 때, 나만 이상한 일 당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갈등은 생명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 오는 것입니다. 오직 생명이 있는 자들만 이런 갈등을 합니다. 생명이 없는 자, 죽어 있는 자는 이런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갈등이 있다면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갈등 그 자체는 이상한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갈등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 엘리야도 갈등하였고, 신약의 대표적인 사도였던 바울도 갈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영적 갈등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이런 영적 갈등이 있을 때, 사단이 미혹해 온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렇게 갈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다.’라고 하며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런 갈등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런 갈등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비취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빛이 우리 속에 있는 어두움을 드러내자 이런 갈등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부패한 우리 본성이 드러내자 이런 갈등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갈등이 있다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새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 속에 살고 있던 우리의 본성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갈등으로 미혹하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단이 그 어떤 말로 미혹해도 믿음으로 대적하고 이기시길 바랍니다. 아멘.
둘째, 갈등의 부정적인 면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영적 갈등이 올 때 엘리야도 갈등했고, 바울도 갈등했으니 내가 영적으로 갈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 가운데 안주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패배주의적인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패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마귀 사단의 모든 권세를 파괴하시고 무효화시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 우리 신앙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단 마귀와 영적 싸움을 싸워서, 승리를 쟁취해 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싸움을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자로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승리한 그 싸움에 동참하여 열매를 거두면 됩니다. 아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차 대전 때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터트렸습니다. 그 때 일본은 더 이상 버티다가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였다고 일본이 자랑하던 군대와 무기들이 한 순간에 다 없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만주에는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의 최 정예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한국과 대만 등에는 아직도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남아 있던 일본 군인들은 아직도 막강한 화력과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천황이 항복하였기에 연합 군인들은 더 이상 일본군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승리한 군대의 일원으로 나아가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그 권한을 넘겨받으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영적 세력인 사단과 마귀와 귀신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면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사단 마귀와 피 터지는 영적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놓으신 승리를 믿고,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여서 사단 마귀의 무장을 해제시켜나가면 됩니다. 아멘.
이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인 승리하는 신앙,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5. 바울의 영적 갈등을 살피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바울의 영적갈등을 살피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사단 마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사단 마귀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영적인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우리가 사단 마귀와 싸워서 승리를 쟁취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엘리야와 같이 바울과 같이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 영적인 거장들이 영적인 싸움에서 실패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싸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 힘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 영적인 싸움을 이길 힘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갈등들이 찾아올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는 먼저 ‘나는 이 영적 싸움에서 철저히 무능하다.’ ‘나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죄를 이길 힘도 없고, 죄와 맞서 싸워 이길 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로마서 7:15절이 그것을 증거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자기 스스로 힘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 바울의 실재 살았던 삶은 악을 행하며 사는 삶 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면 우리들도 바울처럼 심각한 죄의 파도 속에 침몰되어 가고 있는 우리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악한 영들과 싸워 이겨보려고 하면 우리들도 엘리야 같이 영적 전쟁의 전의를 다 잃어버리고 낙담한 모습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영적 싸움에서 실패한 이유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한 이유는 바로 내가 죄와 싸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7:1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내가, 내가’ 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까? 이런 말씀들은 바울이 스스로 죄와 싸워보려고 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철저한 패배를 맞보지 않았습니까?
그 실패 가운데서 바울이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죄와 싸워 보려고 하다가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이후에, 철저히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한 고백이 25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누리며 사는 승리의 삶을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8: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승리의 간증, 믿음의 간증, 확신의 간증이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도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철저히 자기의 무능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이렇게 나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 안에서 오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한 경험이고, 또 사도바울이 한 경험입니다. 또 이것은 우리들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내게는 능력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경계하기를 ‘자신이 이제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우리 주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 한 주간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모두는 내가 싸워서 이겨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에게 영적싸움에서 승리할 능력과 힘을 주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 마귀와의 영적 싸움까지 이기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