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낙심하지 않았던 이유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11. 6. 15:40

낙심하지 않았던 이유

고후 4:16-18

 

1.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가진 기대와 희망이 삶의 동력이 되어서, 그 주어진 시간들을 낭비하지 않게 하고 또 그 기대와 꿈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며 살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시간의 중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미 없는 일을 하면서 그 인생을 낭비하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벽을 쌓아놓고 사람들과 세상을 피해서 자기만의 세계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성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성실한 사람과 불성실한 사람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 차이점은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성설한 삶을 살게 되지만,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성실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늘 내일에 대한 기대와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가지고 사는 꿈은 이 세상의 것일 수도 있고,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해 주고 있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 내일에 대한 기대화 희망을 갖게 해 주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는 이 믿음 안에서 내일에 대한 기대와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약속해주신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간들을 선용하며, 내가 기대하고 꿈꾸고 있는 것들을 이루고 성취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 어려운 삶의 환경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환경들을 보면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국지적인 작은 분쟁들은 있었어도 큰 전쟁은 없는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화가 자리 잡으면서 안정된 무역 환경이 조성되었고 낮은 유가와 저금리 상태의 지속으로 경기의 호황기를 맞이하며 성장과 번영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 가는 상태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에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2022년도에 들어오면서 전면전의 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유럽 등 여러 국가들이 이 전쟁에 간접 참여하게 되면서 이 전쟁은 현재까지도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전쟁은 에너지와 곡물 가격의 폭등을 가져왔고 원자재 가격을 치솟게 했습니다.

이로 인한 물가의 급등이 가져올 인플레이션을 막아보려고 미국은 급격한 금리인상을 단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고유가, 고금리, 고환율 시대가 되면서 무역수지는 악화되고 주가는 폭락하고 경기까지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부채가 높은 기업들이 도산위기에 처하게 되고, 대출을 받아 주식을 사고 집을 산 사람들의 삶을 어려워지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규아파트 분양시장까지 얼어붙게 만들어서 분양불패신화를 자랑하던 세종시에서도 분양취소 사례가 속출하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전쟁으로 가장 큰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당사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전체주의 국가 사이의 대립구도로 나아가 이제 세계는 진영 간의 군사동맹을 넘어 경제동맹, 이념동맹, 가치동맹으로까지 발전하며 세계를 양분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이 전쟁이 위험함은 똑 같은 모습의 전쟁이 중국과 대만, 북한과 우리 대한민국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관적인 전망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환경들이 이렇게 급변해 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 가고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시대만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아닙니다. 초대교회 시대도 아주 어려웠습니다. 이때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아주 어려웠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배 속에 살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격차가 극에 달했던 시대였으며, 종교적으로는 유대종교와 로마당국에 의해 기독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던 아주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에 헌신하였던 사도바울의 삶은 어떠했다고 합니까? 바울이 살았던 삶의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11:22이하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 보았을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어려운 삶을 넘어서 목숨까지 위험했던 순간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낙심 정도가 아니라 좌절하고 절망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후서 4:16절에서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바울은 전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워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우리와 다른 사람입니까?

바울은 우리와 달린 이 세상사를 초월해서 살 수 있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가진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바울도 먹지 않으며 배고프고, 자지 않으면 졸리고, 여름에는 더워하고 겨울에는 추워하며, 매를 맞으면 아픔을 느끼고 물에 빠지면 죽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또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울 사도로 하여금 그 어려운 삶을 살아오면서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느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사도바울과 그 일행들이 낙심하지 않고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오늘 우리는 그 이유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시작되고 있는 어려운 시대에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들도 바울과 같이 낙심하지 않고 그 모든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성도가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 이런 믿음, 이런 이해력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3. 질그릇에 가진 보배

 

그 대답을 찾아보기 위해서 고린도후서 4:16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 앞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접속사는 사도바울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도록 해 주었던 이유가 그 앞에 있는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기록된 말씀들을 살펴보았더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는 7절의 말씀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바울과 그 일행들이 그 어려운 삶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이들은 그 자신들의 질그릇 안에 보배를 모시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시고 산 보배가 이들로 하여금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과 그 일행들이 그 질그릇 안에 가지고 살았던 보배는 도대체 무엇이었냐? 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 말씀을 보니 그 보배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에 십자가에서 대속의 재물이 되어 죽어주심으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어 지금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게 되면,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그 사람들 안에 들어오시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보배이신 예수님이 질그릇인 사람 안에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질그릇은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으면, 그 담고 있는 예수님의 값어치에 따라 그 질그릇의 가치도 함께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 질그릇과 그 안에 담고 있는 보배가 믿음으로 하나로 연합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들은 그 삶의 환경이 어려워져도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왜요. 보배가 되시는 예수님이 그 삶에 함께 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4. 바울이 낙심하지 않게 해 주었던 세 가지 이유

 

그러면 또 다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질그릇 안에 모시고 살았던 보배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도바울로 하여금 그 어려운 삶의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살도록 해 주었느냐? 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낙심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봅니다.

낙심이라는 단어 카코스절망하다 약해지다 녹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마사스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분해하다. 해체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낙심은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우리의 정신육체까지도 황패하게 하고, 분해하고, 해체하여서, 우리의 삶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낙심이 우리 인생에 미치는 악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아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거듭거듭 강조하시기를 너희는 낙심하지 말라.’ ‘좌절하지 말라’ ‘실망하지 말라’ ‘용기를 잃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낙심이 찾아올 때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들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낙심되려고 하는 마음을 물리 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제부터 남은 시간동안 살펴볼 것은, 바울이 그 질그릇 안에 담고 살았던 보배 되시는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고 어떤 깨달음을 주셨기에 바울은 그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삼고 있는 고린도후서 4:16-18절 말씀에서 세 가지의 깨달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깨달음이 바로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바울은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예수님을 통해, 겉 사람과 속사람을 구분해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겉 사람이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겉 사람을 육체라고하기도 하고, 질그릇이라고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이 겉 사람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사는 그 모든 것들 즉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추구하며 사는 돈과 권력과 명예와 업적 등등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겉 사람의 특징을 날로 후패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파괴되고, 부패하고, 황폐화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 육신적인 생명은 태어나는 그 날부터 계속 죽어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또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추구하며 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 다 쇠하고 없어집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요 법칙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런 것들만 붙잡고 이런 것들에 매달려서 살게 되면, 어느 날 그것들이 나를 떠나게 될 때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겉 사람은 후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권력도 명예도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속사람은 무엇입니까?

속사람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영적인 측면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통해 거듭난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을 속사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속사람을 구약성경의 레브 즉 마음과 일치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속사람에는 영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인식하며 살아가는 인격적인 특성까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하여 가나 우리 속사람 즉 영적인 자아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거듭난 자아는 날마다 새롭게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자아가 매일 매일 새롭게 갱신되어 가는 사람은, 인격이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하고 성화되어 나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날마다 영적으로 새롭게 갱신되고 있습니까?

날마다 그 마음과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해 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믿음 안에서 영적인 갱신이 일어나고 인격적인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목적을 두고 추구하던 일들이 비록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갱신과 인격적인 성장과 성숙이 계속되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일이 뜻대로 잘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꺼꾸러뜨림을 당해도 그 질그릇 안에 거하시는 보배 되신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남을 경험하며 낙심하지 않았다. 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겉 사람이 아니고 속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을 살다가 수명이 다하면 죽게 되는 이 육체가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우리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 수 있어 보입니까?

시편 90편 말씀을 보면 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합니다. 또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마치 화살과 같이 날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런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우리 육체가 쇠잔하고 없어질 때 그 낙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던 전에는 우리가 육신을 위해 살았다면,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속사람 즉 영혼의 문제를 염려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이런 변화된 삶에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육체는 때가 되면 서리를 맞은 풀들처럼, 꽃들처럼 시들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지난 번 철원 고석정 꽃밭에 갔을 때 서리 맞은 꽃밭을 잘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하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 안에서 영혼이 살아난 우리들은 시들어가는 우리 육체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육신이 병들고, 쇠약해지고, 늙어가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업이 실패하고 죽을 날이 가까이와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이런 것들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봄이 되면 그 살아있는 뿌리에서는 새싹이 돋아나지 않습니까? 이렇게 돋아난 새싹들은 뜨거운 여름 햇볕과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 내며 성장하고 성숙해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겉 사람이 받는 아픔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속사람인 영혼은 더욱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되어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신 일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속사람 안에서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이 우리들을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렇게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까? 찬송가 436

 

1.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안에 살리라

 

2.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안에 살리라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안에 살리라

 

3.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도라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안에 살리라

 

4.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따라가리라

나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 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안에 살리라

 

세월이 흘러가면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갑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거듭난 그 속사람 안에서 영생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4) 이 믿음 안에 우리가 낙심하지 않게 되는 첫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아멘.

 

그 두 번째 깨달음이 바로 17절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바울은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당하며 사는 잠깐의 환난과 장차 하늘에서 받게 될 영원한 영광을 구분해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 실패도 없고, 눈물도 없고, 탄식도 없고, 궁핍도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에덴동산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죄와 탐욕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속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고 결핍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도 그 택한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고,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하심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고난은 잠간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누리며 살게 될 천국의 영광은 영원하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게 될 때는 한숨과 탄식과 불만과 원한을 쏟아냅니다.

 

대장동 개발의 핵심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성남 도시개발공사 사업본부장 유한기 씨와 개발 1처장 김문기 씨를 보십시오. 자신들이 실무를 맡았던 대장동 사업의 위법성이 들어나 고발을 당하고 또 경찰의 신문을 받게 되자 어떻게 했습니까? 이 사람들은 그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자신들이 그 모든 죄를 뒤집어써야 할 것 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힘이 없는 자신들이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되자 낙심하여 자살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건들 때문에 참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변호사비 대납 의혹을 처음 제기했던 시민단체 대표 이모 씨도 54살의 나이에 양천구의 한 모텔에서 죽었습니다. 풍문에 의하면 지금 대장동 사건의 키맨을 자처하고 있는 유동규씨도 검찰의 압수수색을 앞두고 또 재판을 받으면서 두 번 자살을 기도한 일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잠간이요 그 이후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가졌더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그다지 크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을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고난은 언제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거 우리 신앙의 선배들처럼 직접적인 핍박이나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들은 자원하여 고난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고난을 자원하여 받고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의 복음전도사역에 동참하므로 전도인의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기도에 동참하므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직장과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 세상 속에 이루어나가기 위해서 믿음이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야기 중에, 신발장사와 우산 장사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짚신을 파는 아들 걱정을 하고, 날이 맑으면 우산 파는 아들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늘 걱정만 하고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잘 보여줍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조사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인은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보다 잘 안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한다고 합니다. 남이 잘 되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축복해 주기 보다는 오히려 배 아파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도하고 도전하기보다는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고 하는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한국인은 그 일은 분명히 자기가 해야 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주기를 바라는 의존적인 성향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서 인내심이 적고 지극히 작은 고난이 닥쳐와도 그 고난을 잘 참아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한국인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장차 하나님이 주실 영광의 기업을 약속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예비 되어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현실이 좀 답답하고 힘들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 당하며 사는 환난은 잠시 잠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믿음 때문에 세상 속에서 환난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이 이런 우리들에게 주시는 큰 기쁨과 감격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고난당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에게 성령을 통해 넘치는 하늘기쁨을 부어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성에서 복음을 전하다 매 맞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 육신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바울은 그 날 밤 감옥 안에서 고통하며 앓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기쁨의 찬양 감사의 찬양을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울의 찬양을 받으시고 응답하시어서 지진으로 옥터를 흔드셨다고 합니다.

 

스데반이 예수의 이름 때문에 동족에게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돌에 맞아 죽을 정도였으니까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스데반은 그 아픔을 인해 고통하면서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인해 그 얼굴이 천사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인격을 인격은 소망을 가져다준다.’라는 해석도 가능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늘의 소망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장하고 성숙해서 성화를 이루어가는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변화된 인격 안에서 장차 누리며 살게 될 하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 하늘 소망이 세상에서 당하며 사는 환난의 경한 것을 이기고 낙심하지 않게 해 주는 두 번째 이유라고 합니다. 아멘.

 

그 세 번째 깨달음이 바로 18절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바울은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예수님을 통해, 삶의 참 목적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을 구분해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이는 것은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것이며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즉 미래에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 눈에는 천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가치 있고 귀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들은 그 수명이 짧습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꽃들을 보십시오. 잠깐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서는 금방 시들어버립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꽃밭이라도 서리가 한번 내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까?

우리를 낙심케 하는 원인이 되는 이 세상의 자랑이나 영광이나 아름다움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하여 세상에서 당하며 사는 고통도 슬픔도 실패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깐의 아픔을 주는 이 세상의 그 무엇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잠시 잠깐 있을 것입니다. 잠깐 후면 그 모든 것이 쇠하여지고 없어질 것들입니다.

 

오히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받고, 그 나라 구성원의 일원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하늘의 복을 영원히 누리며 살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잠깐 있다가 없어지게 될 이 세상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를 낙심하지 않게 해 주는 세 번째 이유라고 합니다. 아멘.

 

이것이 바울이 그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았던 이유들입니다.

바울에게 이런 믿음,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늘 이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믿음, 이런 은혜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낙심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질그릇 안에 참 보배 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 때입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이해를 가지게 됩니까? 겉 사람은 후패하여 질지라도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은 경한 것이고 나중에 천국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이 중한 것임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예수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보이지 않는 천국의 은혜는 영원하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 모두도 우리의 질그릇 안에 모시고 사는 참 보배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늘 영적인 삶을 살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그 어떤 일을 만나든지 무슨 일을 당하든지 확실한 하늘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고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담게 하시고 예수님을 담게 하시고 성령님을 가득 담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들도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낙심하지 않고 늘 믿음 안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에 대한 가르침  (0) 2023.01.08
감사하는 생활  (0) 2022.11.20
성도의 영적 갈등  (0) 2022.06.12
심고 거두는 법칙  (0) 2022.03.13
그리스도를 본받아  (0) 202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