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생활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오늘은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교회만 지켜오고 있는 독특한 전통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왜 미국교회의 전통을 같이 지키고 있습니까?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주로 미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님들을 통해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미국교회의 전통을 함께 지키게 된 것입니다.
신앙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감사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감사의 마음을 한국교회는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을 통해 표현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주일을 교회의 절기로 삼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농촌도 아니고 도시에 있는 우리교회가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감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에서, 우리 신앙에서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추수감사주일을 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할 때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준삼아 평가합니까?
그 생활 속에서 감사하며 사느냐? 불평하며 사느냐? 하는 것을 보고 평가합니다. 사람들의 삶을 보면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비뚤어진 시야를 가지고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그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사람들의 정신건강의 지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감사하는 삶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은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라면, 늘 트집을 잡고, 오해하고, 불평불만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 정신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같습니다.
늘 감사하며 사는 신앙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늘 불평불만을 입에 담고 사는 신앙은 건강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감사하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시편 50:23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말씀을 보면 첫째, 우리가 ‘감사로 제사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감사로 제사 드리며 사는 것이 바로 그 행위를 올바르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이 말씀은 감사하는 삶이 얼마나 귀한 삶이고,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범사를 감사하며 사는 삶보다 더 나은 삶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범사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며, 2022년도 하반기를 마무리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 세상에 있는 나라들 중에서 국가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을 정해 놓고 감사하며 살아온 나라는 오직 미국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국가적으로 감사절까지 정해 놓고 감사하며 살아온 이 미국에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지 250년이 채 되지 않은 이 나라(1776년 독립을 선언함)가 세계역사를 주도해 나가는 패권 국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특별한 자원이나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6.25라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입니다. 그런 우리나라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부와 번영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해 준 미국교회를 따라 감사절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감사절을 정해 놓고 감사하는 한국교회에는 믿음의 복을 주시고, 우리 대한민국에는 경제적 번영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삶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감사하는 생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첫째, 감사는 우리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당황하고 황당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제가 가장 당혹스러워했던 때는 그 상황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상황인데 오히려 불평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을 볼 때였습니다. 그럴 때 제 마음 속에서는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왜 그 사람은 감사해야 할 상황인데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 안에 믿음이 있으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 마음 안에 사랑이 있으면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있으면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다소 불편한 상황, 불만스러운 상황이 다가와도 믿음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마음속에 불평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상황이 좋고 환경이 좋아도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살게 됩니다.
우리의 경험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그 어떤 일이 우리 앞에 다가와도, 그 어떤 어려움이 우리 앞에 다가와도, 그 어떤 문제와 시험거리가 우리 앞에 다가와도, 우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에 원망이 가득 차 있으면,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는 불평불만을 토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에서 우리는 감사도 불평도 사실 우리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그 행위를 보고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마음속에는 미움과 적개심과 심지어 살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실재 삶 속에서 살인을 하지 않으며 세상법정은 죄가 없다고 판결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 멍텅구리)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비록 살인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미워하는 마음을 살인의 시초로 보고 그 미워하는 마음을 이미 살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는 세상과 달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어머니
마음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우산장사와 짚신장사 아들을 둔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이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짚신을 팔 수 없는 아들을 걱정하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우상을 팔 수 없는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만약 이 어머니가 그 반대로 생각하여서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파는 아들을 생각하고, 비가오지 않는 날이면 짚신을 파는 아들을 생각했더라면 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 마음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불평불만 하는 삶을 살게 됩니까? 그 마음 안에 불평불만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감사하는 삶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만약 환경 때문에 감사하고 환경 때문에 불평하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평하며 살아야 할 사람은 아마 욥과 요셉일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 형들의 죄악 된 마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요셉이 고난당하는 어려운 삶을 살아가면서 불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자신을 노예로 판 그 형제들을 향한 원망과 미움 속에서 살았습니까?
또 욥이 애매한 고난을 당하면서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살았습니까?
욥은 하루아침에 자녀와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욥기1:21-22절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또 욥은 건강을 다 잃고 살가죽과 뼈만 남은 몸에 욕창과 헌데까지 생겨나 살이 썩어 들어갔습니다. 그 몸이 얼마나 가려웠든지 기왓장으로 온 몸을 끓었다고 합니다. 당시 욥의 상태가 상상이나 됩니까? 욥의 모습이 얼마나 추했든지 그 아내도 그런 욥을 싫어하여서 ‘당신 구차하게 더 살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아내를 향해 욥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욥기 2:10절입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이런 욥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사하는 삶을 살고 불평하는 삶을 사는 것이 환경 때문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당해도 감사하는 삶을 살고, 그 마음속에 불평하는 마음이 가득차 있는 사람들은 늘 불평불만을 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욥과 욥의 아내의 삶을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의 중요성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 마음과 그 인격이 올바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찾으셔서 그 삶에 함께 해 주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마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일 것입니다. 각종사회단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고 세력을 이루어서 우리나라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미래는 이런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장래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소돔성의 심판을 앞두고 의인 열 사람을 찾으셨던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의인 한 사람이라도 찾게 되면 그 찾으신 의인 한 사람 때문에 우리나라에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나라의 진정한 애국자는 누구입니까?
그 마음이 올바른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올바른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마음이 올바른 사람들은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그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애국자들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 줄 가장 귀한 유산이 무엇이겠습니까?
가문의 명예이겠습니까? 큰 집이겠습니까? 많은 재물이겠습니까?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런 것들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믿음의 부모가 자녀에게 꼭 물려주어야 할 것은 바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부모는 평상시 자녀들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범사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해 주는 것이, 부모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는 어떻게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둘째, 감사는 우리 생각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시편 23:7절 말씀을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의 생각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생각과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아담과 하와를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에덴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 것 같습니까? 저는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어떤 감사를 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하나님을 닮은 존재 인격을 가진 존재로 창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만물들을 아무 대가도 받지 않으시고 다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가 언제 범죄 하게 되었습니까?
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감격하며 사는 날 동안에는 범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범죄는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린 이후에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감사를 잃어버렸겠습니까?
창세기 3장을 보면 하와는 간교한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때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로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단은 뱀을 통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단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유도질문 함으로, 하와로 하여금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로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는 대답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단은 하와의 시선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에 집중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하와는 하나님이 주신 그 많은 나무 열매들을 인해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악과를 집중해서 보던 하와의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지, 그런데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는 왜 저렇게 아름답지, 저 아름다운 과일의 맛은 과연 어떨까? 저 맛 있어보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누가 먹으려고 우리에게는 먹지 말라고 하시지?’ 선악과 먹으면 정말 죽을까?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들이 하와의 마음속에 생겨났습니다.
사단은 하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강력한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립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은 선악과에 무슨 독이 있어서 그것을 먹는 사람들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사단은 ‘네가 믿지 못하면 내가 먼저 먹어서 보여 줄 수도 있다.’라고 하며, ‘나는 전에 선악과 열매를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있다.’라는 거짓말까지 하며 하와를 유혹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사단은 본래부터 거짓의 아비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라는 뱀의 말을 듣고 당황합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 수 있으신가? 만일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있으시면 그 하신 말씀을 어떻게 믿지?’라고 하는 불신과 회의가 일어나서 그 마음이 혼미할 때, 뱀은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더 날립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너희도)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금하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뱀은 선악과를 금지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지혜롭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기심이 너희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하와의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는 산산이 부셔지고, 배신감과 불신이 그 마음을 채워왔습니다. 이 때 하와의 마음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이 때 느끼게 된 배신감은 그 사랑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사단이 던진 이 거짓말에 하와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 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는 이전에도 수없이 선악과를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생각이 그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깨어지고, 의심과 배신감이 그 마음을 채우게 되자, 선악과를 이전과 전혀 달라 보였습니다. ’그 열매가 얼마나 먹음직하게 보이고,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든지, 그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자기도 하나님과 같이 지혜롭게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탐심이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 먹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와의 범죄 사건을 추적하면서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디에 집중하고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의 어떤 면을 보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그 평가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나쁜 면만 집중해서 보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좋은 면을 집중해서 보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의 나쁜 점에 마음을 집중하여 매일 30분씩만 그 생각에 몰두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그 나쁜 생각의 영향을 받아서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니 존경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넘어서서 불신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들이 부모나 아내나 남편의 좋은 점을 하루에 30분 정도라도 집중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의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가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우리 마음속에 부모나 아내나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좋은 면에 시선을 두게 되면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고, 나쁜 면에 시선을 두게 되면 불평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이 어디로 가 있느냐? 에 따라서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욥과 그 아내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욥은 좋은 면에 시선을 두고 살았습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복 주실 때를 기억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아내는 부정적인 현실에 그 시선을 두었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왔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고난을 주실 수 있으신가?’라는 불평하는 생각 원망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범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욥과 그 아내는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공의의 눈으로 우리를 보시면 구원 받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참고 용납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면을 보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면을 보면서 사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 동족 중에서도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밖에 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에게 너희의 기준을 버리고 사람들을 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들도 나와 같이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7절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고 또 하나님의 진리에 이를 수도 없었습니다.
제 경우를 보면 기대를 버리니 있는 모습 그대로 감사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부모 형제 처자를 볼 때 어떤 기준을 설정하고 기대를 가지고 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기준을 버리고 기대를 버리고 보기 시작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볼 때 공부를 좀 더 잘 했으면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생활이 규칙적이고 더 체계적이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좀 더 성실하고 책임성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볼 때 나의 기준을 버리고 기대를 버리고 보면 자녀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큰 사고치지 않고 잘 살아주는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자기주장을 하며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도 나의 기준과 기대를 버리고, 자녀들이 어릴 때 부모된 나에게 주었던 그 기쁨들로 효도는 이미 다 받았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자녀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선택하여 자기 인생을 독립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녀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 어떤 경우를 만나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혹 자녀들이 자기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모의 도움을 구할 때에는 할 수 있는 도움을 주는 부모가 되어 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관계에 다 적용됩니다.
우리 모두는 나의 기준을 버리고 기대를 버리고 부모를 보고, 형제를 보고, 남편과 아내를 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쓸데없는 갈등은 하지 말고, 서로서로 그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는 어떻게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셋째, 감사는 우리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이 믿음에서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비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하와의 삶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좋은 면을 볼 때에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나쁘게 생각하다가 결국 감사를 잃고 범죄 하게 된 것입니다.
감사절을 제정한 미국의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 발견된 신대륙에 목숨을 걸고 이주해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신대륙에 도착해서 그 겨울을 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를 잃은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하나님 나라로 보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혹독한 겨울을 난 후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감자 농사를 지었고 그 해 가을에는 겨울에 먹을 풍성한 열매를 수확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 때 거둔 감자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이 나중에 추수감사절이 된 것입니다.
이 추수감사주일에 우리는 감사하는 삶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감사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고민과 어려움과 갈등들이 있고, 때때로 우리를 아프게 하고 좌절시키고 절망하게 하는 일들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삶에 고통과 아픔이 찾아오고 좌절과 절망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 없는 세상과 같이 좌절하고 절망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이때가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렵지만 믿음으로 결단하고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수없이 많은 약속들을 해주셨습니다.
믿음으로 나아오면 믿음의 역사를 볼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오면 이 믿음은 죄를 이기고 절망을 이기고 좌절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게 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하나님의 약속들 중 하나가 바로 로마서 8: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고통과 좌절과 절망까지도 선을 이루어 가시는 도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내가 너희를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고아는 도와줄 부모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와주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 서게 되면, 이 믿음이 우리에게 모든 환경과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 친구들과 극단적인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욥은 그런 논쟁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욥을 붙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감사도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은 내가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나로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업이 망해도 감사하고, 병들어도 감사하고, 억울한 누명을 써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우리는 믿음으로 감사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우리의 삶에 더 큰 감사가 있게 되고, 감사하는 교회에 더 큰 감사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원리에 대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기 불을 주시고, 그 주신 전기 불에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 아비인 마귀와 같이 불평불만을 토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감사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감사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감사는 마음으로, 생각으로, 믿음으로 하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의 진가는 나타나는 때는 환난의 때이고 고난의 때입니다.
환난의 때가 우리 삶에 찾아올 때, 우리가 가진 믿음이 환난을 인내할 수 있도록 해 주며, 또 믿음이 인내를 통해 인격이 연단을 받게 해 주고, 이렇게 연단을 받으며 새로워진 신앙과 인격이 우리에게 참 소망을 갖게 해 줍니다. 이 소망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의 감사하는 생활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감사하는 삶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고, 우리 생각 속에서 자라고, 결국에는 우리 믿음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가 충만한 믿음의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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