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받은 바디매오
마가복음 10:46-52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입니다. 나아만은 군대장관이라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나병에 걸려 있었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 그 나병을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사렙다의 과부입니다. 사렙다 과부도 3년 반이나 비가 오지 않았던 극한 가뭄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나 그 양식이 떨어지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해 신약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눅 4:25-27)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동안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요지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살았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된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나아만과 사렙다 과부와 같이 이제 막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초신 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 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고 묻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해왔듯이 초신 자 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 된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계속 경험하며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맹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만나 그 눈을 뜨게 된 바디매오가 받은 은혜의 경험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계속 받고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살았던 여리고는 마치 낙원과 같은 곳입니다.
여리고는 기후 조건이 아주 좋아서 각종 나무들이 잘 자랐고 사람들이 살아가기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여리고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리고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극장, 원형극장, 별장, 목욕탕 등등의 사회 기반시설이 아주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또 이 여리고에는 헤롯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으며, 로마의 장군 안토니가 그 애인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애정의 증표로 준 곳일 정도로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 맹인 바디매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0:2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곳에서는 두 맹인이 구걸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아버지 디매오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아들 바디매오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맹인 부자(父子) 거지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사회복지정책이 제도화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 맹인이 스스로 양식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려 받은 재산이 없는 가난한 맹인들은 구걸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의 집은 부자(父子)가 다 맹인이었으니 다른 맹인들보다 훨씬 더 불행하고 더 가난하였을 것입니다. 이들 부자(父子)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앉아서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노력으로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베풀어주는 자비에 의존하여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언제 자비의 손길을 펼쳐 줄지 모르기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오나, 날씨가 추우나 더우나 늘 구걸하러 나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생활을 하며 살았던 바디매오는 자기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디매오였기에 나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려면 이렇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나의 비천함과 불쌍함, 무가치함 등등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자기 인식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약4:4) 또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잠18:12)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보여주는 것도 이것이 아닙니까?
또 나아만이 경험한 것도 이것이 아닙니까?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면서 기대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자기지위에 걸맞게 엘리사 선지자가 친히 나와서 맞아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오지 않고 그 종 게하시를 보내어서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러면 낫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이 말을 들을 때 강한 거부감이 일어났습니다.
이 불편한 마음으로 보니 강폭도 좁고 깨끗하지도 않은 요단강보다 크기도 크고 강폭도 넓고 맑고 깨끗한 다메섹에 있는 강들이 훨씬 나아보였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씻어서 깨끗해진다면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더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라고 하며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지혜로운 종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더 큰일을 행하라 했어도 했을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면 문둥병이 낫는다면 금 100달란트를 요구해도, 40일 금식기도를 요구해도 했을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하면서, 그런데 그런 것에 비하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는 것을 얼마나 쉽습니까?”라고 하면서, 요단강에 몸을 씻어 나병이 낫게 된다면 저 같으면 7번이 아니라 70번 700번 씻으라고 해도 씻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그 종의 말을 듣고 돌이켜 요단강에 한번, 두 번, 일곱 번 몸을 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피부가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첫 번째 요인은 바로 자기의 비천함을 알고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도 겸손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문둥병이라는 불치의 병을 치유 받았던 나아만이나, 맹인으로 살다가 눈을 뜨게 된 바디매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비천함을 알고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초신 자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많이 경험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우리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살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나의 비천함을 알고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달려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둘째,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날도 바디매오는 여느 날처럼 구걸을 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나가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으로 예수님이 지나 가셨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출입하시는 곳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을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장소에는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장소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또 그렇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디매오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다 마치시고 이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그 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디매오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디매오는 맹인이었습니다. 맹인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바디매오가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날도 여느 날과 같이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왁자지껄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나사렛 예수께서 앞을 지나가고 계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일생일대의 최고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는 비록 소경이었지만 귀머거리가 아닌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이것이 바디매오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소경이면서 귀머거리로 태어난 사람을 본 일이 없다. 나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한 본보기를 보았다.’ 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을 보세요. 얼굴이 못생겼으면 마음이 좋거나 혹은 그 머리라도 뛰어납니다. 또 얼굴은 잘 생겼으면 머리가 별로인 것이 보통입니다. 얼굴도 못생기고 머리도 나쁘고 재능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전에 뇌성마비 장애인인 송명희 자매를 교회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제가 장애인 교회에 있을 때 뇌성마비 장애인들과 쉽지는 않았지만 대충 대화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송명희 자매가 하는 말을 그 어머니의 통역 없이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통역을 통해 전해지는 간증은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송명희 자매의 집은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대접도 못 받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번 죽으려고 시도하다가 마음을 바꾸어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찾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송명희 자매가 은혜를 받고 깨닫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앙고백을 담아 시를 썼고, 그 시에 최덕신 선생이 곡을 붙여 “나” 라는 복음 송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가사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우리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비록 그 삶이 가난해도, 부족함이 있어도, 못나고 자랑할 것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이런 것들 외에 하나님이 나에게만 은혜로 선물로 주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남다른 믿음일수도 있고, 영적인 안목일수도 있고, 사명일수도 있고, 그 받은 사랑일수도 있고, 또 학고 부동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신 그 무엇이 있기에 송명희 자매처럼 이미 믿음 안에서 만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만족함 속에서 우리는 송명희 자매와 똑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심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를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공평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아멘.
오늘 말씀을 보면 남다른 고난 속에 살았던 바디매오도 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바디매오는 어떻게 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은혜 받은 바디매오를 생각하노라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절 말씀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언제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오늘이라는 이 날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날이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었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받는 것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내일은 우리들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오늘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은혜를 받고, 오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그 기회가 왔을 때 자기 것으로 잡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내일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다시 초대받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멘.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셋째, 신앙고백을 잘 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그 앞을 자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바디매오가 외친 이 말 속에는 그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신앙이 담겨 있습니까?
바디매오는 자기 자신의 불쌍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 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비천함과 불쌍함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첫 걸음입니다.
또 바디매오는 그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디매오가 고백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야 약속의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 말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약속해 오신 메시야시라고 고백입니다.
또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메시야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 고백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죄에서 구해주실 분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두 가지 구원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35:5절 말씀을 보면 육체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5절 말씀을 보면 죄 사함을 통한 영혼 구원의 약속도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를 만나게 되면 그 모든 삶의 문제가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디매오였기에 예수님께서 지금 가 앞으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당시에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해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세례 요한이 와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친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과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또 사도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기적과 이적을 행해 주심 등등은 모두 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 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신앙고백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무 기뻐하시면서 여러 가지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의심 많은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자 친히 그를 찾아가셔서 ‘그 못자국난 손과 창자국난 허리를 보여주시면서 믿음’을 갖도록 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님이 친히 하늘 보좌에서 내려 오사 다메섹으로 가는 길까지 찾아가셔서 만나주심으로 믿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사람들에게 이 믿음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를 보내주시기도 하시고,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듣게도 하시고, 기도생활과 영적 체험을 통해 이 믿음을 가지게도 해 주십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면 성경은 이 믿음을 정금 같은 믿음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금이 어떤 물질입니까? 금은 변하지 않는 물질입니다.
고대 유물을 탐사하는 고고학자들이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 전 사람들이 쓰던 금관, 금 귀걸이, 금 팔지, 금목걸이 등을 발견한 것을 보면 그것들은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수 백 년 혹은 수천 년이 지나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 귀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또 오늘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이 믿음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넷째, 믿음으로 간청해야 합니다.
믿음이 아무리 귀하다 해도 그 믿음을 그냥 가지고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바디매오와 같이 믿음으로 간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 된 사람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말에 마음이 약해지십니다.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 어떻게 보일까요?
씩씩해 보일까요? 쓸만한 사람으로 보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들은 한 없이 부족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됨으로 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권리와 특권들을 누리며 살지 못하고, 죄가 가져다 준 저주 아래에서 고통하고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응답해 주시고 은혜의 손길을 펼쳐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예를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쳐주신 것을 보십시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한 세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보십시오.
어떤 때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은혜를 베풀어주신 경우도 있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이 바로 그 한 예입니다.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신 경우가 그 한 예이며, 과부가 죽은 외아들을 장사지내려고 가는데 살려주신 경우가 바로 그 한 예입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쌍히 여길 자는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는 분”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 103:13절에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는 분”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마치 부모가 그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죄악 된 세상 속에서 고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그렇게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기도가 그 즉시 응답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거듭 거듭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 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이 바디매오의 애절한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다섯째, 방해요인들은 극복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방해 요인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도 여러 방해요인들이 나타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돌아서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단의 방해 공작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사단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7-8)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방해의 역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들이 막고 제지하고 방해하면 방해할수록 그는 더욱 소리를 높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바디매오와 같은 끈질김이 있어야 합니다. 끈질김이 있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루어냅니다. 끈질기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결국 그 목표를 이루어내고, 끈질기게 도전하는 사람들이 결국 그 도전한 일을 이루어 냅니다. 바디매오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어 달렸습니다. 이 끈질김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바디매오를 안심시키며 “이제 안심하라. 일어나라.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라고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다.”고 합니다.
바디매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벌써 그 마음의 준비가 다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렇게 하겠다고 벌써 그 마음속에 결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면 자꾸 재고 망설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빠져 나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지못해 가면서도 주저주저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아직 그 마음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저주저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 마음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곧 바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움직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들과 아직 준비 되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라.’고 교훈합니다. 너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혼인 잔치에 갔다가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과 같이 되라”(눅12:35이하)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5분 대기조’가 생각납니다.
5분 대기조는 무슨 일이 발생하면 5분 안에 출동할 수 있도록 완전한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는 군인들을 말합니다. 바디매오는 그 모든 방해요인들을 극복해 나갈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자세가 바로 이런 자세입니다. 아멘.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여섯째, 올바른 요구를 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 무엇을 구했습니까?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가장 원하고 있는지,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또 우리가 무슨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지를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바디매오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그냥 응답해 주시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꼭 그의 입으로 구하도록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비디매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 외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멘.
바디매오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을까요?
성경은 여기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바디매오의 마음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가장 큰 아픔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그 눈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생계를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매일 구걸해야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을 도우주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디매오였기 때문에 그는 얼마나 보기를 원했겠습니까? 바디매오는 이 간절한 마음으로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올발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고 그 마음의 선한 소원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바디매오에게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은혜로 그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육신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들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눈을 뜬 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믿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들도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님을 섬기며 따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도 이전과 같이 이 세상을 따르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는 예수님을 따르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 백성 된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듣는 우리 모두는 우리 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을 살고, 우리 안에 오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고, 또 하나님께서 그 백성 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그 살아가는 믿음의 삶 속에 선한 열매들을 많이 맺으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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