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요한복음 3:16
어느 교통사고 이야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시골 2차선 길을 운전해 가다가 교통사고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통사고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일어났고, 두 명의 형제가 사망하게 된 사고였습니다. 교통사고를 낸 그 사람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고, 소식을 듣고 면회 갔던 사람이 전해준 바에 의하면, 그 사람의 모든 생각이 교통사고가 났던 그 현장에 가 있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횡단보도에 신호등만 있었어도 그 사고는 나지 않았을텐데, 그날 그 시간이 초등학교가 파하는 시간만 아니었어도 그 사고는 나지 않았을 텐데, 그날 그 시간에 갑자기 소낙비만 내리지 않았어도 아이들이 그렇게 횡단보도로 뛰어들지 않아서 사고는 나지 않았을 텐데, 그 날 그 횡단보도 바로 전에 주차 되어 있던 화물차가 시야를 가리지만 않았어도 사고는 나지 않았을 텐데, 그 날 그 시간 자기가 가던 길 건너편 차선에 차가 한 대라도 지나가고 있었더라면 그 사고는 나지 않았을 텐데, 그날 자기 차가 그 시간보다 조금 빨리 그곳을 지나갔거나 조금 늦게 지나갔어도 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라고 하면서, 그 날 교통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수 십 가지를 말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수십 가지 조건들이 딱 들어맞아서 그 날 그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 수십 가지 조건 중에 단 한 가지 조건만 달라졌어도 그 날 교통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며 아쉬워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유치장에서 왜 그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 교통사고가 그 사람의 삶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으로 그 사람의 계획과 꿈꿔오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교통사고가 난 것을 아쉬워하고 또 아쉬워하였습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여러분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 그래서 여러분들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 있습니까? 혹시 있다면 그 사건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좀 무겁습니까?
그러면 조금 다르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원수인 사탄 마귀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 그래서 사단 마귀가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해하는 사건은 무엇이겠습니까? 사탄 마귀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사건은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교통사고가 그 사람의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듯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실수로 사단 마귀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인 그 사건이, 온 인류를 죄의 저주 속에 살도록 하려고 했던 사단 마귀의 계획을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지금까지도 그 십자가 사건을 잊지 못해 하며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그 십자가 사건만 아니었으면, 그 십자가 사건만 아니었으면 하며 아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상징이지만, 사단에게는 실패의 상징입니다.
사단에게 십자가는 패배의 자리였고, 그 모든 권세를 다 잃어버린 자리였습니다. 만약 십자가의 실패만 없었더라면 사단은 지금도 아담에게서 취한 만물통치권을 행사하며 이 세상의 신으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 그가 가진 모든 권세와 능력과 다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외형적인 모습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정죄를 받아 돌아가신 십자가는 패배의 자리 실패의 자리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마호메트’나 ‘문선명’ 같은 이단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메시야로서의 사명에 실패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빌라도에 의해 정죄함을 받아 죽으신 그 십자가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대속사역을 완성하신 자리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 찬송가 151장에서는 무엇이라 찬양하고 있습니까?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이 찬송가의 가사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속죄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 대속의 고난을 믿는 믿음이 바로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십자가의 권세
여러분들 중에도 ‘드라큐라’나 ‘오멘’ 같은 공포영화를 보신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 악령이나 사탄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화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런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어서 돈벌이 하려는 사람들이, 어쩌면 자신이 참 알라의 예언자라고 하고, 또 자신이 참 구세주라고 하는 마호메트나 문선명보다 더 지혜로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 사람들은 마호메트나 문선명이 전혀 알지 못하는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을 교주로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이 사람들에게만 숨겨졌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랐던 제자들에게도 한 때는 숨겨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난 후에 비로써 메시야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며 십자가를 부인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은 어떨까요?
이 십자가를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라면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이 십자가신앙 하나만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에게 명하시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귀신에게 명하시자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각종 병자에게 명령하시자 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은 자에게 명령하시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권세를 우리들에게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 조상 아담이 잃어버렸던 만물통치권을 회복해 주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믿음이 있었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사도행전 4:29-30절에서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 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이름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우리에게서도 이런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언제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됩니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십자가는 우리 신앙과 삶의 중심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아는 신앙을 가져야지, 조금 아는 신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제가 조금 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살펴보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이처럼” 이라고 번역된 ‘후토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후토스”는 “이처럼,” “이렇게” “이만큼” 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부모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에게 ‘너 엄마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니’ 라고 물으면, 그 아이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이 만큼’ 사랑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때 그 아이가 사용하고 있는 ‘이만큼’이라는 단어가 바로 ‘후토스’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다시 그 자녀에게 ‘이 만큼이 얼마만큼이데’ 라고 물으면 그 아이는 ‘하늘만큼 땅만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때 아이가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하고 있는 그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것은 그 아이 입장에서 사랑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으로 부모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는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으신 최대한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16절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 3:16절이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은 인간차원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차원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해 불가능한 하나님의 사랑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우리와 존재하는 방식도 다르고, 존재하시는 차원도 다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듯이, 또한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경험하고 조금 체험하여서 알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3: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은 인간의 이해와 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 차원에서 이루어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알게 된다고 한 말씀이 이해가 되시지요. 우리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을 더 산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밖에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해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린도후서 12:4절에는 하나님이 계신 3층천을 경험한 바울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은 하나님이 계시는 3층천에 이끌려 올라가서 인간이 사용하며 사는 언어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말,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그곳에서 영적세계에서 통용되는 하나님 차원의 언어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연설명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계획들을 이 언어를 통해 전달합니다.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언어는 이 세상과 차원이 다른 하나님 나라에서는 의사소통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차원의 의사소통의 도구 즉 영적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층천에서 이 영적인 언어를 들었지만, 그것을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전달하고자 한 말씀의 뜻은 이것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인 바울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 즉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들은 하나님 차원의 그 언어를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창조하여 우리에게 주신 분이시며, 또 하늘의 진리를 이 세상의 언어로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늘의 진리를 이 세상 언어로 기록해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통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으신 최대한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제한을 받고 살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알아도 부분적으로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초월해 계시는 분으로써 그 어떤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전체를 완전히 아십니다.
이런 인간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어떤 기도를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눈을 밝히사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또 성도들이 앞으로 받게 될 기업의 영광과 풍성함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 하신지를 늘 알고자 기도했고 또 성도들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도들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게 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였던 하박국은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하박국은 전쟁으로 집은 파괴되고, 가족은 희생되고, 그 산업은 다 망가진 폐허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하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찌하여 우리보다 더 악한 사람들이 전쟁에게 승리하게 하시며,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도록 내 버려두십니까?’
이런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게 하는 것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워주시기 위한 사랑이 매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을 깨닫게 된 하박국은 그 후 기쁨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혹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해결할 수 없는 가정 문제를 가지고 계신분이 계십니까? 자녀의 장래가 염려되고 걱정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미래가 불투명하여 걱정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혹 이런 분이 계시다면 하박국을 만나주셨던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또 하박국에게 주셨던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약시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도바울의 고백도 살펴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 살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당한 고난에 대해 고린도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창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사도바울이 당한 고난이 어디 이것뿐이었겠습니까?
이렇게 고난당하는 삶을 살았던 사도바울은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바울은 그가 당했던 그 어떤 고난의 삶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신앙과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과 고백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도요한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도 요한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아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온 세계를 전쟁과 핵전쟁의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암울한 소식입니까? 계속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입니까?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경제위기입니까? 아니면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우리 삶의 상황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내어 쫒아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의 모든 두려움을 내어쫒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사랑이 가져다 주는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은혜로운 찬양 중에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를 지으신 분은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입니다. 이 분은 우리보다 약 100년 전에 사신 분으로 1917년에 이 곡을 작시하였습니다.
이 프레드릭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고 목회자가 되어서 시골의 어려운 교회를 담임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작다보니 목회를 통해서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도 하며 또 다른 직업도 가져야 했습니다.
프레드릭 목사님은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공장에서 고된 일을 해야 했습니다.
목회의 소명을 받고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겠다고 목사 안수까지 받은 목사님이, 세상적인 직업을 가지고 힘겹게 목회하며 살아갈 때 그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무척 괴롭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이 목사님이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감사기도를 하고 도시락을 풀었더니, 그 도시락 위에는 사모님이 깨알 같이 써둔 엽서 한 장이 있었습니다. ‘바다가 먹물이요 하늘이 두루마리인들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다 적으리요’라는 시구가 거기 적혀 있었습니다.
프레드릭 목사님은 그 글을 읽으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 감격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지내온 지난날들을 회개하고 있는데, 그 때 갑자기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고 합니다. 그 충만함 속에 쓴 글이 가사가 되고, 목사님의 딸 클로디아 여사가 그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 바로 찬송가 304장이 된 것입니다.
사실 사모님이 엽서에 쓴 그 글은 유래가 깊은 신앙의 글입니다.
찬송가 3절의 가사는 11세기경 유대인에 의해서 기록된 ‘하다무트’라는 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에는 ‘하늘을 양피지로 펼치고, 세상의 모든 갈대와 나뭇가지와 칼이 펜이며, 대양을 모두 잉크로 채우고, 모든 사람이 능숙한 서기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영광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다 적을 수 없으리라.’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를 잘 알고 있던 유대인이 2차 대전 때 독일군에게 잡혀서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그 수용소 벽에 ‘바다가 먹물이요 하늘이 두루마리인들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다 적을 수 있으리’ 라는 신앙고백적인 글을 남겼던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대인 수용소였습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독gas를 마시고 죽고, 또는 살아 있는 채로 생체 시험도구가 되어 죽어갔던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수용소에서 어떻게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그 벽에 적힌 글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2차 대전 때 연합군의 일원으로 독일 전선에 참여하였던 한 미군병사가 발견하여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알려진 그 글을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의 사모님이 보고 엽서에 써서, 힘겹게 일하며 목회하고 있었던 목사님의 도시락 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왜요. 그 남편 되는 목사님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과 같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기와 희망을 갖기 바라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304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1절에서는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인간이 전혀 짐작해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의 차원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은 목회를 통해서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서 세상적인 직업을 함께 가지고 힘겹게 목회하고 있었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이 되면 상황이 완전히 역전될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날이 되면 사람들이 땅위에서 누리던 그 모든 영화들은 쇠하게 될 것이나, 하나님을 믿는 자신은 그 날에 하나님의 큰 사랑 안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위로를 받게 될 것은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하늘의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하늘을 두루마기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의 형편과 조건에 관계없이 영원히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박국 같이, 사도 바울 같이, 사도요한 같이,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 같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글을 남겼던 어떤 유대인 같이, 요한복음 3:16절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저주의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이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볼 때에는 영광의 십자가요, 승리의 십자가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증거 해주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삶은 어떻습니까?
혹시 프레드릭 목사님의 삶과 같이 괴롭고 힘든 삶은 아닙니까? 비록 우리의 삶이 괴롭고 힘든 삶일지라도, 괴롭고 힘든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찬양했던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과 같이, 우리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믿고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십자가 복음의 가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복음의 은혜가 누구에게 임합니까?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씀하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약속을 받은 저를 믿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전합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당신도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모든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전하니까. 예수만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고 전하니까.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복음이라고 생각하여 별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 복음의 가치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 하늘나라에 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 복음의 가치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알고 싶어서 흠모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떤 교회에서 기도하여 앎 병이 나았다고 하면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이 같이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성도들은 그렇게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자신의 전부를 드리신 십자가 복음이, 병을 고치는 것보다,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없는 것으로 봅니까? 그렇지 않으시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앎 병을 고치는 것이 쉽겠습니까? 우리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앎 병을 고치시는 것은 우리가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최고의 희생은 바로 우리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병 고침의 기적을 보고 야단 법석 떠는 사람들을 볼 때 감격하시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복음의 참된 가치를 알고 믿고 감격하는 사람들을 볼 때 더 감격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앞에서 감격하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옳다 인정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 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하나님 차원의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는 초대한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 사랑의 증거가 십자가에 그 아들 예수님을 내어 주시는 사건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하기 힘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명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게 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분신이요 생명 같이 아끼던 그 아들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헌신을 통해서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삭을 향한 사랑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경험하면서, 죄인이 된 자신과 인류를 사랑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셨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사람들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이 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은 없으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결단하고 그 남은 생애를 이 복음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이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복음 보다는 기적을 추구하고, 은사를 추구하고, 뭔가 신비한 것을 쫒아갑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을 아는 우리들은 바울과 같이 오직 십자가만 의지하고 자랑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아는 신앙이 우리 모두의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먼저 부름 받은 우리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십자가 복음 안에서 먼저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을 향해 우리가 가진 십자가 신앙의 산증인이 되라고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개를 키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둑이 오면 짖게 하고 도둑으로부터 그 집을 지키게 하려고 개를 키웁니다. 그런데 도둑이 와도 짖지 않는 개가 있다면 주인이 더 이상 그런 개를 키우겠습니까?
사람들이 시계를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계를 통해서 시간을 알고 시간을 지키는 삶을 살기 위해서 시계를 삽니다. 그런데 시계를 샀는데 시간을 틀리게 알려준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시계를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 사랑 안에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가 받은 그 사랑을 아직 알지 못하는 세상에 전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십자가의 증인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증인으로 불러 주셨음을 믿고, 기회만 있으면 늘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사도행전 1:8절 말씀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 모두는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던 예수님을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예수 이름의 권세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 차원의 놀라우신 사랑을 간직하고, 하박국 같이, 바울과 같이, 사도요한 같이,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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