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변화를 읽으며 살아가는 성도
누가복음 22:31-34
1.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고 누가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자기 인생의 때를 잘 알고 성실하게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이겠고, 자기 인생의 때를 알지 못하고 엉뚱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인생의 때를 잘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 때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알고 있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혼인잔치를 앞두고 지혜롭게 준비하였던 다섯 처녀와 미련하여 준비를 소홀히 했던 다섯 처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중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때를 잘 알고, 그 때에 맞는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지금은 예수님께서 재림이 아주 가까이 이른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을 그 때보다 지금은 훨씬 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이 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지금이 어떤 시대냐?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는 이 시대에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2. 시대 변화를 읽으며 살아가는 성도
오늘날은 예수님의 재림이 이미 문 앞에 이르러 있는 시대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역사의 종말의 날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신앙으로 무장을 하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인식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인식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공장을 세우고, 재물과 부를 늘려 나가는 삶에 전심전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자기 수익을 늘리기 위해 투자하고 사업체를 확장해 나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일에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고 전 삶을 투자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재림하는 그 날은 마치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홍수심판이 시작되어서 비가 내리는 그 때까지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등 세상일에 몰두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홍수심판의 경고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날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도 예수님의 재림은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성실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박에 빠지고 오락에 빠져 살아가고 있고, 성실한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몰두하여 살고 있습니다. 마치 노아의 때 사람들이 ‘사업하고, 집을 짓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등 세상 일만 하고 살았듯이,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재산을 늘리고, 사업체를 확장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등의 일만 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이 세상일에 집착하여 살고 있을 그 때에, 예수님은 마치 밤의 도적같이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도적이 언제 옵니까? 사람들이 다 자고 있을 때, 그래서 물건을 훔쳐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 때에 옵니다. 그 날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종말 시대라는 것을 인식하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재림이 임박한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2장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봅니다.
그러면 오늘은 어떤 시대라고 합니까?
첫째, 시험의 때 혹은 유혹의 때라고 합니다.
22:31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라는 경고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사단은 이런 시몬 베드로까지 채에 놓고 까불고 시험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아주 섭섭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생업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장모가 함께 살았던 가정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전 생애를 다 바쳐서 예수만을 위해서 살아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시고, ‘네가 시험에 들어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나는 절대로 시험에 들거나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장담하던 베드로의 장담대로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그 입술의 침이 마르기도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은 바로 영적 전쟁터입니다.
굶주린 사자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울부짖으며 다니는 것처럼, 사단도 성도들을 미혹하고 시험하기 위하여 날뛰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늘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단은 신앙이 어린 성도들만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오래 된 성도들까지도 시험합니다. 심지어 사단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주의 종들이나, 장로님들, 권사님들까지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를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와 같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셔서 “내가 너의 이 믿음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또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줄 것인데, 네가 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라고 매고 푸는 권세 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베드로는 시험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와 같이 우리들에게도 이런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0:12절입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합니다.
자꾸 맞고 맞다가 보면 나중에는 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권투선수들이 노인성 질환인 치매와 중풍에 걸릴 확률이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권투를 하면서 수도 없이 주먹으로 머리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의 시험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불화살을 한번 두 번은 믿음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화살 공격이 가해지면, 그 가운데 하나에 우리도 맞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단이 쏘아 되는 그 시험의 화살 가운데 하나를 에덴동산의 하와도 맞고 범죄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은 어떤 시대입니까?
시험의 때 혹은 유혹의 때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나의 연약함을 늘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깨어서 사단과 마귀의 시험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늘 은혜 충만한 삶을 구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은혜로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도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아멘.
또 오늘날은 어떤 시대입니까?
둘째, 시험과 유혹을 받아 믿음이 떨어지는 때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22:32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우리가 한번 가지게 된 믿음은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우리 믿음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험에 들고, 또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유혹을 받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과거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던 유일한 제자입니다. 그런데 32절 말씀을 보면 이런 베드로의 믿음도 떨어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전에 내가 가졌던 그 믿음이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내가 가지게 된 그 믿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지금도 전처럼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담대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부 회장을 할 때 추수감사절에 교회 본당 안에서 청년들을 데리고 봉사하다가 A자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을 수도 있었던 사고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의식을 잃고 떨어져서 아무 의식도 없었지만 옆에서 본 청년들이 전해 준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머리부터 떨어지고 있는 저의 오른 손을 펼치도록 하셨고 그 충격으로 오른 손이 골절되었으나 그 손 등위에 제 머리가 떨어져서 죽지 않고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2월 5일 주일 새벽부터 갑자기 그 오른 손이 몹시 아파왔습니다.
그 날은 주찬이가 입대를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6일 오후 2시에 주찬이는 논산 신병훈련소에 입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떠오르게 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하던 일들을 하나님 앞에 고하며 은혜를 구하던 기도를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아픈 손을 들고 느헤미야를 따라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전에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 온지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신 이 손목 기억하시지요. 그때 주께서 제가 드렸던 섬김을 받으셨다면 그 일을 기억하시고 내일 군에 입대하는 우리 집 장남 주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그리고 여러 다른 기도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6일 날 사모와 함께 주찬이를 논산 훈련소에 태워주고 저녁에 집에 돌아왔는데 그렇게 아프던 손이 말끔히 나아 있었습니다. 전혀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 때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어제 내가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려고 내 손목을 아프시게 하셨다는 생각을 하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드린 기도를 들어 주시겠다는 표식이 아니겠습니까? 아멘.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지금 우리의 삶 속에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세상과 죄와 마귀를 이기며 사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세의 중요한 특징은 믿음이 떨어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형식화되어 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부인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전처럼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시대가 이럴지라도 우리들은 이런 시대를 극복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배드리고, 믿음으로 주를 섬기고, 믿음으로 충성하고, 또 믿음으로 헌금하고, 믿음으로 복음 전하고,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충성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늘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큰 믿음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오늘날은 어떤 시대입니까?
셋째, 믿음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때라고 합니다.
22:34절입니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33절에서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베드로의 참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진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생사운명을 같이 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적 싸움은 우리의 각오나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앞에 다가온 영적 싸움의 현장에 직접 서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이 어떻게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매우 섭섭해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영적 싸움의 현장에 직접 서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저도 모르고 여러분도 모릅니다. 그 날이 닥쳐와 봐야 압니다.
베드로의 삶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같이 하겠다고 고백한 불과 몇 시간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심지어는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이 때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베드로는 재정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 나가서 심하게 통곡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정말 믿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 몰라도 나는 끝까지 예수님께 충성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맹세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자신도 죽을까봐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을 부인해 본적은 없습니까?
우리가 목사라고 하면서, 집사라고 하면서, 입술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말 삶 속에서 위급한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사셨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삶을 사셨습니까?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당당하게 담대하게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걱정 근심하며 염려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 예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 성령 하나님의 함께 하시면서 인도하시고 위로하시는 역사를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만약 믿음이 부족하여 입으로는 예수님을 시인하였으나 행위로서는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나의 믿음 없는 것을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만 믿고 살아가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입니다.
이런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주신 은혜가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권세 안에서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는 어떻게 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자신에게는 믿음이 없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이 이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 믿음은 베드로와 같이 믿음 없음을 회개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도 하나님으로부터 이 믿음, 이 은혜, 이 능력을 받아서 주를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리해 봅니다.
오늘날은 어떤 시대입니까? 자타가 공언하고 있듯이 오늘날은 말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이 말세임을 알려주고 있는 중요한 현상이 무엇입니까? 첫째, 말세는 시험과 유혹의 때라는 것입니다. 둘째, 말세는 믿음이 떨어지는 때라는 것입니다. 셋째, 말세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이런 시대 변화 속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첫째,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46절입니다.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베드로는 왜 시험에 들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생활”하는 것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들 중 하나는 깨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깨어 기도하는 생활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면서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시험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험이 와도 시험과 맞설 수 있는 영적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깨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한 신앙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장 힘써야 할 것은 바로 깨어 기도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과거 한국교회의 가장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가 쇠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한국교회는 정말 열심히 기도하던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가 기도에 열심인 교회라는 것은 온 세계 교회들이 알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기도가 건강한 신앙의 바로 미터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살아있는 성도는 신앙이 살아 있는 성도입니다.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지금도 부흥하고 있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그 교회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기도가 살아 있는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교회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기도하는 성도들의 무릎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아는 성도들은 늘 자기 자신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갈 결단을 하고 삽니다. 기도에 대한 이런 결단이 우리 모두의 삶에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을 결단하고 실천할 때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먼저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넘쳐나고, 또 가정은 평안해 지고, 삶의 문제들은 해결되고, 신앙적으로도 성령 충만을 입게 되고, 각종 영적 은사들이 주어집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깨어 기도하면서 유월절을 맞이하였더라면 그렇게 쉽게 시험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험에 빠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될 만한 위대한 신앙고백을 또 한 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시험에 빠져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말세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 또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삶의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35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시되 없었나이다.” 이때는 언제입니까? 이때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때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둘씩 전도여행을 보내셨을 때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말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아무런 준비가 없이 갔습니다. 그런데도 전도여행 중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36절입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전대와 배낭과 칼 등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전에는 준비하지 말고 가라고 하시더니 왜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준비해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시대(時代)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예수님의 인기가 아주 높아서 제자들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어도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사람들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2장 때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임박해 있었던 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신앙을 대하는 사람들의 인심도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너희가 다 준비해서 다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첫째, 말세에는 전대(錢臺)와 배낭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전대는 돈 전(錢)자 주머니 대(臺) 자를 쓴 것을 보면 돈을 넣는 주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배낭은 전도 여행 시 필요한 물건을 넣어 갈 수 있는 가방 같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오늘날과 같은 종이돈이 없었습니다. 주로 돈은 동전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동전을 전대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이 전대 속에 동전만 두둑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날씨가 추워도 배가 고파도 걱정이 없습니다. 전대 안의 동전이 바로 양식이 되고 옷이 되고 잠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에는 전대도 배낭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대와 배낭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제자들이 사역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변화된 시대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전에는 교회 십자가만 걸어 놓아도 교회가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많이 변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개척하고 세워나가기가 아주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바뀐 시대 속에서 개척교회를 해 보니 이 말씀이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도 물질도 필요하고 기타 많은 것들이 필요하더라고요.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무슨 물질이 필요하냐고 할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지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현실을 보십시오.
교회 장소를 구하려면 임대료를 내어야 합니다. 교회를 운영하려면 관리비와 각종 경비가 들어갑니다. 또 목회자와 가족들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는 많은 경비가 들어갑니다. 물질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교회를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와 동일하게 말세를 살았던 노아도 물질적인 준비가 있어야 했습니다.
노아가 120년간 배를 만들 때 배를 만드는 재료를 하나님께서 갖다 주신 것이 아닙니다. 노아와 그 아들들이 친히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또 홍수 때 배안에서 먹을 양식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노아와 그 자녀들이 다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희가 방주를 짓고” “너희가 먹을 양식도 저축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너희가 주의 일을 할 때 전대도 준비하고, 배낭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준비하되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교회는 성도들의 헌신 속에서 새워집니다.
지금 장안에 있는 이름 난 교회들을 보십시오. 그 교회들이 어떻게 세워졌겠습니까? 수많은 성도들이 기도로, 몸으로, 물질로 헌신한 결과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무엇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둘째, 겉옷을 팔아 검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검은 사람들과 싸우고 다투는데 사용하는 칼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 떨어지게 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검은 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칼은 성령의 검 즉 말씀의 검에 대해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검을 살 때 겉옷을 팔아서 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겉옷은 무엇입니까? 겉옷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겉옷은 추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지식이나, 학벌, 지위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겉옷은 우리의 위선과 가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를 감싸고 있는 위선과 가식의 껍데기를 벗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천주교에서 하는 행사 중에 ‘죽음체험’이 있습니다.
명동 성당 3층에 가면 기다란 관 하나가 놓여 있는데, 그 관은 붉은 십자가가 새겨진 흰 천으로 덮여 있다고 합니다.
죽음 체험을 하고 싶은 사람이 이곳에 가면 관 옆에 있는 사람이 관의 뚜껑을 열어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열린 관 안에 들어가서 눕습니다. 그러면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이제는 관 뚜껑을 닫아줍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흰 천으로 그 관을 덮습니다. 이렇게 해서 약 5분 동안 관 속에 누워서 죽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5분 동안 관 밖에서는 신부의 집례로 ‘장례미사’가 행해집니다.
신부는 회중들을 향해 죽음을 알아야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다들 목숨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로부터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아있을 때 정성을 다해 살고 나중에는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관을 덮었던 천은 벗겨지고 또 관 뚜껑이 열리게 됩니다.
관 안에서 죽음 체험하고 나온 사람에게 그곳에서 무엇을 느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얼마 전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엄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시고 계실까 하는 것이 큰 짐이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관에 들어가 보니 너무 고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죽음을 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말 내게 죽음이 다가왔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되기 위해서 남은 생애는 가족과 이웃에게 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 속에 들어가서 관의 뚜껑이 닫히고 나면 이것이 바로 무덤 안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까지 누리며 살아왔던 관 밖에 있었던 그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관 밖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물건도, 이 관 안에는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오직 이 관 안에는 나와 나의 마음과 나의 믿음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혹자의 말과 같이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자의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 세상의 것들인 겉옷을 팔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말세를 믿음으로 승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겉옷과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에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 기복신앙에 빠지고,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며,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옷을 팔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산 사람들은 노아와 같이 세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세를 만난 성도들이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보면, 모두가 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신뢰하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겉옷 같은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말씀중심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세라고 합니다.
오늘날이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온 말세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굳게 믿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깨어서 기도하는 삶을 살뿐 아니라,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또 나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늘 경건생활에 힘쓰며, 충성스러운 주의 일군으로 교회를 섬기며,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말세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들을, 다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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