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
요한복음 17:20-26
1. 삼위일체 신관
오늘은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이 신관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신관입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유일한 신관입니다.
고대 헬라 종교의 신관은 다신론이었습니다.
불교나 뉴에이지 등의 신관은 범신론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슬람의 신관은 단일신론입니다.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들의 신관은 모두가 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관입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말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 세분의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한 하나님이 세 위로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가 곧 셋이고 셋이 곧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 삼위일체 신관은 사람이 상상해 낼 수 없는 신관입니다.
사람들이 삼위일체 신관을 어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와 유사한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에도 이런 신관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사람들이 상상해서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또 다르게 말하면 삼위일체 신관을 가진 기독교는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2. 삼위 일체 신관의 근거
삼위일체 신관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삼위일체 신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는 자연을 통해 주신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 말씀을 통해 주신 초자연계시 혹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특별계시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오셨습니다. 그 계시하신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시고,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고, 그 창조하신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이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단으로 분류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씀이 직접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도 없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는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목적을 요한복음 20:30-31절에서는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기록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이심을 믿게 하여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또 이 사람들이 눈감고 있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이 세 분 하나님은 각자 개별적으로 존재하시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6:4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쉐마의 말씀이라고 하며 아주 중요시 했으며 어릴 때부터 암송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유일신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 하며 가르침을 받고 기적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을 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어떻게 이 고백을 할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신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한 고백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에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가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아멘.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고 또 오순절에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였습니다. 이 신앙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었습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 2세기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어떤 관계로 존재하시는지에 대한 논쟁 즉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삼위일체 논쟁은 니케야 공회의와 318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를 거치면서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신 분이시라는 증거는 아주 많습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 1:1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 이 말씀을 그대로 직역하면 ‘한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 하늘과 그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절에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힘’이라는 복수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번역해 보면 ‘한 처음에 하나님들께서 그 하늘과 그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셨음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 1:26절 말씀도 보면 하나님에 대해 우리라는 복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 말씀도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시며, 복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창세기 3:22절 말씀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기서도 우리라고 하심으로 복수의 하나님이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에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마치 죄인인 것처럼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16-17절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런 말씀들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동일하게 삼위일체로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성도들은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는 어떻게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또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령을 사람들에게 부어주심으로 비로써 사람들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지식과 이해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제한적인 지식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성도들이 살아가야할 삶에 대해서, 영성과 경건과 거룩한 삶에 대해서, 또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등등 많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신앙적인 이해들은 우리의 이해의 한계 속에서 알고 믿게 된 것들입니다.
이런 이해력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한 신앙을 가지게 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이런 이해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어거스틴은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교훈 세 가지를 달라고 요청하였던 사람들에게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권면하였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겸손한 신앙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교훈은 없어 보입니다.
3. 삼위일체 교리의 정의
구약시대 성도들은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믿었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유일하신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한 분 하나님 안에 그 능력과 영광과 특성들이 동일하신 삼위가 계신다고 합니다. 이 삼위로 계신 하나님은 각각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각자 독립적인 하나님으로 계시지 않으시고 한분 하나님으로 공존하여 계신다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각자 개별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기이하고 신기하고 특별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런 예수님을 기묘자라고 하였습니다. 기묘자란? 너무 기이하고 신기하신 분이셔서 도무지 알 수 없으신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예수님의 전 생애는 기묘자로서의 생애였습니다. 그 출생이 그렇고, 행하신 이적이 그렇고, 대속의 제물로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그렇지 않습니까? 또 장차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소 요리문답 제6문을 보면 삼위일체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다. 본체는 하나요. 영광과 능력은 동등하시다. 각 위는 각각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나뉠 수 없는 관계로 계시는 관계론적인 존재의 공동체이다.’ 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은 ‘관계론적인 존재의 공동체란?’ 문장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은 태생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관계 속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318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삼위는 혼합될 수도 없고, 나뉠 수도 없는 관계’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삼위로 계시면서도 또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의 상호관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이면 하나, 둘이면 둘, 셋이면 세이지, 하나이면서 셋이고, 또 셋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요. 이 세상에는 이런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는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계신 하나님을 증거 해 주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이 사람이 쓴 책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썼다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도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가진 성경 말씀은 사람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기독교는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서 시작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아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존재하는 방식에서만 하나인 것이 아닙니다.
그 행하시는 사역과 경륜과 능력에서도 하나이십니다. 하나님은 작정, 창조, 섭리, 보존 등등의 그 모든 사역에서 삼위가 하나로 일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주와 세계의 근본이시며 창조자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창조사역의 건축자이십니다. 이런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해 요한복음 1:1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삼위일체 교리를 잘못 이해하면 양태론 적 단일신론과 삼신 론에 빠지게 됩니다.
삼신 론이란?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으로 각각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삼신 론은 잘못된 이론입니다.
양태론 적 단일신론이란? 하나님은 한 분이신대 이 하나님이 때와 장소에 따라 어떤 때는 성부로, 어떤 때는 성자로, 때로는 성령으로 얼굴을 바꾸셔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집에서는 아버지입니다.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동일한 사람이 장소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도 한 분이신대 구약시대 창조 시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신약시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사역에서는 성자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양태 론이라고 합니다. 한 하나님이 때와 장소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하셨다는 것이 양태론적 단일신론입니다. 이것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 한 분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삼위로 계신다고 합니다. 비록 삼위로 계시지만 그 목적과 사역과 능력에서 나뉠 수 없고 삼위가 일체라고 합니다. 이 삼위일체는 사람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사한 것이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억지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다가 이단으로 정죄함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부관계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합니다. 하지만 부부는 진짜 일체가 아닙니다. 진짜 일체라면 헤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주 쉽게 헤어지는 것이 부부사이입니다.
또 태양을 비유로 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태양에는 본체가 있고, 빛이 있고, 열이 있습니다. 이 셋을 합치면 하나의 태양이 되고 이것을 나누면 본체와 빛과 열이 되듯이 삼위일체가 마치 이와 같다고 합니다.
또 나무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나무에는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잎이 있지만, 이 셋이 합하여서 하나의 나무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삼위가 동일하십니다. 태양은 어떻습니까? 한 태양이지만 본체와 빛과 열이 서로 다릅니다. 나무는 어떻습니까? 한 나무이지만 그 뿌리와 줄기와 잎이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삼위는 일체를 이루어 한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부부는 어떻습니까? 서로 다른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삽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혼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각각이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도 나무도 태양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피조물들입니다.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을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 같이 각각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또 함께 일체를 이루고 계신 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라고 하신 말씀들은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자신들이 가진 신앙을 기독교 신앙과 구분하기 위해서 ‘알라는 사람을 아들로 둔 일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루 다섯 번씩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고 섬기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격하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슬람에서는 하루 다섯 번씩 나팔을 불고 그 나팔 소리와 함께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하는데 이 때 그 부는 그 나팔 소리로 알리는 것이 ‘알라는 사람을 아들로 둔 일이 없습니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하루 다섯 번씩 아주 철저히 기독교를 대항하는 쇠뇌교육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은 창세기 3:15절에서 ‘사람이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실 아들을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주실 것’이라고 예언해 오셨고, 또 그 아들은 ‘상고부터 태초부터 계신 분이시라.’고 전해주셨습니다.
미가서 5:2절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상고에 영원에 계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이사야서 9: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그냥 태어난 아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메시야로 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약 350회 이상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친히 요한복음 5:39절 말씀에서 ‘너희가 영생을 얻으려고 구약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 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신약성경은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4-5절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아나이아 삽비라가 성령을 속인 것을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이라고 합니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성령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말은?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은 성령을 묘사할 때 인격적인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4.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성
삼위일체교리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는 배워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혼자서도 완전 하신 분이신대 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사귀고,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누가 누구에게 소속되거나 복종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영원히 서로를 사귀고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사랑하는 아주 특수한 관계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심판하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다 포기하고 내어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서 구원사역을 마무리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은 인간의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에서 삼위 하나님이 어떻게 서로를 섬기시는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각각이 완전한 하나님으로 계시면서 서로를 섬기고 사귀고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로 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위해서 자신을 영원히 완전하게 내어주시는 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영원히 하나를 이루고 계십니다.
부부는 어떻게 둘이 하나를 이루고 살 수 있습니까?
남남인 부부가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될 때에, 자기를 그 중심에 두고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섬길 때 하나가 되는 평화로운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으십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다 내어 주셔서 상대방을 섬기는 관계로 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세 분이 자기 자신을 다 내어 주시면서 서로를 사랑하신 관계로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사랑이 나온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신 것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라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삼위 하나님은 서로 사귀고 서로를 섬기며 삼위가 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죄인이 된 사람들까지 사랑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용납함과 섬김 등등이 그 특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가지신 분이 아니셨다면 아담 안에서 범죄 하여 죄인이 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증거 해 주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으로 사귀고 섬기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용납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회교도들이 코란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알라는 어떤 분이라고 합니까? 알라는 혼자 자존하는 신이기 때문에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전혀 필요 없는 신이라고 합니다. 알라는 단일 신이기 때문에 사귐도 없고, 용서나 섬김의 대상도 없고, 온유와 겸손으로 대할 상대방이 전혀 없는 신이라고 합니다.
이런 알라 신에게서 사랑과 이해와 용서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슬람에는 온유나 겸손이나 용서나 화해나 관용이나 섬김이나 배품 같은 말 자체가 없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오직 무자비한 계율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은 지금도 손이 범죄 하면 팔을 자르고,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뽑아 버리는 종교입니다. 지금 온 세계를 근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IS 무장 단체가 바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슬람의 잔인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강제로 개종을 강요하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런 이슬람의 알라와는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진실하게 사귀며,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도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이런 용서와 이해와 사랑은 우리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신 분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 이런 사랑을 바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헬라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다투는 신들입니다.
이런 신들에게는 속임과 질투와 다툼과 싸움이 난무할 뿐 참되고 진실한 사랑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교의 범신론이나, 뉴에이지의 내제신론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신이 있을 것이다. 나도 신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을 깨워서 나도 신의 경지까지 올라가 보자.’라는 기대와 바람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들이 만든 신관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만든 무신론과 범신론과 단일실론 등과는 달리, 우리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로 계시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는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셔야 하는 이유를 조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이신지 또 얼마나 자랑스러운 하나님이신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방향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들도 하나님과 같이 서로 사귀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존재 즉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고, 자연과도 관계를 맺고 사는 관계론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관계론적인 존재입니다.
꽃과 나비가 관계론적인 존재이며, 식물과 동물이 관계론적인 존재이며, 육지와 바다가 관계론적인 존재이며, 남자와 여자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를 돕고 도움을 주며 살아가는 관계론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관계론적인 존재일까요?
그 이유는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들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이 서로 사랑하고 사귀고 도우며 사는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서로를 돕고 사랑하는 삶을 살 때 비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고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1서 4:7-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다고 합니까?
지식적으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우리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그런 실천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며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관계 맺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여 알게 되는 것을 참된 앎이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 맺음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입니다.
상대방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려면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돕고 용서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보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주장을 하면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식어질 뿐 아니라 상대방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도 없게 됩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삼위일체를 이루시고 서로 사귀고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사시듯이 우리들도 이웃과 관계를 맺고 사귀고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자기중심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희생을 자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을 닮게 창조함을 받은 우리들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 신앙을 건강하게 해 주고 또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과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신 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이유는 우리의 골치를 아프게 하시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에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알려 주시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면 아담에게는 아들이 몇 명 있습니까? 성경에는 세 명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930세까지 살면서 무수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꼭 알아야 할 세 사람만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가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의 조상이다. 아벨은 믿음으로 살다가 순교한 사람이다. 셋은 아벨의 믿음을 이어갈 사람이다. 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반드시 말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는 비록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에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알려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시려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알고, 우리들도 그 하나님을 본받아서 살게 하시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요한복음 17:22절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삼위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가 되셨다는 것입니까? 나를 중심에 두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중심에 두고 사귀고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 창조함을 받은 우리들,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함을 받은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올바른 삶이 아니라고 합니다. 상대방을 중심에 두고 그 입장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고 섬기며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보면 시시한 세상 문제를 가지고 다투고 분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성도들과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이렇게 다투고 싸우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성도라면 하나님처럼 사랑으로 하나됨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이 한 주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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