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3. 4. 3. 09:5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마가복음 10:42-45

 

오늘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종려주일입니다.

내일부터 한 주간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당하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 달려 죽으신 것을 기념하며 지키는 고난주간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이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함으로 다시금 고난을 통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들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세 분이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구별된 세 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몇 주 전에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 이성으로는 하나이면 하나이고 셋이면 셋이지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지식, 인간의 이성보다 더 높은 영적이고 신적인 차원에 속한 지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성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다가 잘못된 신앙의 길로 빠지기도 했습니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그 신성을 비우시고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성자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라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뜻깊은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성자 하나님이 예수라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를 죄와 죄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에스겔서 34:11-12절에서는 잃은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용을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목자가 양들을 방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온 세상이 캄캄해지고,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면서,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들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양들이 깜짝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때 목자는 번개와 천둥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리고 있는 비도 개의치 않고 그 흩어진 양들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앞을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이 되어도 목자는 계속해서 흩어진 양들을 찾아서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우리 하나님께서 이와 같으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목자가 자기의 흩어진 양들을 찾아다니듯이 그렇게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고 찾아다니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잃은 양을 찾고 있는 목자의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리게 되면 목자는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들에 놓아두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찾고 찾다가 그 잃었던 양을 찾게 되면 그 잃었던 양을 다시 찾은 것을 기뻐하며 지인들을 불러서 잔치를 연다고 합니다. 15: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구원해 주기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성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사람들이 지은 죄의 잔을 대신 마시시고 죄인이 되사, 죄인 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십자가 형벌을 대신 받고 죽어주심으로, 사람들을 죄와 그 죄의 형벌에서 구원해 내주시는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죄에서 인류를 구원해 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야 합니다. 구원은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 십자가 앞에서 죄 사함을 받고, 또 죄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을 받으므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됨으로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룰 기관으로 이 세상 속에 세워 놓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 대사관에 해당하는 교회를 세워 놓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워 놓은 교회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해 나가는 일을 해 가고 계십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는 비록 이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기관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님의 권세를 위임받아,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 일을 하는 하나님 나라 대사관과 같은 기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사관이란 어떤 곳입니까?

대사관은 비록 다른 나라 안에 세워지지만, 대사관이 세워져 있는 나라 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대사관을 세운 나라의 법이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일종의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 나라 대사관과 같은 교회 안에는 이 세상의 법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세워져 있지만 하나님의 법이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18절에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네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가 비록 이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아주 특별히 구별된 곳이고, 사단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곳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대사관이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를 통해 천국 출입 비자를 받은 사람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16: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천국열쇠를 내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아멘.

 

우리는 지난번에 이 문제를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성취하신 구원의 역사에 근거하여, 세상 속에 세워주신 교회를 통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세상 적으로 보면 초라해 보이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이 교회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해 가시는 일을 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아와서 듣고 배워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특별한 이유는 오직 이들만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 내는 일을 위해 택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영혼 구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주신 대위임령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8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 하시니라.’

 

어떤 회교국가에서 한 청년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이 청년은 사람들에게 잡혀서 공개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관이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알라를 믿는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는가?’

 

이 청년은 그 관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길을 잃었었습니다. 길을 잃은 것은 제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길을 찾아 줄 분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찾아간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이미 죽고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 있었습니다. 만약 재판장님께서 나와 같이 길을 잃었다면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찾아가서 길을 묻겠습니까?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사람을 찾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살아 있는 그 사람을 찾아가시겠습니까?’

 

그 재판을 담당하고 있었던 그 관리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야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길을 물을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먼저 회교의 시조가 되시는 마호메트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마호메트는 이미 죽으시고 안 계셨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종교의 시조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죽어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제게 내가 길이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님을 만나고 잃었던 내 인생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찾게 된 길은 영원에서 시작되어서 영원까지 이어져 있는 참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인생이 완전히 변화된 한 회교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어떤 분이셔야 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인생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여리고에서 살았던 세리 장 삭개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여리고로 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고, 그 유대인들은 자신을 매국노 취급하며 아주 적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멀리서나마 예수님을 한번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재빨리 뽕나무밭으로 달려가 뽕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뽕나무까지 오셔서 삭개오를 올려다보시면서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하루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삭개오였다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삭개오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놀라서 심장이 콩당콩당 뛰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는 말인가? ‘나는 한번도 예수님을 만난 일이 없는데 내 이름까지 알고 계신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저는 이때 삭개오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삭개오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만나서 새 사람이 된 삭개오는 예수님께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재물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던 예레미야자신이 복중에서 지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눈물의 선지자가 되게 했습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다윗도 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다윗이 그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에는 기독교의 영광이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기독교의 영광이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의 주류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을 만난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를 경험한 성도들이 많아지는 것에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를 경험한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1: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오늘날에는 이런 중생의 변화가 없어도 교회만 나오면 한 사람의 교인으로 인정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교회와는 달리 중생을 경험한 삭개오를 비로써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 말씀에서 결론적으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왜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부르셨는지, 왜 사람들이 기피하는 세리 장 삭개오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또 한 가지 일은 예수님이 잃어버린 삭개오를 찾아가서 구원해 주셨듯이, 교회도 그 목적을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구원해 내는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가 다 차면 이 세상 끝이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직은 이 세상의 끝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잃어버린 자들, 아직도 우리들이 찾아내야 할 영혼들이 더 있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삭개오와 같이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구원해 내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둘째,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0:10-12절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도적과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입니다. 도적이 오는 목적은 도둑질하기 위해서입니다. 삯군은 품삯을 받기 위해서 양을 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주인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 양을 지켜내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45절에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자는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섬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섬김의 핵심은 섬기는 나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상대방의 유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는 나를 가장 중요시하는 이 세상의 원칙과는 정반대가 되는 개념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는 이 세상이 가장 중요시하는 개념은 소유의 개념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얼마나 많은 물질을, 권력을, 영향력을 소유하고 있느냐?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소유보다는 사람들의 필요들을 중요시하고, 그 필요에 응답해 주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소유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선한 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선한 목자가 되실 수 있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필요에 응답해 주신 분이셨기 때문에 선한 목자가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셔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또 사람의 죄의 잔을 마시시고, 무죄하신 그 생명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 자기희생적인 속죄 제사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대사로 근무했던 취우네 수기하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독일 군인들이 유대인들을 나치 수용소에 가두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는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나치 수용소로 가지 않기 위해서, 일본으로 가는 비자를 받으려고 일본 대사관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국으로 전문을 보내었고, 본국으로부터 비자를 발급해 주지 말라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취우네 수기하라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외교관의 처세 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신앙적인 양심으로는 그 사람들이 포로수용소에 가서 죽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외교관의 신분으로는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비자를 발급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 고민하던 이 사람은 외교관으로 출세하려던 꿈을 접고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여서 그 사람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비자를 발급해 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는 28일 동안 쉬지 않고 비자를 발급해 주어서 약 6,000명의 사람들을 살리게 됩니다.

 

이 일은 곧 본국에 알려졌습니다.

그는 그 즉시 본국으로 소환되어 파면 통보를 받게 됩니다. 직업을 잃은 그는 나중에 작은 전파사를 운영하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고 합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시대가 바뀐 후에 이 사람의 영웅적인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취우네 수기하라의 아들을 만나 당신은 아버지의 선택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이러했다고 합니다. 제 아버지는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필요에 응답하심으로 자신의 삶의 손해를 각오하고 그 일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예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섬김이란? 섬기고 있는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나에게 섬김을 받고 있는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데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중요시하는 소유의 개념은 어떠합니까?

소유의 개념은 나를 중심에 두고 나의 소유, 나의 권리, 나의 입장을 아주 중요시하게 합니다. 세상은 그럴지라도 문제는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회들까지도 소유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우리 교회는 수백억을 드려서 지은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 우리 교회는 얼마짜리의 교육관과 선교센터를 가지고 있다.’라고 자랑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소유의 개념입니다.

 

이런 소유의 개념이 보여주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소유의 개념을 가지게 되는 순간 우리는 내 소유를 지키며 보전하는데 온 힘을 쏟으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내 소유를 지키는데 온 힘을 쏟게 되는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입장이나 이웃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시고 있지만, 소유의 개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사랑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소유의 개념은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유의 개념을 가지고 나의 입장을 주장하고 나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의 소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한 목자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선한 목자의 삶은 상대방의 필요를 생각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삶입니다. 내 이웃을 살리는 선한 목자의 삶은 자기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필요에 반응하는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삶입니다.

 

이런 삶이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성육신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신성을 비우시고 세상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으셨던 것은 사람들이 죄와 그 죄가 가져다주는 고통에서 구원받을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했더라면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몇 마리 되지 않는 그 아버지의 양들보다 다윗 자신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가치 없는 양들을 구하기 위해서 더 가치 있는 자기 자신의 희생할 각오로 사자와 곰과 싸웠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이 아버지 양을 위해 싸워주고 지켜주지 않으면 그 양들은 맹수의 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양들의 필요를 생각하였기에 그 양들을 지켜주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순교를 피해 로마에서 시골로 도망가다가 왜 다시 돌아와서 순교했습니까?

그것은 당국자들의 순교의 칼날 앞에 두려워 떨고 있었던 로마교회 성도들과 운명을 같이해 줌으로, 자신도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이런 베드로의 행동은 어리석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그 길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고 생명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바로 이 길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이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 길을 선택하고 또 이 길을 걸어간다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자 장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좁은 길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삶에 함께 동행해 주시고, 또 그 길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간 길이었다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섬기는 삶에는 중요한 원칙이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보다 덜 가진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보다 더 강한 사람들이 보다 더 약한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보다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보다 불편하게 사는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섬기는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14-15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섬기는 삶의 본을 보였노라.’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기는 삶의 본을 따라, 소유의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중에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섬기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섬기고,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렇게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고, 이런 사람들이 장차 선한 목자로 오사 섬기는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기쁨으로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아멘.

 

또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셋째, 우리 구원을 완성해 주시고 성취해 주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초림보다 재림에 대한 말씀들이 훨씬 많습니다.

신약성경 뿐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씀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런 빈도로 볼 때 더 적게 예언되었던 예수님의 초림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더 많이 예언되고 있는 예수님의 재림은 얼마나 더 확실하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도둑 같이 오시고, 다른 하나는 신랑 같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도둑 같이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안 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듯이 도둑같이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멸망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됩니까? 신부 단장을 잘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신부 단장에 대해서는 10처녀의 비유를 보면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신부로서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는 신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잘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고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그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

 

정리하면) 예수님의 재림(The Second Coming)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적 같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림하시는 날을 위해 예비하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신랑으로 오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절입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예수님이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니엘도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7:13-14절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 나라와 역사는 끝이 나고 메시아 왕국이 시작됩니다.

메시야 왕국은 이렇게 이 세상 역사가 끝이 나고 오는 나라입니다. 아직은 세상 나라와 이 세상의 역사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천지의 이만희나 통일교의 문선명은 JMS의 정명석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통해 이 메시야의 나라가 이 세상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엉터리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미혹되어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이렇게 극성스럽게 활동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터부시하니까 이제 요한계시록은 이단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을 힘써 가르쳐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지 않음으로 성도들을 이단에 넘어가게 놓아둔다면 이 시대 교회는 그 받은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시간이 날 때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들을 읽고 묵상하셔서 요한계시록의 말씀들이 친근한 말씀, 즐겨 애독하는 말씀이 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어떤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게 될까요?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멸망과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예수님의 재림 장입니다.

19장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백마를 타시고 입에 검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의 모습입니다. 11절입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다른 하나는 혼인 잔치에 임하는 신랑의 모습입니다. 7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9절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이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기로

 

성도들은 당연히 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날 우리는 혼인 잔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예식장으로 가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날 예식장이 아닌 법정으로 가서 세상의 심판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안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재림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깨어 있는 성도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 20절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백했던 이 재림 신앙, 마라나타 신앙이 우리 모두가 고백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