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성령이 주시는 은혜 ‘거듭남’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3. 8. 6. 14:05

성령이 주시는 은혜 거듭남

요한복음 3:1-15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을 문맥 속에서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신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2:15-16절입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이 사건은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성전을 관리하며, 성전에서 각종 제사와 의식을 주관하고 있던 제사장들과 유대 종교지도 자들이 예수님에게 적대감을 갖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면 이 사건은 일반백성들과 경건한 삶을 소망하던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 부류로 구분해주었던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라고 하시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또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을 고쳐 주시는 등 많은 이적과 표적들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런 일들을 보고, 예수님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분이라고 보고 열정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지도 자들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시는 일들을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악담을 하며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예수님께 호의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그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분이시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니고데모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있었습니다.

 

1. 마음의 중요성

 

이런 유대인들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무엇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행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 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나 예수님이 행하시는 그 모든 일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나 그 행하시는 일들을 좋게 보았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마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에 따라서, 동일한 사람을 보는 평가가 달라지고, 동일한 사건을 보는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서 신물 나게 봐오지 않았습니까?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서, 소속되어 있는 정당에 따라서, 똑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봅니다. 이런 정치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구제 불능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정치인들을 말을 듣고 있노라면 쌓이는 것은 스트레스뿐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사는 마음에 대한 말씀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잠언 23:7절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하지 아니함이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생각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는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할지라도 그런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4:18절입니다.

‘.... 그들의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그러면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를 내 쫒으셨을 때, 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그런 예수님을 적대시하게 됩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바리새인과 종교지도 자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세례요한을 배척하고 세례도 받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굳어지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굳어지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잠언 4:23 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며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합니다. 그 마음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 하는 것에 생사가 달려 있다고도 합니다.

 

또 마음을 잘 지키는 자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에서 생명이 나오며, 건강도 나오고, 성공과 장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지만, (마음의) 근심은 사람의 뼈도 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 마음이 아프면 구중궁궐도 좋은 줄 모르나, 마음이 즐거우면 초가삼간도 만족하게 됩니다.

 

2. 거듭남의 중요성

 

이제까지 우리는 마음의 중요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는 우리 마음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요한복음 3장에서는 사람들의 거듭남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은밀하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밤중에 은밀하게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낮에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을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밤중에, 은밀하게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가서 믿음의 고백도 하고, 진지한 대화도 해 보고 싶어 했습니다.

3:1-2절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가르쳐 오신 그 가르침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신 그 일과, 사람들을 위해 행하여 오신 이적과 기적과 표적들을 보고, 자신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 주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하신 그런 일들이나, 그런 표적들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이 고백을 하면서 기대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축복의 말씀 주시기를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아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니고데모가 누구입니까?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율법 학자였고,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랍비였으며, 또 오늘날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던 산헤드린 공회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자신은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또 그 삶으로 보아도 자신은 인생을 매우 성실하게 성공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니고데모의 믿음과 삶을 인정해 주시기는커녕,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면, 너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네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는 다시 태어나서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 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평생 하나님과 그 나라를 목적하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니고데모가 생각할 때 어떤 사람들이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까?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있는 이방인들이나, 세상에서 죄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는 죄인들이나, 사기꾼이나 도둑과 같은 범죄자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온 니고데모에게, 네가 다시 태어나서 네 인생을 다시 시작하지 아니하면하나님 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너는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3. 거듭나지 못한 니고데모

 

마음의 중요성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중요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듭남은 사람들이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오늘날에는 성도들 가운데도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 죄 사함을 받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받게 되는데, 이 성령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이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거듭나야 합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 안에서 그 영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는 죽어가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의 생명을 다 살게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죽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스스로는 보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실 때에는 다릅니다. 영으로 계신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실 때에는, 아담의 범죄 안에서 그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은, 비록 그 육체적인 생명은 살아 있으나, 그 영적인 생명은 죽어 있는 존재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관점을 구약성경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 되어 있는 인류의 족보를 보면, 믿음이 없는 가인의 족보와 믿음으로 살았던 셋의 족보를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족보를 기록하실 때에는 그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아담의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존재로 보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라는 말씀만 있고 몇 세를 살다가 몇 세에 죽었다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죽어 있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 얼마를 더 살았다는 말씀도 없고, 다시 죽었다는 말씀도 하고 않았습니다. 창세기4:18절입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고, 에녹은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그런데 믿음의 계보인 셋의 계보를 보면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로 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낳고, 그는 몇 세를 살다가, 몇 세에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6-8절입니다.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사람들을 보는 이 두 서로 다른 관점이 요한복음 3장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아담 안에서 죽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거듭나는 방법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4.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거듭난다는 단어 아노센거듭남,’ ‘위로부터 남,’ ‘하나님으로부터 남’, ‘새로 남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사람이 그 부모로부터 육체를 가진 존재로 태어나는 것과 같이,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가 왜 이 질문을 했겠습니까?

그는 영이 죽어 있는 사람이었기에, 육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알고 있고,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 같이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내가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이런 니고데모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록 그 삶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일지라도, 영적인 면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우리가 사람들을 볼 때에, 육신 적이고 세상 적인 삶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영적인 면까지 함께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을 판단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기독교는 사람이 시작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 속한 종교,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종교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육신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해 불가능한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의 설명을 듣고, 사람들에게 설득되어서 가지게 된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은혜를 주실 때, 믿을 수 있게 되는 종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가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에 나갔을 때, 저는 이미 성경을 거의 한 번 정도는 읽은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하시는 설교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처음 나간 그 교회 목사님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설교를 했다면 저는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은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 그 교회에서는 성령이 주시는 구원과 은혜에 대한 설교를 했고, 저는 귀를 기울이고 그 설교 내용을 들었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를 교회로 안내해 준 그 분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한 번 더 예배에 참석하고 가겠으니 먼저 돌아가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 부부는 다음 예배는 지금 한 예배와 똑같은 내용이라고 하시면서, 그러지 말고 같이 가서 목사님의 축복기도도 받고, 함께 식사도 하자.’고 했습니다. 그 강권함을 뿌리치지 못하고 교구 사무실에 가서 목사님의 안수 기도를 받고,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졌습니다.

 

그분들과 헤어진 후 나는 주보를 펼쳐서 그날 그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저녁까지 한 4번의 예배에 참여한 것 같습니다. 그날 참석한 청년부 예배에서는 인적 사항을 쓰라고 해서 써 주었는데, 그것이 연결고리가 되어 나중에 청년들 모임에 참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날 저는 교회에 가기 위해서 아침 일찍 어느 집사님 집을 찾아가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 그분들에게, 죄송하지만 대문에 교패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교회 다니시는 분 같은데, 저는 교회에 한번도 가 본 일이 없어서, 모르는 교회에 혼자 교회 가기가 쉽지 않다고 하면서, 혹시 가능하시다면 저를 한 번만 교회 데리고 가 줄 수 있으시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그분들과 함께 교회에 가서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 9시까지 쭉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는데 마음이 찹찹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서글픈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김종하.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냐?’ ‘젊은 사람이 스스로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보려고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살겠다고 교회를 찾아 나왔느냐?’라는 생각에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평안함이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왕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최대한 빨리 신앙의 참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각오로 20대 나이에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설교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듯이, 당시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이란?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육체의 몸을 입고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물과 성령으로 그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니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 행동이 그 삶이 이전과 조금 다르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개으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부지런한 사람이 된다거나,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불성실하던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 된다거나, 전에는 부모의 은혜를 모르던 사람이 이제는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 등등을 우리에게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을 가지게 되면 이런 삶의 변화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속사람이 아예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이전에는 육신에 속해 살던 사람들이,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그 존재가 완전히 변화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6절입니다. 육으로 난 것을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말씀은 사람이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이 있듯이,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태어나는 것은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과 그 본질이 다르고,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니고데모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니고데모는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매일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연구하여서,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에 대해서는 거의 박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니고데모가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참 내용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백성들을 가르치는 선생인 네가 이것을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너는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을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다면, 이것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면, 그 죄를 사함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함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데, 성령은 살려주시는 영으로 우리의 죽은 영을 살려주시는 새로운 창조를 우리 안에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을 고린도후서 5:17 절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함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그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그 영혼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이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고 영으로 살아가는 나라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그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5. 거듭난 사람들

 

성경 계시의 중심적인 내용은 창조, 타락, 구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범죄와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창조, 타락, 구속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적인 내용입니다.

 

그 중에 구속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남으로 성취됩니다.

이 구속은 창세전에 성 삼위 하나님이 하늘에서 협의하시고 계획하신 일이며, 이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불러주시고, 믿음 주시고, 거듭나게 하심으로 성취됩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거듭남의 이 두 가지 면을 땅의 일하늘의 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그러면 땅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땅의 일이란?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항상 도둑질이나 하고 교회를 핍박하던 어떤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하여서 성실하게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삶을 살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그런 변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하여간 그 사람이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땅 위에서 일어난 일 즉 땅의 일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성령을 받고 변화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을 민수기 21장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민수기 21을 보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불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렸고, 하나님은 긴 장대 위에 놋 뱀을 만들어서 달아두라고 하시면서, 믿음으로 그 놋 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결정은 사람들이 상의해서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회의에서 결정하시고 주신 하늘의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놋 뱀을 장대 위에 매 달았다.’는 것은 저주받음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대 위에 높이 매달린 놋 뱀, 즉 저주받은 놋 뱀을 쳐다보면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땅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죄가 용서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그림 언어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면 그날 뱀에 물린 사람들이 다 그 놋 뱀을 바라보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코웃음 치거나 조롱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을 믿고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구원은 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주신 복음의 약속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는 것은 미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말씀에서는 모세가 장대 위에 달았던 그 놋 뱀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특혜입니까?

은혜의 역사는 천상의 보좌에서 열렸던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었습니다. 당시 뱀에게 물려 그 몸에 독이 퍼져 죽어가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할 일은 그냥 장대 위에 높이 달려 있는 놋 뱀을 믿음으로 쳐다보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 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늘 회의에서 결정하신 대로, 우리의 죄의 짐을 지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겸손히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이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새 이스라엘이고, 영생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두 번의 태어남이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육신의 부모를 통해 태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견고한 믿음을 주시고, 또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거듭남을 주셔서, 우리 모두는 그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날마다 우리를 하늘 백성을 삼아주신 성 삼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며 살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배해 두신 영생 복락의 삶을 우리 모두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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