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주실 것이요
누가복음 11:1-13
우리 신앙에는 중요한 두 기둥이 있습니다.
그 두 기둥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13절 말씀과 같이 기도생활을 통해 성령을 받게 되며, 기도생활을 통해 믿음으로 살아갈 힘과 능력과 은사를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중요한 기도 생활을 하며 살려고 하면
첫째는, 먼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살고 있던 한 제자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늘 가까이서 지켜보며 살았던 한 제자가, 어느 날 자기도 예수님처럼 기도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막 기도를 마치시고 일어서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이때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지 거의 2년이 다 된 때였습니다.
이 제자는 지난 2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해 오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보아 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는 스스로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또 기도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어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기도를 잘하고 또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기도에 대해 배우지도 못하였고, 그래서 한 번도 진지하게 기도해 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마음속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같이, 나도 기도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 복입니다. 예를 들면 학생이 주로 하는 일은 공부이지만 학생이라고 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내가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공부를 합니다. 학생이 그 마음속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삶에 다 적용됩니다.
성경에는 기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를 생활화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나이가 들면서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녀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 그 여종 하갈을 둘째 부인으로 아브라함의 품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임신한 하갈은 그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였습니다.
이때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이 사라의 말 속에서 그 가정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이 신원해 주실 것을 바라는 기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사무엘 서를 보면 엘가나의 부인 한나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엘가나는 둘째 부인으로 브닌나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브닌나가 임신을 한 후 한나를 말로 심히 격분시키며 괴롭혔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그 괴롭힌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남편의 기업을 이어갈 애도 못 낳아주는 주제에, 첫째 부인이라고 유세하며 사는 꼴이란? 참 염치도 없지, 나 같으면 창피해서 차라리 얼굴을 숨기고 조용히 살겠다.”는 등등의 심한 말들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브닌나를 한나는 사라와 같이 조강지처의 권위로 구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어떤 해결 방법을 택했습니까?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해결 방법을 택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두 여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결국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을 수 있게 되었고,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사무엘을 낳은 후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다가올 때, 그 문제를 인간적인 방법이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복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이런 복 있는 마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여러분이나 혹 여러분 자녀가 심한 감기로 고생할 때 어떤 마음이 먼저 듭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의사에게 먼저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마음이 먼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마음이 먼저 드시냐는 것입니다.
과거와 요즘의 성도들
우리보다 앞서 믿음을 가졌던 성도들은 참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요즘보다 살기가 훨씬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부족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성도들은 새벽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철야기도는 물론 작정기도, 금식기도를 하면서 열심히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했습니다.
당시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기도원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때에는 신년이나 휴가 때가 되면 기도원은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도실에 기도하러 가면,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참 기도를 많이 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은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요즘 성도들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
그러면 왜 요즘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아마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도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별어려움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데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기도한다고 당장 내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한다고 실력이 부족한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우리 집이 당장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불신 남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팍팍한 삶의 형편이 개선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기도한 결과가 당장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하기보다 당장 그 효과가 나타나는 인간적인 방법에 치중해 왔습니다. 아이들의 공부를 위해서는 학습지를 하거나, 학원에 보냈습니다.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알바를 하거나, 혹은 직장을 얻어서 살림에 도움이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 세상의 가치관과 이 세상의 수단과 방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서 내가 얻게 되는 이익에 그 삶의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당장 내 생활에 변화를 주지도 못하고, 당장 내 생활에 유익을 가져다주지도 않는 기도 생활에 헌신하기보다는, 당장 내게 이익을 주고, 당장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일을 먼저 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도 기도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그 능력의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또 이 세상을 주권적인 의지로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사람들의 계획과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또 그 하나님이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졌던 사도 바울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제로서 인류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신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은 또 다른 말씀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우리 개개인의 삶 속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실 뿐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도 개입하셔서 함께 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다스리고 통치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지 않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당장 내게 이익을 주고 유익을 주는 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기도 생활을 하며 살려고 하면
둘째는,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된 것은 아닙니다.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으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생각만 하고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 생활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되느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가서 물은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제자에게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4절에서는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기도문을 통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5-8절의 강청하는 기도를 통해서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이해와 기도응답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구하라’ 라는 이 말씀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지위가 낮은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 사용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실제로는 ‘기도하는 우리의 지위가 낮고,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지위는 높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 우리의 지위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지위 보다 더 높은 것과 같은 태도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아마 이 말씀을 주신 의미는 이런 것일 것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 지위가 낮은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애걸복걸하며 간청하듯이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듯이 그렇게 당당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피조물인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셨고, 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약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마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지위가 낮은 아랫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듯이 그렇게 당당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도한대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구하라’고 하신 이 기도를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는 기도’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붙잡고 하는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 역사하는 그 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는 힘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붙들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이름에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이사야 53:5절에는 무슨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까?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아왔는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16:31절에는 무슨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함으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시편 25:2절에서는 무슨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까?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믿음으로 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찾으라 찾을 것이요
‘찾으라.’라는 이 말씀은, ‘마치 목자가 잃은 양을 찾을 때, 그 힘을 다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고 또 찾듯이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찾으라.’라는 말은 ‘인내하면서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끈질긴 기도를 누가복음 18장의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끈질긴 기도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기도” “밤낮 부르짖는 기도”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하면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이 기도는 마치 학자가 전공 지식을 탐구하듯이 그렇게 집요한 기도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재판장이 원고와 피고의 말을 듣고 누구의 말이 옳고 누가 말이 그른 지를 밝혀내려고 하듯이 그렇게 집중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찾으면, 결국 목자는 잃은 양을 찾게 되고, 학자는 그 원하던 진리를 발견하게 되고, 재판장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밝혀내게 되듯이, 그렇게 기도하던 것에 대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멘.
두드리라 열린 것이니
‘두드리라’ 라는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의 대문 앞에 서서 그 대문을 직접 두드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을 3장을 보면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두드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의 문 앞에 서서 그 문을 직접 두드리면서 ‘하나님 문을 열어 주세요.’ ‘하나님 문을 열어 주세요.’라고 하게 되면, 이렇게 하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은 열리게 되고, 그 기도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그 열린 하늘 문을 통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에 기도할 마음이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생겼으면 이제는 구체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기도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생겼어도 구체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의 통장에 그 사람이 평생 써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큰돈이 예금되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 사람은 통장에 많은 돈이 들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때로는 굶고, 때로는 라면으로 때우며 살아간다면 현명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이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도하면 응답해 줄 것이라는 약속들이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기도 응답을 약속해 주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기도 응답을 전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시대
오늘 이 시대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만 성실하다면, 하나님 없이도 어느 정도 부를 누리고, 어느 정도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사회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자기만 성실하기만 하다면 그 성실함에 대한 보상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의 영적 분위기는 어떻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자가 올 때에 기도 응답을 믿고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볼 수 있겠느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말세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믿고 기도 생활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 생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세 성도들은 먼저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 안에서 기도해야 할 강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또 구체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기도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말세에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기도 생활을 하며 살려고 하면
셋째로, 기도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기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고 기도하면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두 마음은 무엇입니까?
기도 응답을 믿는 마음과 기도 응답을 믿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의 마음과 불신앙의 마음이 함께 하는 것이 두 마음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두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바람에 흔들려 파도치고 있는 물결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파도치는 물결에는 아무런 상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런 두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아무것도 기도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에는 응답해 주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믿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믿음의 기도가 응답된 예
성경 속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던 다양한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풍병자
신약성경을 보면 중풍 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중풍병자의 이 말은? 주여 저는 주님께서 제 병을 치료해 주시기를 원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도 제 병을 치료해 주시길 원하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 병을 치료해 주시기를 원하시기만 하면, 제가 병 고침을 받게 될 것을 믿습니다. 뭐 이런 믿음의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는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 중풍 병이 치료받게 된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
어떤 사람이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밤새 수고하며 애를 썼지만 그 아이를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새벽에 변화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시는 예수님께 “주님 제자들이 밤새 기도해 주었으나 제 아들에게서 귀신을 쫒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할 수 있으시거든 제 아들에게서 귀신을 쫒아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으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구원의 역사를 가져오게 합니다.
베드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위해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어떤 믿음으로 이렇게 선포했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청년이 일어나 걷게 될 것을 믿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믿고 선포한 대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또 베드로가 룻다 지방에 갔을 때 애니아라는 사람이 중풍에 걸려서 벌써 8년 동안 앓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애니아를 보고 무엇이라 선포했습니까?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러자 애니아가 곧 일어났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애니아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선포하였고, 베드로가 선포한 대로 에니야는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룻다를 떠나 욥바로 갔을 때 다비다라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한 여 제자가 죽어서 벌써 심한 냄새가 날 정도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시체가 있는 다락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다시 살 것이라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미 냄새가 나고 있는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 라고 선포하였고, 그 즉시 다비다는 눈을 뜨고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만 역사하시겠습니까?
바울에게만 역사하시겠습니까? 성경에서 병을 고침 받았던 사람들에게만 역사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과거에 역사하셨듯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사울 왕과 다윗 왕
이스라엘의 두 왕인 사울과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너무 다릅니다.
성경은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으로 묘사하고, 다윗 왕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평가의 차이가 나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생활입니다. 사울은 기도하지 않는 왕이었고, 다윗은 늘 기도하는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의 유무가 이렇게 극단적인 평가의 차이를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사무엘 하 2장 말씀을 보면,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은 후에, 다윗이 기도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이 다윗은 누구입니까?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제 전임 왕 사울이 죽었으니 누가 왕이 되어야 합니까? 그런데 그런 다윗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원수의 나라 블레셋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다윗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제야 기다리던 때가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저는 주저 없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이렇게 명명백백한 일을 앞에 두고서도 하나님께 “내가 유다의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라가라.”고 하시자 이제는 더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올라가라.”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 생활에 철저했던 반해, 사울 왕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울은 그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다가 찾을 수 없자, 그 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종 사무엘에게 물으려고 간 것 외에는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하나님께 기도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사울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았고,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대로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후회하셨고, 그 왕위를 다윗에게 넘겨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 때 사울과 다윗은, 모두 실수하고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왜 이 두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했음에도, 다윗은 계속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고,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까?
왜 이 두 사람의 생애는 이렇게 극명하게 갈라졌습니까?
그 이유는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생애를 살았다면, 사울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뜻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의 유. 무가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을 존귀하게 대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멸시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한 대접을 받고 살고 싶으면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믿고,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며, 늘 기도하며 살아가는 한 해를 만들어 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람들은 왜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기도를 생활화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노동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노동을 하면 정말 힘이 들지 않습니까? 기도도 육체적인 노동만큼이나 중노동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체적인 노동은 단순히 육체적인 힘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기도는 육체와 정신이 함께 힘을 써야 하는 노동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육체와 정신이 함께 해야 하는 중 노동입니다.
기도가 이렇게 어렵다 보니, 기도 생활을 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를 쉬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기도를 쉬게 되면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기도의 사람이 되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기도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므로, 이렇게 기도생활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들을, 우리 모두 다 받아 누리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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