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생활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3. 5. 7. 14:16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생활

창세기 21:1-8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건강가정기본법 12조에는 매년 5월을 가정의 달로 하고, 515일을 가정의 날로 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규정을 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가정생활이 우리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가족은 우리들에게 무척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쁜 직장생활 때문에, 내게 주어진 업무의 과중함 때문에, 혹은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고 어울리는 일들 때문에, 가족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가정을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가정의 중요성, 가족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 바로 가정의 달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달 안에 어린이날어버이날을 따로 두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생활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 아브라함이 살았던 곳

 

아브라함은 BC 2166년경에 태어나서,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그 아버지의 이름은 데라였고, 두 명의 형제가 더 있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오늘날 바스라라고 하는 항구도시입니다.

바스라쿠웨이트 북쪽에 있는 도시로써, 당시에는 국제무역의 중심 도시였으며, 세계 각 지역의 특산물들이 집결하였던 상업 도시였습니다.

 

도시가 형성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도시의 밝은 면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명예영화를 누리며 사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도시의 어두운 면은 각종범죄자들이 모여들어서 각종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도시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들고, 별의별 신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 됩니다.

 

당시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서 24:2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이것은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도 같았을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데라가 섬기며 살았던 다른 신은 그 지역의 주된 우상이었던 달 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당시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는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는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아버지는 교회 다니고, 어머니는 성당 다니고, 또 자녀들은 다른 종교를 믿으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각 개인에게 자기 종교를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이때는 부족 중심의 사회, 씨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가족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곧바로 같은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일상생활에서뿐 아니라 종교 생활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도 아버지 데라와 함께 달신을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브라함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성경이 증거해 주고 있는 대로, 창세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해 주시고 예정해 주시고, 때가 되자 불러 주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계시다. 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라고 결정을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증거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해 주시고, 또 때가 되자 불러 주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4절 말씀을 보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18-19장이나 이사야서 64장 말씀에서는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심과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모두가 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삭에게서 난 쌍둥이 자녀 중에서도 하나님이 택하셨던 야곱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하였던 에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택해 주시고 예정해 주셔서, 우리는 에서와 같이 믿음 없는 사람으로 살지 않고, 야곱과 같이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첫 번째 말씀은 사도행전 7:2절입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에는 부족이 씨족이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모두 달 신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 가족들과 심각한 종교적인 갈등을 겪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종교적인 갈등은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누구나 다 겪게 되는 갈등입니다.

 

이 갈등은 경험해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이 신앙적인 갈등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종교적인 갈등을 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아주 특별한 은혜, 특별한 체험들을 많이 하게 해 주십니다. 아마 아브라함도 이때 신앙의 경험과 체험들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적인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성도들은 힘을 얻어서, 믿음 때문에 일어난 갈등을 이기고 극복해 나가게 됩니다. 아멘.

 

종교적인 갈등은 어떻게 결론 났습니까?

창세기 11:31절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종교적인 갈등을 잘 이기고 극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다 함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처음에는 믿음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도 당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성도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이긴 성도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며 살아가도록 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이고, 이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온 신앙생활입니다. 아멘.

 

성경은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갈 때 가나안 땅이 어떤 곳이며 어디에 있는 땅인지 알지 못한 채로 떠났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렇게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기 위해 유브라데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올라가고 올라가다가 당시 수메르 문명의 끝자락에 있었던 하란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하란은 국경도시이면서 또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하란에서 북쪽으로 더 나아가면 헷 사람의 문명권으로 들어가게 되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애굽의 문명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중간에 있었던 곳이 바로 이들의 목적지였던 가나안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애굽의 영향권 안에 살고 있으면서, 또 각 도시마다 독립적인 도시 국가를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하란에 도착해 보니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었던 이 하란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이 풍부하였을 뿐 아니라, 그 주변에는 광활한 초원 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소와 양들을 방목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와 그 형제들은 이 좋은 환경 속에 계속 머물러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하란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 하란에서 하나님이 또 다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 말씀은 창세기 12: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 두 말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주신 말씀에서는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주신 말씀에서는 고향과 친척에다가 아비 집까지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그 형제 나홀은 살기 좋아 보이는 하란에 정착하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이런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는 네 아비 집을 떠나서 너 혼자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익숙한 수메르 문명권을 떠나 언어생활방식이 다른 민족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사람일본이나 호주로 이민 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늘 날에는 이민을 가도 그곳에서 생명과 재산이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다른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옮겨 오는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는 그런 법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생사의 문제, 장래의 문제 등등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기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목적지였던 가나안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곳으로 가면 어떤 환경이 펼쳐지고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저희가 참빛교회를 개척할 때의 심정이 이와 같았습니다.

당시 저희는 이 상계동 지역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고, 또 아는 사람 도와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곳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던 아브라함이 가졌던 마음 또한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란을 떠나는 아브라함에게 어려웠던 일이 또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제까지 가족이라는 끈에 묶여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이제는 네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처럼 따랐던 조카 롯만 데리고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나안 땅에 가서 살면서 결국 조카 롯까지 떠나보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은 가족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이 없었으면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7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 약속을 믿는 신앙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 세 가지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하란을 떠납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신앙도 약속을 믿는 신앙입니다.

사람들마다 그 받은 약속들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은 모두 다 약속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약속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성경이 증거해 주고 있는 구원의 약속, 임마누엘의 약속, 영생의 약속, 천국의 약속등등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약속들은 모든성도들이 다 믿고 있는 약속들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개별적인 약속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아브라함은 자식을 주실 것이라는 개별적인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용기 목사님은 요한32절 즉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씀을 받고 3박자 축복을 강조하며 목회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1:17절 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을 받고 종교개혁자가 되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씀을 받고 사랑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3:11절 이하의 말씀 즉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받고 신앙의 방황을 그치고, 방탕하게 살던 삶을 버리고,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기반을 놓았던 학자가 되고, 성 어거스틴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거룩한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개별적으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에 우리 믿음의 닻을 내리고, 그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들도 이긴 자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 첫째는,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창세기 12: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 후손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 개인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자녀를 주신다는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이 약속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현 불가능한 약속이 되어 갔습니다.

사라가 65세에 이 약속을 받았는데 이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는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있었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그 조카 롯을 아들같이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소유가 늘어나자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 사이에 초장과 우물물을 놓고 다투고 싸우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로 조카 롯은 물이 풍부하여 에덴동산 같고 애굽과 같았던 요단 강 하구 쪽을 택하여 떠나가게 됩니다.

 

롯이 떠난 후 아브라함은 그 집에서 자라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주신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이때부터 사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남편 아브라함을 통해 자식을 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그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면서 그를 통해 자녀를 얻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이 일을 좋게 여겨서 낳게 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상속자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 때, 사라가 88세 때 다시 찾아오셔서,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명년 이맘때에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인데 그 아이가 바로 약속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이 이삭이 하나님이 약속해 주셨던 그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아멘.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후사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은 믿었지만,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몰랐기 때문에 겪은 시행착오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을 믿고 있지만 그 약속들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온전해져 가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주신 약속의 결말을 보며 살 뿐 아니라, 신앙의 성장과 성숙도 이뤄나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 둘째는,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신다는 약속만 있었지 실제로 땅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약속은 개인에게 주신 약속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이루게 될 민족에게 주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5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묻게 됩니다.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 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땅을 주신다는 이 약속은 모세 때에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가서 생육하고 번성한 후에,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왔고,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 을 기업으로 받아 정착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식을 주신다는 약속이 개인적인 약속이라면, 땅을 주신다는 약속은 민족적인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서는 약속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도 중요한 요인입니다. 이 모든 조건들이 무르익게 될 때 약속하신 그 땅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그 셋째는,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갈라디아서 3:1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 즉 씨를 주실 것이라는 이 약속은 여럿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그리스도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었다고 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 (즉 그 씨)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 () 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인류 전체의 구속에 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약속을 주신 때로부터 2,000년도 더 지난 후에 성취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주권적인 섭리로 인류의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달려 있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런 약속들은 개인이 기도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정하신 구속사의 스케줄을 따라서 이루어가십니다. 구속 역사는 유대인의 구속역사와 이방인의 구속역사로 나눠집니다. 지금은 이방인의 구속 역사 시대이지만 이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 이방인의 시대는 끝이 나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남은 한 이래인 이스라엘의 구속역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후 7년이 지나면 인류 역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는 개인의 삶에 대한 약속도 있고, 민족의 장래사에 대한 약속도 있고, 인류 전체의 구속사와 관계된 약속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어떤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까?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받으시고 의로 여겨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믿음도 바로 이 믿음입니다.

비록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고, 성령의 받고, 거듭나고, 영생과 천국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을 굳게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도착한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이 기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는 기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환경적인 어려움을 믿음으로 견디어 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근이 오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떠나, 물이 풍부하다고 소문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믿음이란? 환경적인 어려움보다 하나님을 더 믿고 의지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간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그 잘못된 선택은 어려운 삶의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갔던 애굽의 왕 바로는, 아름다운 여인은 모두 다 자기 아내로 삼는 사람이었습니다. 혹 남편이 있으면 그 남편을 죽여서라도 아름다운 여인은 반드시 취해간다는 소문까지 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쁘고 아름다웠던 아내 사라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사라에게 앞으로는 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내 누이동생이라고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일이 화근이 되어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애굽 왕 바로는 그 말이 곧 법이었던 강대국의 절대군주입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간 아브라함은 기근보다 더 큰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약속의 땅을 떠난 불신앙을 회개하고, 사라를 애굽 왕 바로에게서 구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다시는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삶에 개입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12: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는 그 재앙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 때문에 임한 재앙임을 알고, 아브라함과 그 조카 롯에게 많은 재물을 주며 애굽에서 떠나가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애굽에서 빠져 나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의 실패를 통해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 배운 내용 중 하나는 하나님이 주권적인 섭리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약속의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때 배운 신앙이 곧 그 진가를 드러내게 됩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소유가 많았던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 사이에, 짐승을 먹일 초장과 물을 놓고 다투게 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 조카 롯에서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확신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롯에게 선택권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그것은 도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롯이 먼저 가나안 땅을 선택하게 되면,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섭리를 믿는 믿음 안에서 먼저 선택권을 준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에게 우리게 믿음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심과 통치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이 되어서, 삶을 너무 염려하지도 말고, 너무 조급해하지도 말고, 섭리하심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여유를 가지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남방 네게브 지역의 브엘세바로 그 거처를 옮겨가서 살게 됩니다.

이 지역은 아주 따뜻한 지역이었고, 토지는 아주 비옥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메마른 광야와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토질이 아주 좋아서 물 근원인 샘만 확보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그런 땅이었습니다. 나중에 이삭이 이 지역에서 살면서 가뭄 때에도 100배의 수확을 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 우물을 파고 정착 생활을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삶은 누가봐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살아가는 삶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랄 왕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찾아와서 아브라함과 화친을 맺자고 요청하였습니다. 창세기 21:22-23절입니다. 그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는 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 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믿음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면서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며 사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는 아무 힘도 없고 아무 능력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는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삶을 긍정하며 기쁨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해야 하는 일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보고, 자신들도 우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나아오면,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우리 삶에 은혜와 복을 주고 계신 하나님을 전해주어서, 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에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거기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 주심을 감사하며 늘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개인들을 보면 부족한 점도 있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가정을 이루어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믿음이 좋았던 다윗의 가정생활은 어떠했습니까?

개인적으로 보면 다윗도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보면 다윗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브라함과 달리 불행한 가정생활을 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비록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살려고 한 사람이었고, 사라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에 보조를 맞추어서 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5-6절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며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사라는 화장을 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보석으로 자기 단장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 단장을 한 거룩한 부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라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대적하였듯이, 사사건건 자기주장을 하고 아브라함을 대적하고 적대적이었다면 아마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며 보조를 맞추어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부족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아내 미갈은 사라와 달랐습니다. 사울 왕의 딸 미갈이 시골 총각이었던 다윗을 향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우월감은 사울 왕조가 다윗의 왕조로 바뀐 이후에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좋게 보고 다윗의 삶을 좋게 평가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왕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바지가 내려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하체가 사람들에게 다 드러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더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다윗의 실수를 자기 실수같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 실수를 덮어주고 위로해 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이스라엘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 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라고 비난했습니다. 미갈은 법적으로는 다윗의 아내였지만 실상은 다윗의 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다윗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사는 가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된다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믿음만으로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을 대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가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오늘날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남자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여자 중심의 사회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늙어서 밥도 못 얻어먹는 시대라고 하고, 노년에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여자를 떠받들며 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요즘 여자들에게 순종하는 생활을 말했다가는 이혼당하기 십상이라고 하며, 세상 권력자들도 세상에서 권력자이지 가정에서는 아내들이 그 권력자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이런 사회현상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시대가 말세이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이 시대가 불신앙의 시대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참된 믿음의 여인들은 미갈과 같이 머리를 쳐들고 대립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독사는 머리를 쳐들어도 익은 곡식은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악은 대립을 일삼게 하여도, 의는 화평을 추구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바른 태도에 대해 로마서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로마서 12:2절이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채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라.’

 

우리는 이 시대 풍조에 적응하며 살 수도 있고, 믿음으로 시대현상을 극복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은 개개인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의 삶을 선택하여 사시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삶에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다윗과 같이 실패한 가정 만들어 가지 말고,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 안에서 하나 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서, 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면서 참 행복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전해주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가정 이루어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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