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찾아내신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나?
창세기 6:5-8
오늘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진 의인들입니다. 시편 34:1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찾으신다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찾으신다는 것은,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행하며 사는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들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누더기와도 같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들이 대단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로운 사람은 이와는 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약속해 주신 복음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그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의인들을 찾으실 때, 하나님께서 찾으신 바가 된 사람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노아였습니다. 창세기 6:9절 말씀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고 합니다. 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의인들을 찾으실 때, 노아와 같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찾으신바 된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는 의인이다.’라고 인정해 주시는 그런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금방 우리 마음속에서는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노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느냐? 는 것입니다. 노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에 의해 찾으신바 되었냐? 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신 노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노아가 살았던 그 당시 상황 속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살펴볼 것은, 노아가 살았던 그 당시 세상의 모습입니다.
노아가 살았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6:5-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노아가 살았던 당시 시대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죄악’이란? 죄가 구체적인 삶의 행위로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다’는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이 지으며 살았던 죄악들이 일부 어떤 나쁜 부류의 사람들만 행하며 산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 행하며 산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만 행하며 산 것이 아니고, 모든 지역의 사람들, 모든 부류의 사람들, 모든 시기의 사람들이 다 죄를 지으며 살았던 시대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지으며 살았던 죄악들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시는 죄와 악이 편만한 시대, 충만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죄가 일상이 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죄와 악이 범해지고 있는 소식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노아가 살았던 시대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죄를 지으며 살았고 그 결과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그 다음은 사람들이 “그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 모든 생각들이, 마음으로 계획하는 그 모든 계획들이 모두 다 악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모든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전적 타락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으로 말하면 ‘성악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 인류는 아담 안에서 모두가 다 죄인으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된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합니다.
5-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먼저 하나님께서는 “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되 겉으로 들어난 사람들의 행위 뿐 아니라,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행동까지 모두 다 보고 계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불꽃같으신 눈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들어난 행위 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과 계획까지 다 보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불꽃같으신 눈앞에 감추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다 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왜 사기를 치고, 속이는 삶을 살아갑니까?
왜 정치인들은 은밀히 죄악을 범해 놓고서도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합니까? 왜 이단의 괴수들이 잘못된 신앙과 잘못된 윤리관 도덕관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합니까? 하나님이 그런 자신의 생각과 행위들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언제 변합니까?
사람들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변합니다. 이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제가 전에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이 하나님을 만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나니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되더라고요. 내가 세상 사람들과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졌다는 것을 매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이 사람들은 자기도 죄인이면서 너무 쉽게 다른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책망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면 삶의 변화가 따라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을 따지거나 책임을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서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잘못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책망하고 정죄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바라보며 긍휼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이런 변화를 경험했던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51:13절입니다. ‘......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다윗은 죄인들을 정죄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으로 인도하는 전도자를 자청하고 있습니다. 아멘.
이런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그 누구보다 더 잘 아시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그 죄를 정죄하려면 예수님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8:11절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3: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우리들도 세상의 죄악을 판단은 하되 정죄하지는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매여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입니까?
그 다음에는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타락한 인간을 지켜보시며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그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기대하신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행복된 사람들의 모습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사람들은 망가져버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 근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78:40절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게 함이 몇 번인가?”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삐 뚫어진 마음과 그 믿음 없는 모습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슬프게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악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던 노아 시대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7절 말씀을 보면 ‘내가 창조한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짐승들까지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무엇을 가지고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이렇게 죄악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전에 죄악이 관영했던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셨듯이, 말세에는 이 세상을 불로 태워버리는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말세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는 이미 말세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나타나고 있는 종말의 징조들은 무엇입니까? 디모데후서 3:2절 말씀을 보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요즘은 물질 만능의 시대, 황금만능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돈이 바로 권력이고 힘이고 정의가 된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 조금 있고, 권력을 조금 가지게 되면, 거만하고 자만하고 교만하게 굴지 않습니까? 심지어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 이 돈을 더 의지하고 돈을 더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3절 말씀을 보면 “말세에는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 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 마태복음 24:11절을 보면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처럼 요즘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분수도 모르고 행동합니까?
어디에나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고, 마음이 꼬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일의 삶 속에 악한 말 독한 말을 쏟아내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합니다. 이 시대가 악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여기서 한발 짝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부라는 사람들이, 목사라는 사람들이 막말을 하고, 저주의 기도를 하고, 이념 편향적인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시대입니다.
정치권은 어떻습니까?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각종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얼굴을 버젓이 들고 오히려 활개를 치며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우리 사회의 통념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뿐 아닙니다.
오늘날은 얼마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우리들을 미혹합니까? 심지어 사람으로 태어난 주제에 겁도 없이 ‘내가 재림 주이고, 내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만 약 40명이나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또 마태복음 24:7절 이하를 보면, 말세에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얼마 전에는 이 민족주의의 확산으로 다민족 국가였던 구소련 연방이 붕괴되지 않았습니까? 다민족 국가인 중국이 또 이 문제로 긴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은 이를 의식하여 티베트와 위구르 족의 독립 시도를 강압적으로 진압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중국에서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중국이라는 국가를 해체할 수 있는 뇌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선례가 될 수 있는 대만 독립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 전쟁까지 불사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날에는 기근과 지진, 쓰나미 등 천재지변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종말의 징조들이 이렇게 많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던 것”처럼, 오늘날도 똑 같이 종말의 날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세속적인 일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말세를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8:8절에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노아가 살았던 당시에도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듯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예수를 믿고,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다르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오직 노아 한 사람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이 있는 사람을 찾으실 때 발견한 사람은 오직 노아 한 사람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노아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이 두 관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오늘날에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계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는 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의 숫자가 수십억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보시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다시 올 말세에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노아와 다른 사람들을 갈라놓은 요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을 알려고 하면 우리는 창세기 6:2절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말씀은 당시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고를 때 육체적인 면을 보고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 생김새를 어떻고, 가문은 어떻고, 재력은 어느 정도 되고, 학벌은 어떻고 등등, 이 세상적인 조건을 보고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시대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3-4대 째 믿는 믿음의 가정에서는 사회적 지위나 학벌이나 재산은 보지 않고 믿음을 보고 며느리를 맞이하고 사위를 맞이합니까? 아니면 믿음보다는 세상적인 조건을 보고 결혼대상자를 찾습니까?
노아 시대나 우리시대의 결혼관이 비슷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노아시대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그 삶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그 죽었던 영이 다시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결혼조건을 보면 세상 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그 당시에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육신적인 신자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고 영적으로 거듭나 그 인격이 변하고, 그 삶이 변하고, 그 인생관이 변하고, 그 가치관이 변한 신자들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말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다 똑 같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을 보면 신앙을 가진 것과 신앙을 가지지 않은 것만 다르지, 그 살아가는 삶은 철저히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기준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노아시대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관점이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관계가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삶의 목표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하루하루의 삶과 똑같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분모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전제로 깔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신앙과 연관되어 있는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극명하게 달라야 합니다. 다르되 벨리알과 하나님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도 적대적이기까지 해야 합니다. 이 분명한 한계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육신에 속하여 철저히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영이 거듭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육신에 속했으나 이제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전에는 이 세상에 속해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자랑을 소유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하늘나라에 기업을 바라보고,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아두는 삶을 살고, 최종적으로 하늘나라를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이 세상의 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한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구체적 행위로 나타난 것을 죄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그 마음과 생각까지 죄라고 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노아 시대 성도들은 이렇게 살지 못하고 육신적이고, 세상 적이고, 불신앙적인 삶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그 죄를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120년 이라는 유예기간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육신에 속하여 형식적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충분한 시간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도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20년 동안 여전이 그들은 육신에 속하여,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 육신적인 일들만 쫓아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 속에서 노아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오늘 세 번째 살펴볼 것은, 노아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과 그 살았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던 믿음의 사람 노아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9절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첫째, 노아는 의인으로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로마서 3:10-12절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면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의인이 됩니까?
오직 한 길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의인이었다는 말씀이 알려 주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믿음을 보시고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 노아는 그 시대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이 보실 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 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세속적인 삶 일상적인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노아가 살았던 삶은 다른 사람들이 살았던 삶과 완전히 달랐다고 합니다. 창세기 7:1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향하여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노아가 ‘의인이요 완전한 삶을 살았다.’는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로서 그 삶이 경건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선행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노아의 삶이 하나님 앞에 의로웠고 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롭다고 한 것입니까? 아니면 노아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결과 완전한 삶을 산 것입니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한 8절 말씀을 보면 노아는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었고, 의롭다 함을 입은 결과 완전한 삶을 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노아는 먼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노아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답게, 의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삶의 변화였습니다. 이렇게 노아가 의인이었다는 말은 바로, 노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고, 그는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그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이익과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는 악이라도 서슴지 않았던 시대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세상에 속하여 물질적인 기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던 시대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다 육신에 속하여 육신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던 시대 속에서, 오직 노아만 그 영이 거듭난 사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았던 노아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삶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른 신앙의 삶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신앙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생애를 살아갈 때, 영이 다시 살아난 노아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영이 거듭난 우리들은 우리가 영혼이 거듭난 성도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아멘.
둘째, 노아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7절 말씀을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창세기 7:10절을 말씀을 보면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간 날로부터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가 이 땅에 내리기 전에, 아주 날씨가 맑고 화창할 때에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지금은 비록 비가 내리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곧 비가 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서 방주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가 가지고 살았던 믿음이었습니다.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을 마치 보는 것 같이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놀렸을 것입니다. ‘나이 드신 노인네가 망령이 나서 이 맑고 화창한 날씨에 비가 온다고 하며 방주에 들어가네.’ 라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에도 일주일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 밖에 모여서 비웃고 조롱하고 떠들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조롱하던 사람들과 같이 사람들은 ‘노아가 망령이 나도 단단히 났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홍수심판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노아는 이 믿음으로 순종하여 방주에 들어간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믿는 믿음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지라도 믿는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요구하신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고 믿습니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믿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도 노아와 같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고 그 음성을 듣지도 못하였고 손에 잡히는 증거도 갖고 있지 않지만,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우리 모두도 노아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아멘.
셋째, 노아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창세기 6:22절 말씀과 7: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기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라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자신의 계획과 목표와 뜻을 중요시하며 산 것이 아닙니다.
노아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제일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준행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순종하는 믿음이 노아가 가지고 살았던 믿음이었습니다.
노아에게는 세상 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아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노아에게 본받아야 할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면 전설로 전해오는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큰 박해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 박해 때에 목이 잘려서 순교하게 됩니다.
이 때 로마의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신앙의 신실한 증인들이 많이 죽고, 심지어 바울까지 죽은 지금, 베드로 사도까지 죽어서야 되겠느냐?’ 라고 하면서, ‘이 박해가 그칠 때까지 베드로 사도는 잠시 몸을 피하여 있어서 살아남아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이 말을 좋게 여겨서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막 로마를 빠져 나가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왜 지금 박해가 일어나고 있는 로마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네가(베드로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지 않고 로마를 떠나가니 내가 그 십자가를 대신 지기 위해서 로마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회개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당국자들에게 잡혀서 십자가형을 언도받았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나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똑바로 달려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순교일지라도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의 믿음이었으며, 우리들이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넷째,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노아가 가지고 살았던 믿음의 결론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습니다.
9절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 생각과 마음과 뜻과 계획이 같아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노아가 가지고 살았던 그 뜻이 그 계획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뜻과 계획과 일치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것이 승리하는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듯이, 우리 모두도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동행 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을 때 노아 밖에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아를 통해 세상에 믿음을 전파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7장을 보면 종말시대에는 이보다 더 상황이 나아보입니다. 여기에는 사명자로 부름 받은 144,000명의 사역자들이 나오고 있고 또 그 흰옷을 입은 무리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굳게 지키고 살아서 이 구원 받은 성도들의 무리 속에 들어가는 신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아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첫째, 노아는 믿음으로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노아는 보지 않고서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넷째,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아와 같이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지고 살아야 할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노아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가지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서 이 종말시대 속에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찾으실 때, 찾아지고 발견되어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오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생활 (0) | 2023.05.07 |
---|---|
말씀에 기초를 둔 신앙 (1) | 2023.04.23 |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 (2) | 2022.09.11 |
하나님의 이름 (0) | 2022.05.22 |
붕어빵 인생 (0) | 2022.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