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
출애굽기 20:7
우리 모두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름은 우리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이 자녀를 출산하고 그 이름을 지을 때 어떻게 짓습니까?
우리 자녀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다.’ 또는 우리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기대와 소원을 담아서 이름을 짓습니다. 저희도 자녀의 이름을 지어줄 때 고민을 많이 하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 아주 특이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이 천사입니다. 그래서 김 천사, 이 천사 등 다양한 천사들이 있습니다. 또 재림이라고 이름을 지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늘이라고 이름을 지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김 하늘, 이 하늘, 박 하늘 등 하늘의 종류도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가하면 사랑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사랑하며 살라고 그렇게 지은 것인지,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살라고 그렇게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랑이라는 이름도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만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도 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보고 사는 산과 강과 하늘과 바다와 같은 사물들의 이름도 있고, 공기, 바람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들에 붙여진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섬기며 살고 있는 하나님께서도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름들은 두 가지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는 이런 분이시다.’ 라고 알려 주신 이름들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며 불렀던 이름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에는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이름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혜롭고 위대하신 작명가 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창조하신 만물의 이미지와 쓰임새와 목적에 맞는 이름들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흑암의 깊음에 잠겨 있었던 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현상을 빛이라고 이름 지어 주시면서 ‘빛이 있으라.’ 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곧 바로 이 세상에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빛을 통해 어둠에 쌓여 있던 우주가 밝혀지는 현상을 낮이라 칭하시고, 빛으로 밝혀지지 않는 어둠을 밤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낮과 밤이 어우러져서 하루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또 새들이 날아다니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공간을 하늘이라 이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져 있는 물을 바다라 이름 지으시고, 각종 식물들이 자라나고, 곤충들이 기어 다니고, 짐승들이 걸어 다니는 곳을 땅이라고 이름 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마지막에 창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담게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하신 사람 중에 남자에게는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고, 여자에게는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그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이 말씀을 보고, 또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그 자녀 삼아주셨다는 이런 말씀들을 보고, 아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과 똑같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세기 1:26절 말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2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에는 ‘첼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모양’이라는 단어에는 ‘데무트’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려고 하면 이 두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우리말로 모양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데무트’는 그 생김새가 닮았거나 유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플라스틱으로 사람의 마네킹을 만들게 되면 그 마네킹의 겉모양은 사람과 똑 같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실재 속성과 성향은 사람과 전혀 다릅니다. 이 때 쓰이는 말이 데무트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첼렘’은 그 생김새는 전혀 다르나 그 내용은 동일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철이라는 동일한 재료를 사용하여서 독수리를 만들고 표범을 만들게 되면 그 겉모양은 서로 다르지만 그 재질은 똑 같은 것입니다. 둘 다 철이라는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때 쓰였던 말이 첼렘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되었다는 이 첼렘이라는 말은, 그 외형적인 모습이 닮았다는 말이 아니고,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그 본질과 그 속성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과 본질과 속성이 닮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이신 것 같이 우리 인간도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존재이신 것 같이 우리 인간도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의 신이신 것 같이 우리 인간도 지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되었다는 말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14:8-9절 말씀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이 왜 이 말을 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가 되신다.’ 라고 늘 말씀하시는데, 빌립은 그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한 번만이라도 보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런 요청을 하고 있는 빌립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나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를 본 자는 나와 똑 같이 생기신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라고 하신 것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그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외형적인 모습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그간 제자들과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 하시면서 보여주신 것은 인간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신적인 속성’이었습니다. 선적인 속성인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사랑하심, 거룩하심, 무죄하심’ 등등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고, 무죄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계속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나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멘.
사람이 사람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외형적인 모습과 조건들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내면적인 품성과 재능과 능력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사실 인간인 우리들은 정말 연약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피조물입니다.
코로나라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른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나님을 꼭 닮게 창조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존귀함을 함께 가진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런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권한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권한을 하나님의 형상을 함께 가진 존재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창세기 1:26-28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이것은 하나님의 실행하심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가 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권한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대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며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또 이 권세는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고 땅을 정복하며 살면서, 또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며’ 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권세 이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 ‘다스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주권을 행사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며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사람들이 자연을 훼손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개발하고 파괴하듯이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다스리라’는 말씀은 마치 목자가 정성을 다해 자기의 양떼들을 돌보듯이 그렇게 만물들을 정성을 다해 잘 관리하고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셔서 그런지 오늘날 자연보호나 환경오염 방지운동에 앞장서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 일하고 있습니다.
또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하신 만물들에 이름을 붙여 주시는 일을 하셨듯이, 그 형상을 닮게 창조하신 아담에게 각종 동.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창세기 2:19-20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그래서 아담은 부엉부엉 우는 새라고 하여 부엉이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나무에 구멍을 내면서 딱딱 소리를 낸다고 해서 딱따구리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밤마다 뻐꾹 뻐꾹 서글프게 운다고 해서 뻐꾸기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아담이 지어준 그 이름들을 통해서 사물의 특성을 알고,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사물들의 이름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듯이,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이름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알려주신 이름들은 대략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먼저는, 일차적인 하나님의 이름들입니다. 이 일차적인 하나님의 이름에는 ‘여호와’ ‘엘로힘’ ‘아도나이’ 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들이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들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아도나이’ 라는 이름은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만유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나 자신의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했던 이름입니다.
다음은 이차적인 하나님의 이름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에다가 다른 것들을 붙여서 불렀던 이름과 또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에다가 다른 것들을 붙여서 불렀던 이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엘 샤다이’ 즉 전능하신 하나님, ‘엘 로이’ 즉 감찰하시는 하나님, ‘엘 올람’ 즉 영생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등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이래’ 즉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즉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살롬’ 즉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등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이름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이름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하나님의 이름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해 주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지어주는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의 이름을 ‘복덩이’라고 지어준다고 해서 정말 그 자녀가 이름대로 복덩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덩이라는 이름은 다만 그 부모의 기대와 소원을 담고 지어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이름대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반드시 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다른 점입니다.
예를 들면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창세기 1-2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에게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엘로힘의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오늘날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그 이름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고, 오늘날도 여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이 엘로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환경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고 도움의 손길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아멘.
구약의 족장들이 믿고 의지했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언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까? 애굽에 내려가서 그 아내 사라를 애굽 왕에게 빼앗겼을 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무사히 그 아내 사라와 함께 애굽에서 나올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아멘.
이 엘로힘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친히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창조주의 권능의 손으로 우리들을 보호해 주시며, 창조주의 강한 손과 편 팔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 못하실 것이 전혀 없으신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여호와 이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여호와 이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그 아들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앞서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앞서 행하시면서 아브라함이 번제로 바쳐 드리려고 하는 이삭 대신에, 제물로 바칠 수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와 이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뿐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서도 앞서 행하시면 준비하시고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하나님을 믿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일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며 살고 있는 이 모든 은혜들은, 사실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께서 이미 어제 우리 앞서 행하시면서 오늘을 살아갈 우리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두신 삶입니다. 아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어제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해 주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누리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 주심을 감사하며 주어진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여호와 살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 여호와 샬롬 하나님은 기드온이 만났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미디안의 압제 속에 고통 하며 살아가는 그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려고 기드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은 범죄한 그 백성들을 심판의 하나님,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치는 그 백성들의 삶 속에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가 경험한 하나님을 여호와 샬롬 즉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기드온을 찾아가서 평강을 전해 주신 이 하나님께서, 코로나의 위기를 만난 이 세상 속에, 전쟁의 위기 속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경제적인 여건 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 기업인들과 우리들의 삶 속에도 평강과 안식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육 간에 연약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영과 육을 다 치료할 수 있으신 이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아멘.
‘여호와 닛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까지 그 이름대로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시는 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아멘.
또 하나님의 이름들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이름을 알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고, 또 그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여러 가지 이름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계시를 통해서 첫째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셋째, 우리는 그 알게 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에 대해 십계명에서는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1계명에서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2계명에서는 새긴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3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4계명에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우리가 불의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의 불의함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욕을 먹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녀 된 사람들이 훌륭한 일을 하면 그를 낳아주신 부모님들이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녀 된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면 그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누를 끼치게 됩니다.
전에 수많은 여자들을 죽인 살인범 강호순이 붙잡혔습니다.
그는 워낙 흉악범이라 그 신원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러자 강호순의 형은 살인범을 동생으로 둔 것이 부끄러워하며 그 행적을 감추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했습니까? 동생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악한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동생으로 두었다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렇게 종적을 감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곧 바로 하나님이 욕을 먹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 3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들의 무엇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위선적인 행동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며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인 것 같이 말을 하면서, 우리들의 행동이나 삶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다운 삶을 살지 않게 되면, 이런 우리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모임에 가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하면서, 그 곳 사람들과 같이 술을 마시며, 다른 사람들을 흉보는 나쁜 말을 같이하고 나쁜 행동을 같이 하게 된다면,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는 사이좋은 척 할지라도, 돌아서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똑 같다고 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불의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 담배의 골초가 되어서 연신 담배를 피워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 앞에서는 뭐라고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서서는 다 우리를 나이 롱 신자라고 욕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또 레위기 19:12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 너희가 거짓 맹세를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하지 말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입만 열면 하나님을 말하고, 그 누구보다 하나님 잘 믿는 자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약속을 해 놓고 늘 약속 시간에 늦는 다거나, 약속한 것을 잘 지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신앙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을 보면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약속은 많이 하지만 그 약속들이 입에 발린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말한 것을 지키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쉽게 말하고 약속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우리의 그런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깨닫게 된 은혜를 감사하며 그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12:4절입니다.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구속과 섭리와 사랑과 은혜 등등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모든 은혜의 역사들을 묵상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며 그 은혜 주심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여호와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해야 합니다.
로마서 9:17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이 우리들을 통해서 온 땅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그 이름을 전해 받은 열방 모든 민족들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또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게 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삶이라고 합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애독하는 산상설교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16절입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선하고 착한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도록 하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의 행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욕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행하게 되면, 그런 우리를 말로는 칭찬해 주지는 않을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게 됩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삶에 우리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또 다시 주신 한 주간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선한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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