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2. 20. 13:51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다

창세기32:24-30

 

1. 20년 처가살이

 

성경이 전해주는 바에 의하면 야곱은 권모술수가 능한 사람,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이 나중에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자기보다 훨씬 더 사기꾼 기질이 강한 외삼촌 라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20년간 더부살이를 하게 됩니다. 야곱은 이 20년 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당시 야곱의 가정을 보면 그가 책임져야 할 4명의 아내와 12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 하는 일로 보면 야곱은 자기 소유의 가축들을 관리하고 돌보면서 또 외삼촌 라반의 가축들을 관리하고 돌보아 주어야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야곱은 많은 일군들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야곱은 이렇게 방목을 주업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근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런 야곱의 생활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보내는 하루하루였습니다. 이 얼마나 힘든 생활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최근에는 그의 후원자인 외삼촌 라반과 그 자녀들과의 사이도 악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 때문에 라반의 집에 복을 주실 때에는 그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의 삶에 개입하셔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자,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소유를 빼앗아 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대하는 태도도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있었던 야곱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해 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때가 있는 들로 불러서, 그들에게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해 주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도 들려주면서,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었습니다. 라헬과 레아는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자신들도 남편 야곱을 따라 함께 떠날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다 행하라.’고 동의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마침 라반과 그 아들들이 양털을 깎으려고 간 날을 D-day로 삼아 그 아내와 자녀와 모든 가축들과 소유물을 다 챙겨 가지고 가나안 땅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이 떠난 후 3일 되는 날에 라반은 야곱이 도망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을 쫒아가서 그 소유재물을 뺏고 자녀들을 붙잡아서 데리고 오려고 그 형제들과 함께 야곱을 쫒아 가서 7일 후에 길르앗 산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전날 밤에 하나님이 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 악간에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라반은 야곱에게 어떤 추궁도 하지 않고 그 어떤 해도 입히지 못하고, 서로 사이에 경계선을 정하고 앞으로 그 경계를 넘어 서로를 해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세우고 헤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외삼촌과의 문제는 잘 해결되었습니다.

 

2.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에서

 

그런데 아직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 형 에서와의 문제였습니다. 야곱은 형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그 사자를 세일 땅 에돔 들에 살고 있는 에서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그 보냈던 사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 즉 그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러 오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에서가 야곱을 마중하러 나온다면 이 많은 군대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에게 아직까지도 적개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야곱은 그 떠나온 외삼촌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에서에게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심히 두려워했고 답답해했다.’고 합니다. 야곱은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대다수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가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사이에 있었던 문제는 2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전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권모술수에는 아주 능한 야곱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창세기 32:11절입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이 위기를 스스로 해쳐나가야만 했습니다. 이 때 야곱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너는 이제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해 줄 것이다.’ 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야곱이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그 형에서를 달래고 그 노여움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3. 위기의 순간 야곱이 사용한 방법

 

이 위기의 순간에 야곱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까?

 

첫째,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32:7절입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야곱은 그 가축 때를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선택한 방법이 32: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야곱이 다음으로 선택한 방법은 형 에서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먼저 에서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소유 중에서 형에게 줄 예물로, 암염소 이백과 수 염소 이십을 택하여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암양 이백과 수양 이십을 택하여 보냈습니다. 또 상당한 거리를 두고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를 보냈습니다. 또 그 다음으로는 암소 사십과 황소 열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 나귀가 이십과 그 새끼 나귀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지극 정성을 다해서 보내는 예물을 받고 에서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지길 바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에서의 마음이 풀어지면 좋겠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풀어지지 않았을 때를 대비하여 33:1절 이하를 보면 그 가족을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맨 앞에 서고, 여종과 그 자식들을 그 다음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을 그 다음을 따르게 하고, 라헬과 요셉은 맨 마지막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에서가 와서 자신을 치게 되면 자신이 형의 군사들과 싸우는 동안 그 아내와 자녀들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흩어져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의지하며 살았던 야곱의 모습을 또 다시 보게 됩니다.

 

둘째, 이런 야곱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을 건너므로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야곱은 가족들과 가축들이 야영 준비를 하는 동안 강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나아왔고 야곱은 그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했다고 합니다. 24절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이 구절을 전통적으로는 야곱이 홀로 압복 강가에 남아서 하나님께 밤을 지새우며 기도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 사용된 씨름이라는 단어 아바크씨름하다.’ ‘맞붙어 싸우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문법적으로는 니팔, 와우, 연속, 미완료 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야곱은 그날 밤에 얍복 강가에 있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 맞붙어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 보면 본문은 첫째, 야곱은 가족들과 가축들이 다 강을 건너게 한 후에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야곱은 그 밤에 얍복 강가에 있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 생사를 건 싸움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싸움은 왜 일어났습니까?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아마 야곱은 자기에게 온 이 사람을 에서가 보낸 자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생사를 건 싸움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이때가 야곱이 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간 야곱이 변화되기를 오래 동안 기다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잘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힘과 능력과 수단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야곱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려고 이 싸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집이 얼마나 강하였든지 밤새 싸웠으나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25절입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허벅지 관절을 오늘날 우리는 고관절이라고 합니다. 이 고관절 즉 엉덩이뼈가 어긋나게 되면 걸음을 재대로 걸을 수가 없습니다. 김양자 집사님 김정숙 집사님이 바로 이 고관절 때문에 걷지 못하게 되지 않습니까? 한학국 성도님이 이 고관절의 통증 때문에 고통하며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고관절은 우리 몸에서 아주 중요한 뼈입니다.

이 고관절은 그 사람의 힘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야곱의 고관절 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야곱은 그 밤에 자신이 가진 생명의 능력을 다 잃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더 이상 의지하고 살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기꾼이라는 그 이름과 같이 인간적인 꾀와 수단과 방법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쟁취해 내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야곱이 그 힘과 생명의 능력을 상징하는 고관절이 위골 되었다는 것은, 이제까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대로 살아오던 그 삶이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이전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몸 하나도 가누기가 힘이든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자기 꾀와 자기수단과 방법으로 살아온 야곱은 여기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 서게 되자 그 때 야곱은 비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보니 자신이 밤을 지새우며 싸웠던 그 사람이 에서가 보낸 자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자 야곱은 환도 뼈가 위골되어서 아픈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며 이제 결사적으로 하나님께 매 달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그 완고한 고집과 아집은 꺾여 지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가던 야곱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요구하신 것은 야곱 자신의 변화였습니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온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으로 변화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을 이어 받을 사명 자 즉 세상 만민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는 거룩한 족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야곱은 그 형 에서와의 얼키고 설킨 원한 관계도 해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의 변해야 즉 신앙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고’ ‘삶이 변하면 그 나머지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4. 야곱의 변화

 

그러면 이 일을 통해 야곱이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 증거가 바로 27-28절입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이 말씀은 이전까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오던 야곱, 사기꾼 같은 야곱은 죽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세속적인 사람을 신앙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하고, 육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하고, 이기적인 사람을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합니다. 사람의 변화는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데서 시작됩니다. 야곱이 바로 그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변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삶에 개입하시자 방탕한 삶을 살던 어거스틴이 거룩한 교부가 되었습니다. 의심과 회의 속에 고통 하던 루터가 변하여 타락한 종교를 개혁하는 개혁자가 되게 했습니다. 심지어 약삭빠르고 사기꾼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야곱이 변하여 거룩한 영성을 소유한 족장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이 주시는 변화의 역사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지 관계없이 저절로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어떤 사람들은 변화의 속도가 느릴지라도 분명한 것은 결국에는 모두가 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입니다. 믿음이 가져다 주는 이런 긍정적인 변화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5.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이유

 

우리가 이삭의 아들 에서야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해 하는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직하지만 정직한 삶을 살려고 했던 에서를 택하시지 않으시고, 사기 군과 같은 사람,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과 잔꾀에 능한 야곱을 택하셨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야곱이 살아온 삶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야곱을 택하셨습니까? 이 야곱에게는 이런 인간적인 특징을 넘어서는 또 다른 특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특심한 신앙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귀하게 보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떤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야곱은 모테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야곱은 그 믿음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의 유업을 이어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벌써 장자의 자리를 놓고 에서와 다투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 순간 잘못된 판단의 결과 동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이 보니 그 형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기진맥진하고 있을 때 야곱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 이 행동은 형의 입장은 전혀 안중에도 두지도 않았던 야곱의 교활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야곱은 그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이 들통 나게 되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까지 야곱은 그 눈이 어두웠던 아버지를 속여 가며 장자의 축복을 받아 내었습니다.

 

어디 이것뿐입니까?

지금 얍복 강가에서는 그의 신앙심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둘째, 환도 뼈가 위골 된 상태임에도 결사적으로 매달리며 하나님께 은혜와 복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기도의 자리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거룩한 족장 야곱에게는 이렇게 얍복 나루터의 결사적인 기도자리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총리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았던 다니엘에게는 하루 세 번씩 기도하던 기도의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섬겼던 에스겔에게는 바벨론 그 발 강가의 기도 자리가 있었습니다. 사사시대와 왕정 시대를 이어주는 유명한 선지자 사무엘에게는 기도 쉬는 것을 죄로 알고 기도에 전념했던 마하나임이 있었습니다. 기도의 여인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는 하나님과 마음을 통하며 기도하였던 실로의 기도자리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과 다윗과 같이 새벽을 깨우는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까? 정규적으로 모이는 예배 시에 다른 사람보다 먼저 와서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까? 혹은 예배 후에 홀로 성전에 남아서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가 있습니까?

 

우리들도 야곱과 같이 나만의 기도의 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나만의 기도의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되면 그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변화가 우리에게도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되어야 비로써 변화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자신이 가지고 사는 믿음을 세상에 전해주며 사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다른 사람들보다 잘난 것이 있어야 신앙을 전하고 또 간증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어서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기도하는 우리들을 만나주시고 우리 기도를 들어주셔서 세상에 전할 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간증을 하기도 하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가정주부들은 특히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만큼 귀한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주부가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한가한 오후 시간에도 기도하고, 한적한 밤에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부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서 흘린 눈물의 기도는, 남편에게는 신앙에 생명을 더해주게 하고, 자녀들은 생명을 가지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아내의 기도는 가정의 등불입니다. 아내가 기도하는 가정은 마치 등불이 켜 있는 집 같이 어둠의 권세가 틈탈 수 없습니다.

 

남편들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남자들은 기도를 잘 안합니까? 대부분의 남자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삶이 아무리 바쁠지라도 남자들도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들 중에는 유명한 기도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자들 중에서도 유명한 기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에 5만 번이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도 남자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한 사람은 모세와 아론과 훌 이었습니다. 남자들을 체질적으로 활동을 잘하고 기도를 못한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남자들도 기도를 잘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안 하니까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성령이 기도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남자들이 기도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게 됩니다.

 

6. 야곱과 에서의 화해

 

야곱이 얍복강 기도에서 승리한 후 맞이하는 새 아침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31절입니다.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 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난 후 기도의 어두움 밤이 지나고, 은혜의 새 아침의 해가 돋았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아침이었겠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인생의 새 아침이 다가옵니다. 이 새 아침의 해가 떠오르자 야곱 앞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삶이 무엇입니까? 이전에는 원수였던 형 에서와의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승리를 하였다고 해서 야곱에게 승리의 삶이 주어지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야곱이 하나님과의 기도에서 승리하였기에 하나님께서 그 형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 말씀을 오해하여서 남편이 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녀가 변하게 해 달라고 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아주 초보적인 기도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야곱의 기도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변한 것을 이름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대와 같았던 시몬이 반석과 같은 사람 베드로로 변한 것이나. 큰 자라고 자부하였던 사울이 지극히 작은 자 바울로 그 이름이 변한 것은 다 그 사람이 그렇게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언어입니다. 마찬가지로 사기꾼 같은 야곱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로 그 이름이 변한 것은 실재로 야곱에게 이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야곱의 기도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게 하는 기도제목이 아니고, 기도를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우리 자신이 변화되면 그 모든 문제들은 다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가 깨어지고 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야곱은 그 나이가 약 70(?) 정도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자아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고관절 뼈를 치신 후에야 비로써 그 자아가 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이 변하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비로써 야곱을 축복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29절입니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야곱을 축복해 주시길 원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야곱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축복해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고 하시는 말씀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은 이 축복을 70세나 되어서야 받게 됩니까? 그것은 자아가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같습니다.

내가 깨어질 때 비로써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예비하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도할 때 그 앞에 당면한 문제들만을 위해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보다 먼저 자신이 깨어지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또 야곱이 변하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30절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이제까지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 풀릴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도 하고 감격도 하였지만, 형 에서와 같은 문제가 그 앞에 다가올 때는 불안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야곱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욥도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욥이 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자녀의 복과 물질적인 복과 아내의 복과 마치 목자가 울타리를 쳐서 가축을 지켜주듯이 그렇게 자신과 그 삶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극한 고난을 격고 난 후에는 그 신앙이 변했습니다.

사람들이 눈과 눈으로 마주 보면서 교제를 하듯이, 욥은 그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며 사는 신앙으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복을 통해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보고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으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또 야곱이 변하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셋째, 에서를 보는 관점이 변했습니다.

33:10절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전에는 야곱에게 에서는 극복해야 될 상대였습니다.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변하고 나자 이제 그 형 에서가 어떻게 보였습니까?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아 보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야곱이 영적으로 캄캄한 어두움 밤이 지나고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때 느꼈던 그런 기쁨과 감격이 그 형 에서의 얼굴을 볼 때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전에는 어떻게 하든지 형의 것을 빼앗으려고 했던 야곱이 변화되어서 이제는 어떻게 하면 내것을 형에게 줄까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강권하여 받게 하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왜 이렇게 변했습니까?

먼저 자신이 변하니까? 과거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동생인 자기가 형의 장자 됨의 축복을 어떻게 하든지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런 자신 때문에 이제까지 당하였던 형이 괴로움과 아픔과 분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야곱은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 형 에서앞에 나갈 때 어떻게 나아갔습니까? 마치 아버지가 물려준 전 재산을 다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갔던 탕자가 아버지 볼 면목이 없어서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마시고 저를 종의 한 사람으로 써 주소서 라고 한 것과 같은 심정으로, 야곱은 일곱 번 땅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며 그 형 에서에게로 나가지 않았습니까?

 

이런 변화를 고린도 전서 5: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요점도 그리스도인의 자기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변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아멘.

 

야곱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가 변하게 되자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아침 해가 떠올랐습니다. 야곱은 20년의 힘든 도피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무 두려움이 없이 가나안의 주인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믿음의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형 에서를 두려워하면서 힘든 처가살이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외삼촌 라반에게 아내와 자식을 빼앗길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의 기도를 통해 그 인생의 새아침을 맞이한 것입니다. 20년의 어두움이 물러갔고 인생의 새로운 아침이 밝아왔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늘의 별들처럼 많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새아침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기도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입학하기 전에 철야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어떨 때는 저녁 어두울 때 홀로 불광동 뒤 바위산으로 올라가서 새벽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마치 야곱 같이 어제와 전혀 다른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기도하면 인생의 새아침을 맞이합니다.

이 말은 기도한다고 그 삶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기도한 후에 우리가 영혼의 눈을 뜨게 되고, 브니엘과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고, 신령한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 응답 중에 가장 중요한 응답은 영적으로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7.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힘이 어디 있습니까?

그 이룬 성공에 있습니까? 그 얻은 재물에 있습니까? 그 습득한 지식에 있습니까? 아니면 인격의 고귀함에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인 힘에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힘은 영적인 힘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적인 힘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우리들도 기도함으로 이 영적인 힘과 권능을 받읍시다.

이 영적인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영적인 은혜를 받으면 인격이 변합니다. 영적인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열매가 그 삶에 나타납니다. 영적인 은혜가 충만하면 헌신의 사람이 됩니다. 영적인 은혜가 충만하면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두도 믿음 안에서 평생을 기도하면서 살게 될 터인데, 하나님께서 기도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야곱에게와 같이 그 얼굴을 대면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때마다 영적인 충만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 것이 바로 우리의 변화입니다. 먼저 내가 변하므로 우리 가정이 살고, 우리 교회가 살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복을 하나님께서 기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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