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시는 복
말씀 : 창세기 1:26, 28
‘복’이라는 말을 싫어할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 특히 우리민족은 복에 대한 집착이 어느 민족보다 강한 민족입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을 보면 집 안에도 대문에도 생활용품들에도 ‘복 자’ 새겨 놓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복 자가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요즘은 사라진 풍습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새해 첫 날 새벽에는 복조리 파는 사람들의 소리로 동네가 소란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성경에도 ‘복’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복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고 있는 곳은 창세기입니다. 1:22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또 1: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저주 받은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현실은 아담의 범죄로 에덴을 잃어버린 삶, 그 살아가야 하는 환경과 여건이 어려워진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럴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복 주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라. 번성하라.’라고 말씀하신대로 인류는 지금까지 ‘생육하고 번성하여’ 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또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라고 하심 같이, 수많은 새들이 하늘을 날고 있고, 각종 물고기들이 물에서 헤엄치고 있고, 각종 들 짐승들이 땅위에서 번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결실의 계절 가을은 찾아왔습니다.
시간을 내서 이 가을 들판에 나가 보십시오. 그 들판에는 여전히 사람과 동물들이 1년 동안 먹고도 남을 만한 풍성한 열매들이 맺혀있습니다. 우리가 이 가을 들판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복 주심입니다. 결실의 계절 추석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복 주심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때로 우리 여건이, 현실이, 환경이 어려울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 믿음 가지고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금년 추석을 맞이할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종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은 두 가지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의 복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원의 복입니다. 창조의 복과 구원의 복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대표적인 복입니다.
먼저, 창조의 복입니다.
창조의 복은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창세기 1:22절과 1:28절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창조의 복에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히브리어 ‘바라크’라는 동사입니다.
동사는 행위와 동작과 연관 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창조의 복은 피조물들의 행위와 동작과 연관되어 주어지는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나가려는 동작을 할 때’ 주어지는 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원리는 이 창조의 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큽니까? 매일 먹고 마시고 자고 노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성공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까? 성공하기 위해서 계획하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공하게 됩니다.
운동경기도 같습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운동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겠지만 재능이 있더라도 그 운동경기에서 우승자가 되려면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훈련을 하고 땀을 많이 흘리며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승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창조의 복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오늘날 삼성을 일구어 낸 고 이건희 회장과 같은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라는 기업을 혁신시키기 위하여 그 직원들에게 마누라 빼고는 다 바꾸겠다는 각오로 일해 달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 삼성을 오늘날과 같이 세계 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런 이건희 회장의 재력과 영향력은 대단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3수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3수후에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이 바로 이건희 회장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받고 살았습니다.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이 창조의 복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현대 중공업을 일으킨 고 정주영 회장일 것입니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울산 해변 가의 드 넓은 모래사장을 보면서, 여기에 아시아 최고 조선소를 건설하며 좋겠다는 꿈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꿈을 이루어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이루어 낸 것이 바로 현대중공업입니다.
어디 이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창조의 복은 사람들의 행위와 동작과 연관되어 있는 복입니다. 그래서 뭔가 하려고 하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받으며 사는 복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절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떻게 산다고 합니까?
늘 늦잠이나 자고, 오락이나 하며 놀고, 술이나 마시며 지내고, 헛된 공상 만 하며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창조세계 속에서의 복은 계획하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 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창조하신 피조물들에게 이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이 복은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복입니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 성공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어리석은 자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남들보다 더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창조의 복을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창조의 복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창조의 복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보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성공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그래서 사회적인 영향력이 큰 사람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무에서 유를 이루어 내며 기업가로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무엇입니까?
비록 이분들은 창조세계 속에서는 성공한 사람, 뛰어난 사람들이었을지라도,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 아담의 죄와 저주 아래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육신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는 창조의 복’을 받아서 세계적인 기업의 오나가 되고 또 남들이 부러워하는 갑부가 되었지만, 그 영혼은 아담의 죄에 함께 속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아래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그 영향력이 대단했던 이건희 회장도 정주영회장도 결국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죽음이 그 인생을 끝마치게 할 때에, 그 자랑스러워 하던 사업의 성공도, 그 많은 재물도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 경험하게 되는 한계이며 현실입니다.
관점을 조금 바꾸어서 생각해 봅시다.
차라리 이건희 회장에게 그 성공이 없었고 그 많은 재물이 없었더라면, 차라리 사업의 실패자가 되고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그 삶이 훨씬 더 인간적이 되고, 훨씬 더 겸손하여 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전도자들이 다가서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고, 전도자가 전해 주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룬 그 성공이 그 많이 모았던 재물이 높은 담이 되고 견고한 성벽이 되어서, 복음 전도자들이 가까이 할 수 없도록 막았고,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는 복음을 들을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때로는 그 성공과 부요함이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이건희 회장이 이 일을 알았을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일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성공한 기업가가 된 것을, 많은 재물을 모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의 성공이 그 모은 많은 재물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요인이 되었음을 알고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이것이 창조의 복의 한계이며, 창조의 복은 받았으나 구원의 복은 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음은, 구원의 복입니다.
구원의 복은 창세기 3:15절에서 처음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요한복음 3:16절 말씀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안에서 저주 받은 인류를 위해, 둘째 아담이 되시는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 주셔서,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약속을 성취하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취해 주신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복입니다.
이후 이 세상 속에는 두 부류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고 멸망을 받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해 주신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 생각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삶이 변한 사람들입니다.
이것 뿐 아닙니다.
우리는 장차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찬양하고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며 살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 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토록 지옥의 형벌을 받으며 고통하고 절규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서로 다른 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 두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소망을 가지고 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하여 지옥의 심판과 형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삶이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의 복도 받지 못하고 구원의 복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창조의 복은 받았으나 구원의 복은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창조의 복은 받지 못했으나 구원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넷째는 창조의 복도 받고 구원의 복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중에서 성도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구원의 복도 받고 창조의 복도 받으며 사는 삶일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창조의 복도 받고 구원의 복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은 어떤 위험에 빠졌습니까?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지혜로 주변에 있는 나라들과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 정략결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략결혼이 올무가 되어서 자신과 그 백성들을 우상 숭배에 빠뜨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솔로몬에게 지혜를 배우며 살았던 아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잠언 30장을 보면 이 아굴은 어떤 기도를 하였습니까? 7-9절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아굴은 두 가지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헛된 말 거짓말을 멀리하며 살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도입니다. 내가 불의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를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말아 달라.’고 구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환경에 대한 기도입니다.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 다고 하지 않도록, 내가 가난해서 도둑질 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구했습니다. 이것은 상황이 나를 불의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지 않도록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아굴이 이렇게 기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굴은 그 스승 솔로몬과 같이 자신은 실패한 신앙인의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하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 복 있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굴과 같은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정리해 보면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먼저는 구원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솔로몬과 같이 그 삶 속에서 창조의 복을 받으며 살아도 복 있는 사람이고, 아굴과 같이 창조의 복을 받지 못하고 살아도 역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누가 불행한 사람입니까?
구원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건희 회장이나 정주영 회장과 같이 창조의 복을 받고 살았어도 복 없는 사람이고, 보통의 많은 사람들과 같이 창조의 복을 받지 못하고 살아도 복 없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창조의 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복을 통해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은 이 구원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존귀한 사람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믿음 이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 귀한 구원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 시편 1편에 나오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여기 복이라는 단어에는 아쉐르 라는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동사인 바라크와 같이 상태와 동작과 관련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형용사라는 단어가 보여주고 있듯이 이 복은 이미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는 상태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편 1편에서 복 있다고 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복은 이건희 회장이나 정주영 회장과 같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행동하고 노력한 결과로 주어지는 창조세계에 속한 복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복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복 영적인 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들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내가 그렇게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고자 하여 ‘악인의 꾀를 쫒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려고’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까지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믿음으로 살려고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하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1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그 존재가 변하고 그 삶이 변하여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악인의 꾀를 쫒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1편은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려고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고 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시편 1편은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멘.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복이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찬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복이 사람들에게 사용될 때는 믿음 안에서 누리며 사는 ‘행복한 상태’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까?
첫째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까?
내가 지금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 큰신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며,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게 되는 배경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전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런 삶이 바로 복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복 개념과 다른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복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살아가는 삶 속에 나타난 결과를 보고 ‘그 사람 복이 있다.’ 혹은 ‘그 사람 복이 없다.’ 라고 구분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연히 로또 복권을 샀다가 그 산 로또 복권이 1등에 당첨이라도 되면,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보고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로또 복권을 수 십 년째 샀지만 한 번도 당첨되지 않으면 이런 사람을 보고 지지리도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복 개념과 이 세상의 복 개념은 다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 개념은 이렇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 삶 속에 베풀어주시고 계시는 은혜를 깨닫고, 그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으로 영광을 돌려 드리며 사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의 복 개념은 이렇습니다.
세상은 그 나타난 결과가 좋으면 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여유 돈이 있어서 지방에 있는 땅을 샀는데, 그 땅에 곧 신도시가 들어서고, 또 신도시의 길이 그 산 땅 가운데로 나면서, 도로로 편입된 땅 값으로 많은 보상도 받고, 또 그 남은 땅이 도로변에 있는 금싸라기 땅이 되는 이런 결과를 보고 이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결과가 좋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까? 성경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고, 그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그런 은혜를 주시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참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이라는 말이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찬양이라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까?
둘째로는, 믿음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복이라는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찬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믿음 안에서 누리는 ‘행복한 상태’에 사용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그 살아가는 삶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반드시 믿음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느끼며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록한 옥중서신입니다.
요즘도 감옥 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의 감옥 생활은 아주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썼던 빌립보서를 보면, 4장의 짧은 편지 속에 ‘기뻐하라.’ ‘기뻐한다.’는 말이 16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면 죄수로 로마에서 감옥생활을 했던 바울에게 무슨 기쁨이 그렇게 많아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라고 했을까요?
바울은 환경적인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감옥생활은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가졌던 기쁨은, 환경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기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는 이 기쁨은 도대체 무슨 기쁨이었을까요?
이 기쁨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통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기쁨은 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같지 아니하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환경은 어떠하든지 행복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기쁨과 행복은 세상 부귀영화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누리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사는 기쁨과 행복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우리 마음 안에서 우리 영혼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기쁨이 충만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또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까?
셋째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리며 살고 있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자기 자신과 그 자신이 누리며 사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알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 말씀이 바로 이런 삶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가지게 된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은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쳐 헌신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알게 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빚으로 알고, 하나님께 진 빚을 다 갚겠다는 각오와 결단으로 복음전도자의 삶에 헌신하게 됩니다.
이 바울이 자기가 전도하여 세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증거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봐서 잘 알다시피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너희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기초를 정리해 놓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에서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고 그 답은 바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요약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게 되는 삶입니다. 이 복된 삶이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창조의 복과 구원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창조의 복만 누리며 삽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창조의 복과 함께 구원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까?
첫째,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삶을 삽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은혜 속에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삽니다.
셋째,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삼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 있는 삶이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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