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너는 행복자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8. 8. 15:35

너는 행복자로다

신명기 33:26-29

 

모든 사람들은 다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그 바라고 있는 행복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사람들마다 생각하고 있는 행복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학문적인 업적을 이루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한 육체를 가지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찾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행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돈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명예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화목한 가정생활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건강한 몸을 가지고 사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신명기 33:29절 말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무엇에 근거를 두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은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을까요?

첫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9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29절 말씀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한 사람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하고 있는 모세는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의 행복을 알고 있었을까요? 모르고 있었을까요? 모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의 행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세가 자신과 동일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당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을 경계하여서, 남자 아이를 낳으면 애굽 강에 던지라고 하는 반인륜적인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강물에 던지지 않고 숨겨서 키웠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점점 자라면서 더 이상 숨겨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놓고 기도하던 중에 갈대상자를 만들어서, 상자 속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그 바깥쪽에 역청을 바르고, 모세를 그 상자 안에 넣어 나일 강에 띄워 두고는, 그 누이 미리암으로 지켜보고 있도록 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왜 이렇게 했을까요?

아마 모세의 부모는 노아의 방주를 생각하며 갈대상자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의 방주를 통해 노아와 그 여덟 식구를 구원해주신 것과 같이 그 아들 모세를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갈대 상자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모세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두었던 사람은 바로 애굽 왕가의 하셉투스 공주였습니다.

당시 자녀가 없었던 하셉투스 공주는 모세를 발견하고 마음에 들어서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왕족들이 받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자신이 애굽 왕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했던 고민과 갈등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모세는 계속 애굽 왕족으로 살면서 그 지위와 특권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새로 알게 된 그 부모와 가족과 동족에게로 돌아갈 것인가? 를 놓고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한 예언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 예언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그는 덕망이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4대 만에 애굽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으켜서 애굽 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애굽 왕이 전에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남자 아기가 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고 한 명령도 사실 이 예언 때문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세는 어떤 결단을 하게 됩니까?

모세는 다른 이스라엘의 아기들은 다 애굽 강에서 죽어갈 때 오직 자신만 살려주시고, 또 애굽의 왕족의 일원이 되어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우며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신 이유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고 있었던 예언의 말씀이 자신에 대한 말씀이라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은 모세에게 강한 사명감을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에도 같지 않습니까? 우리의 사명감은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사명감은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남다른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오늘 이렇게 생애를 바쳐 주를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당시 모세가 했던 믿음의 결단에 대해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4-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렇게 믿음의 결단을 한 후 모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동족이 애굽 사람에게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다음 날에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동족끼리 싸워서 되겠냐고 하면서 말렸습니다. 왜 이런 일을 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할 수 있도록 하는 지도자로 하나님이 자신을 세웠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주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향해 당신이 왜 우리 일을 간섭하느냐? 누가 당신을 우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당신이 어제 죽인 애굽 사람과 같이 나도 죽이려고 하느냐?’ 라고 하면서 대들었습니다.

 

이 소문은 곧 애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모세가 애굽을 배반하고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보고를 듣고 군대를 풀어서 모세를 잡아 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군대를 피해 준비도 없이 애굽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디안 광야로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사명감을 깨닫고 그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특권들을 포기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모세의 믿음의 결단을 전혀 알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 모세가 받은 상처, 실망감, 좌절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모세는 대단히 큰 좌절감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4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가서 다시 부르실 때에 모세가 보인 반응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나는 입술이 둔한 사람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등등의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런 모세의 행동 속에서 우리는 40년 전에 모세가 받은 상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게 됩니다.

 

당시 모세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었겠습니까?

당시 모세는 나는 사람들에게서도, 하나님에게서도 잊혀진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도 배움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양치기 목동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명을 주시면서 부르시고, 좌절과 절망감 속에 살아가던 모세를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 그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호렙 산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구원을 경험하게 된 모세는, 자신과 동일한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너와 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한 백성이 누구냐.’ 라고 했던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에게 10재앙을 베푸시면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유월절에는, 어린 양의 대속적 희생을 통해 죽음의 사자에게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홍해 바다에서는 바다에 길을 내심으로 애굽 군대에게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사막의 열기와 한기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 광야에서는 물을 주시고, 양식을 주심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너와 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한 백성이 누구냐.’ 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일수록 동일한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들은, 구원 받은 다른 성도들의 존귀함을 모르기 때문에 성도들을 존귀한 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성경을 들고 교회 가는 사람만 보아도 그 마음이 감동되고, 지하철 속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저절로 축복하는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세에게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동일한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너와 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한 백성이 누구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행복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동일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존귀한 자 대하듯이 그렇게 대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보면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면 압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잘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잘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싶어 하면서도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에 제가 알고 있던 어떤 청년은 그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구원받나요?’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늘 묻고 다녔습니다. 그 청년은 정말 구원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늘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고 다녔어요. 그런데 그 청년은 아무리 구원에 대해 말해 주어도 구원의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다시 구원을 어떻게 받느냐고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너와 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한 백성이 누구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의 행복은 세상적인 환경과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행복한 자로다.' 라고 말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환경 좋은 조건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들은 물이 없는 곳 곡식을 심을 수도 없는 그런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광야에서 산 40년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삶을 내다보면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일곱 족속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고서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행복의 근거가 어디 있다고 합니까? 여호와의 구원에 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찬양

우리가 이런 모습을 하박국서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박국은 이 폐허더미 위에 올라서서 믿음에서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사도바울의 증거

사도바울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행복된 삶에 대해 이렇게 증거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끊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합니다.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사도바울은 나는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의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예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하박국과 바울과 똑같은 구원의 감격 속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일한 감격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들의 감격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멘.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얻게 되는 성공과 성취를 통해 잠시 잠깐의 행복을 누리며 삽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원한 구원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멘.

 

왜 또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을까요?

둘째,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세상 만민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신약의 교회는 그 앞에 다 영적 전쟁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육적인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실재 육체적인 싸움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에는 영적 싸움이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이 영적 싸움에 대해 너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함이라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육적으로 영적으로 전투하는 교회로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전투하는 교회로 세상 속에 존재하는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방패입니다. 방패는 적의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도구입니다.

다른 하나는 칼입니다. 칼은 적을 무찌르고 제압할 수 있는 공격무기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자라고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그들의 방어도구인 방패가 되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TV에서 재미있는 광고를 본 일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유해한 세균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제품이 오염과, 병균과, 유해한 환경에서 당신들의 자녀를 지켜 줄 것이라는 그런 광고입니다. 이런 광고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광고입니다.

 

모세가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패가 되어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방패를 철로도 만들고, 나무로도 만들고, 또는 가죽으로도 만듭니다. 그리고 그 방패의 크기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든 방패도 모든 공격을 다 막아주지는 못합니다. 방패는 화살이 날아오는 것은 어느 정도 막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돌을 투석 기구에 넣고 날려 보내게 되면 방패는 그 큰 돌을 막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실 때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적들의 모든 공격을 다 막아주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10재앙을 베푸실 때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미치지 못하도록 방패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해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넘어가도록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올 때 애굽 사람에게는 흑암으로 역사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빛으로 역사하셔서 방패가 주셨습니다. 홍해 바다에서도 하나님은 방패가 되셔서 물 가운데 통로를 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사막에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방패를 주사 이스라엘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아이들이 나일 강에 던져져서 죽을 때 모세에게 방패가 되어주셔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단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까불어서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기도로 그 방패가 되어 주셔서 사단의 공격을 막아주셨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방패가 되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저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과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 소돔 고모라 연합군을 물리치고 돌아가던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기습공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카 롯을 구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 일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근심이 생겼습니다.

아라비아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돌라오멜 연합군은 본래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그 강대한 나라와 적대적인 관계가 된 것입니다. 언제 복수하기 위해 기습해 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늘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5장 말씀을 보면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주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의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너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며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이 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패가 되어 지켜 주심으로 그 후손들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보고 의롭다 칭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은 방패가 되어주셔서 그돌라오멜 연합국으로부터 아브라함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인 이삭과 야곱과 그의 12아들들이 이 가나안 땅에서 평안히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아브라함이 방패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았듯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도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방패가 되어주신 것처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방패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서 전투적인 교회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들도,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는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왜 또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을까요?

셋째, 하나님이 그들의 영광의 칼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어떻게 임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방패로 임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외부의 힘을 물리칠 수 있는 칼로 역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의 칼이시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입에 이 영광의 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광의 칼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서는 이 칼을 성령의 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검인 이 영광의 칼로, 40일간 금식하고 주리실 때를 틈타서 유혹하는 마귀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또 사단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이 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하심으로 이기셨습니다. 또 사단이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유혹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는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사단 마귀는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들을 시험합니다.

사단 마귀는 사람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기도 하고, 또 우리 마음속에서 악한 생각을 불어넣어서 시험하기도 합니다. 너는 불행한 자다. 너같이 수고만 하고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더 이상 희생하지 마라. 더 이상 참고 인내하지 말고 확 일을 저질러버려라.”

 

이렇게 시험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입에서와 같이, 우리의 입에서도 영광의 칼, 성령의 검, 능력의 칼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마귀를 이기셨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고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시험을 이긴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검인 말씀을 통해 마귀의 모든 공격들을 물리치는데 있습니다. 믿음으로 각종 부정적인 생각들을 물리치는데 있습니다. 믿음으로 각종 불신앙적인 사고들을 물리치는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생각을 우리 마음속에 가득 채워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가득 채운 그 믿음의 생각을 우리 입술로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때 사단은 물러가고 흑암의 권세들은 떠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검이 우리의 믿음의 생각에,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하는 말에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는 권세가 있어서 우리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의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믿고 말한 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어서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말한 대로 그들에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는 말을 따라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으면 긍정적인 말, 축복의 말, 믿음의 말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고 말한 대로 그 열매를 거두며 살게 됩니다.

 

왜 또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을까요?

넷째, 하나님이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대적이 이스라엘에게 복종하고 이스라엘이 그들의 높은 곳을 밟게 된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하는 삶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여리고 성을 정복하러 가는 여호수아와 그 군대 앞에 칼을 빼어 든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어떻게 합니까?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그 칼을 든 그 사람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그러자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면서 네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내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광의 칼이 되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았습니까? 이 후에 일어난 모든 싸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 백성들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범죄 한 가나안 백성들 사이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무런 희생도 없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한 가지 더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칼이 되어 주셔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칼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싸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하면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죄도 용납하시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과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를 어디서 봅니까?

그것은 아이 성 싸움에서 보게 됩니다. 이 때 범죄한 가나안 백성들을 향하던 하나님의 칼이, 이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싸움에서 패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칼이 되어주셔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범죄 하면 그 하나님의 칼은 먼저 우리를 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면 하나님의 칼은 우리를 도우시는 칼,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는 칼이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른 믿음을 버리고 또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지 않을 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칼은 먼저 그 백성 된 우리를 타켓으로 삼아 싸우실 것입니다.

 

이런 증거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신실한 믿음과 경건한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잘못을 우리가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그 백성다운 믿음과 삶은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은 경건한 삶이 따르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내가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와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실재 살아가는 삶은 엉터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라고만 하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 받은 백성다운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라고 요구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에 힘쓰고, 신실한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경험한 행복한 성도처럼, 하나님께서 방배가 되어주시고, 영광의 칼이 되어주셔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처럼,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런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뿐 아니라,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을 세상에 전해주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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