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 동산의 세 나무
창세기 2:8-9
이 세상에는 창조를 믿는 사람들도 있고, 창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진화되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을 창조할 정도로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진화되어 왔다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이 참이라고 가정하고 계속 해서 진화의 증거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부분 부분을 끊어서 생각하면 세상이 진화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세상이 진화되어 왔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과학자들도 진화는 과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도 왜 많은 사람들이 진화가 사실인양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공교육을 통해 진화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 같은 곳은 다릅니다. 학교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함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진화론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우리는 내가 눈으로 보고 이해 가능한 것만 사실이라고 믿지 않고, 우리는 내가 보지 못하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이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그 기초를 둔 이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어떻게 존재하시느냐?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느냐? 나를 누구라고 하시느냐? 하나님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라 하시는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하시는가?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또 죽음이란 무엇이라고 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된다고 하시는가? 등등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사는 모든 이해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전해주신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재한 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그 삶의 중심에 두고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그 자신의 인생과 모든 만물들을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시는 부모님이 계신 것을 알고 경험하며 자란 아이들은,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지, 부모가 내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부모님에게 자녀 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효도해야 하는지, 등등 그 자신의 모든 삶을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어린 아기 때 부모를 잃고 늑대에 의해 키워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에 실재로 이렇게 늑대에 의해 키워진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는 밀림 속에서 아기를 잃어버렸는데, 그 아기를 늑대가 데려가서 키웠습니다. 이 아이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랐지만, 그 하는 행동과 언어는 늑대를 닮아 있었습니다. 아이는 늑대와 같이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늑대의 울음소리를 내었습니다. 이 아기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늑대의 양육을 받고 늑대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 부모의 보살핌 속에 자랍니다.
그래서 부모의 언어를 배우고, 습관을 배우고, 행동과 가치관을 배우며 자랍니다. 우리 속담에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녀는 반드시 그 부모를 닮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믿음이 없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과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부모는 그 자녀를 사랑으로 보살펴 줍니다. 믿음이 있는 부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으로 자녀를 돌보아 줍니다. 그래서 이런 자녀들은 부모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는 생활을 보면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배우며 자랍니다. 이렇게 해서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로 전달되어 갑니다.
그런데 부모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녀들은 믿음으로 살지 않는 부모의 삶을 보고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까?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 결코 경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녀가 신앙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그 부모가 신앙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예를 사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를 살았던 부모들은 대부분이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이들은 광야에서와 같이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지 않고, 가나안 땅에 미리 살고 있는 사람들, 즉 하나님이 다 쫒아 내라고 하신 민족 중에 다 쫓아 내지 않고 또 쫓아 내지 못한 민족과 함께 섞여서 살면서,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따라서 세상의 물질과 부와 명예를 쫒으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셋 족속과 아무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 거주하면서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이 신들을 섬겼더라.’(사사기 3:5-6)
이렇게 부모가 믿음으로 살지 않은 결과 그 시대는 어떤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까?
사사기 2:7.10절입니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해 주신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지만, 이 사람들이 다 죽은 후 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도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부모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며 그 자녀들에게 믿음을 전해주며 사는 부모입니다.
둘째, 자신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그 자녀들에게 믿음을 전해주지 못하고 살아가는 부모입니다. 셋째, 자신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그 자녀들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부모입니다.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겠습니까?
에덴동산의 세 나무
이 세상에 세 가지 서로 다른 부모가 있듯이, 하나님이 조성해 주신 에덴동산에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 서로 다른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이 세 가지 나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는 어떤 나무가 있었습니까?
첫째, 에덴동산에는 “각종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는 나무의 종류가 참 많았을 것입니다.
그 많은 나무들이 노아의 홍수를 겪으면서, 홍수 후에 급격한 기후변화를 겪으면서 많은 멸종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나무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많은 나무들을 창조하셨을까요?
각종 나무들은 나름대로의 쓰음 새가 있었습니다. 어떤 나무는 생활의 도구로 이용하고, 어떤 나무는 그 열매를 하고, 어떤 나무는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도록 다양한 나무들을 주시고 또 다양한 열매를 맺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창조된 나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들을 사람들이 사용하며 살 수 있도록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나무의 소유권까지 다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무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나무를 이용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이용하며 살 수 있었던 나무들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이때부터는 사람들이 얼굴에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하여야 나무에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거져 주신 나무에 사람의 노동이라는 가치가 추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추가된 노동에서 개인의 소유의 개념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룬 문명은 이 소유개념에서 출발한 문명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노동이라는 수고를 통해 얻게 된 물건들을 서로 교환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을 물물교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경제 단위가 커지면서 물물교환은 번거로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발달하게 된 것이 바로 화폐였습니다. 그러다가 경제 단위가 더욱 커지면서 돈을 주고받는 화폐경제도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개인적으로는 카드이며, 기업 같은 곳은 전자 결재시스템이 도입되었습니다. 이런 현재의 세계 경제의 모습은 인간이 선악과를 통해 맺은 행위언약을 어기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후에 생겨난 모습입니다.
이렇게 문명이 발달해 오면서 사람마다 재능과 능력의 차이가 있어서 개개인이 소유를 얻는데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어떤 사람은 적은 것을 소유하게 되는 빈부의 격차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쟁사회가 되었습니다.
경쟁사회의 어두운 면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상가들을 보면 곳곳에서 멋지게 인테리어를 하고 영업을 시작하지만 곧 많은 돈을 드려 장식한 인테리어를 뜯어내고 또 다른 점포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들 중 70-80% 정도가 3년 안에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점포 인테리어를 위해 쓴 많은 돈을 공중에 날려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하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6:31-32절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천부께서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의.식.주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도 ‘하루하루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일용할양식이 없다면 하나님께 주시기를 구하고, 만약 일용할양식이 있다면 그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른 삶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런 말씀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그 주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살기 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은 재물을 얻고,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전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전 삶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살지 않는 사람들은 참 믿음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른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은 하나님의 앞에서 자신의 전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세계관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이 그 삶의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인본주의 세계관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두고 사는 신본주의 세계관입니다.
이 서로 다른 세계관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전 삶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 모든 사람들이 살았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삶을 살았습니다.
아벨을 보십시오.
아벨은 하나님의 중심의 신본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인을 보십시오. 가인은 자기중심의 인본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성을 쌓고 자기 소유를 늘리고 확장해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가지고 살았던 서로 다른 가치관이 예배생활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같은 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가 드리는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과 그가 드렸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사는 믿음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기도 하시고 받지 않으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살아가는 세계관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으시기도 하시고 받지 않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삶에서도 같습니다. 우리 믿음에서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이 있고 받지 않으시는 믿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믿음과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살고 있는 세계관은 어떤 세계관입니까?
우리 시대 성공한 사람 중 한 사람인 스티브 잡스는 그의 아이디어와 끝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서 애플을 초 일류회사로 세워 놓은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의 실리콘 벨리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나도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하며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인도 이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가인은 자기 노력으로 에녹 성을 쌓고 도시를 문명을 이룬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인과 그 후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스티브잡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할까요?
그가 비록 세상에서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과 달리 믿음으로 살았던 아벨과 그 후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에덴동산에 있었던 각종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각종 나무들이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듯이,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주권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주권적인 섭리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손에 이 세상이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 안에서 나를 보고, 나의 가정을 보고, 우리 교회를 보고,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바른 삶입니다.
둘째,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의 각종나무들이 우리 육체적인 삶을 위한 나무들이라면, 생명나무는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한 나무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생명나무 과실에 달려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으며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인이 되자 이들을 황급히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인이 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죄인으로 영생하는 존재, 죄인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인으로 영생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으로 영생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행한 삶이 바로 불신앙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장차 살게 될 지옥형벌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정신이 이상한 살인자들이 우굴 대는 곳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혹은 손에 총을 들고, 혹은 손에 낫을 들고 악에 바쳐서 소리 지르며 만나는 사람들을 막 죽이는 그런 곳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우리가 세상에서 100세를 살지 못하고 죽으니 다행이지, 만약 이런 세상 속에서 천년만년 죽지 않고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이 세상은 지금보다 100배 1000배나 더 악한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 범죄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배후에서 은혜의 역사로 통제하고 계시니? 우리는 지금처럼이라도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멋대로 하며 살도록 내 버려두셨다면 이 세상은 벌써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세상, 벌써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끔직한 결과를 잘 아셨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마자 곧 바로 에덴에서 이들을 쫒아 내셨습니다. 화염검을 통해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죄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죄인이 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쫒아내신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복음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성자 하나님을 처녀의 몸을 통해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져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요한 1서 4:9-10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려고 하면, 먼저 우리가 처해 있는 절망적인 상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절망적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경험하게 될 때 비로써 우리는 비로써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지불하신 하나님이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비로써 알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는 마음, 확신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하나님께서 감추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 안에 성령을 보내 주셔서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 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게 되면 영생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육신이 육의 양식을 먹어야 생명이 유지되듯이, 우리의 영혼도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받아먹어야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들에게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생명나무가 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임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보내 주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곧 바로 ‘노아가 그와 같이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 가진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아브라함이 말씀을 따라 갔고.......’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 가진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어떤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 교회의 고백은 ‘말씀대로 믿고 배우고 말씀대로 살고 전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고백을 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올바른 고백을 하며 사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셋째, 에덴동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아주 특별한 나무였습니다.
이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축복을 계속 유지하느냐? 유지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해 주는 아주 중요한 나무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지혜가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리며 살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들이 우리나라의 법을 지켜 행하는 가운데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이 주신 법을 지켜 행하는 가운데 누리면 살게 되는 자유였습니다.
선악과가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과 인간을 구분시켜 주는 나무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자신이 피조물임을 늘 인식하고 자각시켜주는 나무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선악과는 어떤 나무입니까?
선악과는 이 세상의 모든 기준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무였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는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왜 죄인이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이 선악과는 모든 인류에게 왜 예수님이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나무입니다. 이런선악과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하나님이 은혜가 역사하는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선악과에서 자기의 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로 나아가서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다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합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에덴의 세 나무를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각종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할 일은 범사를 감사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기준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해 두신 기준대로 살아야지 사람이 좋다고 생각되는 기준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선악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신본주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나무를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 형상과 모양을 닮게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피조물로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죽음의 지배를 받고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멸망을 당함으로 끝이 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생명나무는 예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외에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영으로도 육으로도 누리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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