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6. 20. 14:19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창세기 4:1-7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신앙과 삶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1,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존재이시며,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유한한 육체를 가진 존재이며, 지혜와 능력에 한계가 있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 존재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존재하는 방식도 다르고, 존재하는 차원도 다른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나고 서로를 대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 더 경이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납니까?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며 사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우리가 가족을 만나고, 직장 동료를 만나고, 이웃을 만나며 살아가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날 때는 어떻게 만납니까?

상대방과 내가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만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서늘할 때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사사들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직접 자신을 지목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자신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셨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때 그 만남의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방법은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알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후에 하나님을 만나며 사는 것이 일상이 되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 또한 아주 자연스러워집니다. 예를 들면 이후에는 내 마음 속에 강한 소원을 주셔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됩니다. 또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속에서도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또 때로는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직 모를 때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경험과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경험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비한 영적인 경험들을 통해 만나주시지만, 나중에는 일상의 삶 속에서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험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2.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신앙과 삶의 변화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을 만났던 사도바울의 간증이 3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간증하고 있는 말씀을 자세히 보면, 먼저는 주여 뉘십니까?’ 라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고, 나중에는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까요?’ 라는 삶에 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만난 바울에게서는 믿음의 변화와 삶의 변화가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누구에게나 이런 변화가 따라 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 속에 따라 오는 삶의 변화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따라옵니까?

 

첫째, 그 만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며 사는 삶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삶을 보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성경 전체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창세기를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아직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의 약속의 말씀을 주신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경험한 죄의 수치를 가려 주시기 위해서, 짐승을 대신 죽이시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그 수치를 가려 주셨던 사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대속적인 고난을 친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창세기 4장의 말씀을 보면, 세월이 지난 후 가인과 아벨은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여서, 독자적인 자신들의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이 된 가인과 아벨은, 가장이었던 그 아버지 아담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보고 배운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과 5장을 보면 인류가 두 서로 다른 계보 즉 아담의 계보와 가인의 계보로 분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계보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가인은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 실패한 사람이었듯이, 가인의 계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실패한 계보였으며, 아벨은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서 성공한 사람이었듯이, 아벨의 계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성공한 계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성공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로 분리 되었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가인의 계보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살았던 계보였고, 아벨의 계보는 늘 하나님을 만나 섬기며 살았던 계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 이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았다고 합니까?

에노스 때부터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하는 생활을 시작 했다고 합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라멕은 노아를 낳고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라는 예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고 방주를 만들어서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았다고 합니까?

세상에 속하여 세상적인 성공과 성취를 그 삶의 목적으로 추구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가인은 성벽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성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을 쌓고 도시를 이루었던 국가의 태동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라맥 때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고 소년을 죽여서 권력을 취하는 정복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라멕의 아들들은 그 아버지의 권력을 후광으로 업고 세상에서 큰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라멕의 아들 야발은 가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당시 가축은 너무 중요했습니다. 당시에는 의복이 가축에서 나왔습니다. 제사용품이 가축에서 나왔습니다. 교통 운송수단이 가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 볼 때 야발은 오늘날로 말하면, 기업적인 의류업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제사와 관련된 물품들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오늘날 비행기, , 기차, 자동차로 대표되고 있는 운송수단을 독점하였던 성공한 기업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발의 아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은 오늘날로 하면 연예계와 오락 계와 연예 기획사 등 예술계를 꽉 잡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발이 당시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실라가 낳은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된 여러 기구를 만드는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두발가인이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였다는 말은 오늘날 제철회사, 자동차 회사, 각종 기계 공구, 비행기 등등을 만드는 것을 독점하였던 기업가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의 후손들이 살았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 부귀 영화를 그 목적으로 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합니다.

오늘 같이 날씨가 좋은 날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산과 들로 놀러 가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주시기로 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을 하지 않고, 그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세상 부귀영화, 권세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또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리게 되는 그 날까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에 성공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따라옵니까?

둘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하게 합니다.

 

기독교의 한 분파 중에 구원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중요한 도전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 구원을 받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타나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 받았다면 몇 년, 몇 월, 몇일에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어 왔습니다.

 

이런 질문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 문제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구원 파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우리 신앙의 아주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구원 문제에 교회가 다시 관심을 갖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파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죄를 사함 받아 구원을 받게 되면, 구원받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더 이상 죄와 관계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 파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기존 교회에서 자꾸 죄를 회개하는 이유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주 전도대상으로 삼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구원 파에 속한 사람들의 중요한 오류는 구원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즉시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우리는 이전과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전과 다른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라고 칭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으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칭해 주실 때, 우리 안에는 의롭게 살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전에는 죄의 종으로 오직 죄의 열매만 맺으며 살아오던 우리들이지만, 이후에는 하나님이 뜻에 순종하여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변화가 있는 사람들이 될 때 비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믿음의 변화가 있는 사람들이 될 때 비로써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보고, 죄를 싫어하고 아파하며 회개하는 삶을 보고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과 죄를 회개하는 삶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의 경험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비로써 죄가 무엇인지 깨달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우리는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습니까? 당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하였는데,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지면, 그곳이 어디든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부흥회를 찾아 다녔고, 기도원을 찾아 다녔고,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실을 찾아 은혜를 간구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우리들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어느 교회에서 사경회를 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집회 기간 동안 먹을 양식을 준비하여 어깨에 메고, 심지어 솥단지까지 짊어지고, 집회 장소 근처 공터에 천막을 치고, 거기서 몇 날 몇일을 숙식하며 사경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은혜를 사모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된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내 힘으로는 안 되고, 내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도 내 힘으로는 안 되며,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만 되는 줄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셨을 때 한 경험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나를 괴롭혀 오던 죄와 그 죄가 가져다주는 죄책감이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닫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은혜를 성경은 안개에 비유하면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하던 안개가 아침 태양이 떠오르자 흔적도 없이 사라짐 같이, 죄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우리 죄가 어느 한 순간에 우리에게서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한 죄 사함의 경험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죄를 사함 받고 죄에서 해방 받게 되는 이 경험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에, 구원 파에 속한 사람들이 구원의 역사를 그렇게 강조하고 주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라도 구원 파에 속한 사람들의 주장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죄 사함의 은혜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일지라도, 이 죄 사함의 경험은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일 뿐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서 곧 바로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지식이 완전히 새로워진다든가, 가치관이 완전히 바뀐다든가, 또 우리 죄악 된 육체가 마치 천사처럼 완전히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거듭나고 중생한 우리 영혼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지성에 영향을 미쳐서 지성을 변화시키고, 우리 감정에 영향을 미쳐서 감성을 변화시키고, 우리 의지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 의지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된 그 때 우리가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런 변화는 어떻게 옵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로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이런 변화가 서서히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오래 믿어온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을 보면,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그 만큼 믿음 안에서 그 분들이 변화되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완전함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변하고 변해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입니까?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완성되는 그 날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영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 파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변화가 예수를 믿고 우리 영이 거듭날 때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의롭다 함을 받아 거듭나게 되는 이 변화는,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난 변화이지, 우리 육신이나 우리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 파에 속한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우리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또 요한 11:8,10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나는 전혀 범죄 하지 않고 산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자 없다.’ 라고 하신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하나님을 닮아서 점점 거룩하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은혜가 더한 곳에 죄가 더욱 넘쳤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우리는 더욱 더 죄에 대해 민감해져서, 전에는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까지도, 다른 사람들이 전혀 죄라고 말하지 않는 것까지도 죄로 깨닫고 가슴 아파 하며 회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우리 삶 속에서는 날마다 죄를 회개하는 생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오는 변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옵니까?
셋째, 하나님께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 낼 수 있다.’ 라고 자기가 자기에게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을 도와 줄 다른 존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이렇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또 그렇게 긍정적으로 될 것을 믿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 믿음대로 큰일을 하고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날 현대그룹을 이루고 돌아가신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울산의 모래사장을 보면서 거기 세계적인 조선소를 세울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돈 한 푼 없이 세운 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중공업이 아닙니까?

 

또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 믿음 안에서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이 스스로 긍정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그 어떤 사람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긍정적인 마음을 일깨우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부류 중에 누가 더 긍정적인 인생을 살 것 같습니까?

당연히 기도하는 사람들이지요. 제가 늘 하는 말 중에 우리 신앙이 진실한 신앙이라면 우리가 홀로 사막 한 가운데 던져지게 되어도 믿음으로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힘쓰고 애써 이루려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적삼고 살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이며,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영적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이 어떻든지, 조건이 어떻든지, 이런 것들에 그렇게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역사를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있지 않아서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 왔는지를 확인해 볼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성경 속에도 이런 증거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이후에, 함께 예수 믿는 성도들이 별로 없었던 다메섹 인근 지방 아라비아 지역에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성경을 통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 할 때는 믿음으로 살다가, 우리 혼자 떨어지게 되면 신앙으로 살지 못한다면 이런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유지되는 신앙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 처하게 되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환난의 날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스스로 그 환난을 믿음으로 이겨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는 참 된 능력은 기도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하나님이 계시니, 무엇을 하든지 먼저 믿음으로 기도를 하고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행사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성도,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성도라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우리나라의 최고 부자인데, 마치 그런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것처럼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아버지가 자기 나라에서 최고 부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또는 그런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기도하는 삶은 우리의 믿음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 삶을 사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엇인가를 구하는 행위 일뿐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입니다.

 

누가 병든 자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까?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부모입니다. 누가 믿지 않는 가족과 형제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까? 기도를 듣고 가족과 형제들에게 믿음을 주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함께 하시면서 그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누가 자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까? 내가 자녀에게 잔소리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났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아서,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옵니까?
넷째, 하나님께 범사를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감사는 우리 믿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감사하는 삶은 우리 신앙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삶 속에서 감사함이 그만큼 크고,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삶 속에서 감사함이 그만큼 작다는 것입니다.

 

또 감사하는 삶에 대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전기 불을 주시고, 전깃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시편 50: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런 말씀들을 보면, 감사하는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또 감사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올바른 행위이며, 또 감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감사가 풍성하다면 우리의 신앙이 그만큼 풍성하다는 증거이며, 우리 삶 속에 감사가 매 말라 있다면 우리의 신앙이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오늘 나는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더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오는 삶의 변화에 대해 살펴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우리 신앙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줍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첫째,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회개의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께 범사를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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