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아브라함의 손님접대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1. 18. 06:53

아브라함의 손님대접

창세기 18:1-15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가정생활을 보면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전에 대가족이 함께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때에는 집에 손님이 오고 가는 것이 아주 일상사였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이 와도 별로 부담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핵가족으로 살아가는 도시생활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손님으로 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오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부담으로 느끼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일단 손님이 오면 가정주부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지 않고, 밖에서 만나 대접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혹 집에 손님이 오더라도 음식은 시켜서 먹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가정에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들은 정식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온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낮에, 상수리나무가 있는 수풀 근처에서 서성이는 나그네를 발견하고 달려가서 억지로 초청하여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은 오늘 우리가 볼 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행동은 유대인의 독특한 문화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척박한 땅을 떠돌면서 가축 떼를 돌보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보면, 언제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면 타인의 도움이 절실하게 되지요. 이런 경험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자청하여 도우며 살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행동에는 종교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가끔씩 천사를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어서 사람들이 그 천사를 환대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할 때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나그네가 어느 마을 입구에 도착해 서있으면, 그 사람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이 거리낌 없이 다가가서 끌어안고 입 맞추며, 마치 가족을 다시 만난 것처럼 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그 나그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나그네를 영접하여 대접할 수 있다는 반가움이 유대인들에게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 성으로 갔던 두 천사를 누가 가장 먼저 봤습니까?

해가 질 때쯤 성문에 앉아 있었던 롯이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롯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였던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그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천사가 롯의 집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를 받은 손님은 사흘 동안은 당당하게 그 집에 묵어 갈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그 손님들이 길을 떠나려할 때에는 반드시 그 집 주인은 더 묵었다가 가기를 간청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또 손님이 아무리 늦은 시간에 방문하더라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으며, 그 집 주인은 손님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남은 음식을 자신들이 먹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아브라함은 세 나그네를 손님을 초청하고 접대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사로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 때 마르다는 손님 접대를 위해 음식 장만에 분주하였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혼자 음식을 장만하던 마르다가 예수님께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마르다는 세상일을 중요시하였고, 마리아는 영적 일을 중요시 하였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음식을 잘 준비해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물론, 손님과 대화를 하면서 인격적으로 대해 주는 것 역시, 손님 접대의 중요한 일로 간주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모두 손님 접대에 꼭 필요한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손님 접대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잡상인들도 많이 있고, 귀찮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심지어 범죄 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람들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낮선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모르는 사람을 경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런 손님 접대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베두인족들은 다르다고 합니다.

베두인족에게는 옛날의 손님 접대 풍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을 보며 우리는 환경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잘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풍습, 아브라함의 손님 접대를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집으로 초대한 손님들은 누구였습니까?

처음에는 지나가는 나그네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중 한 사람은 하나님이셨습니다. 18: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라고 합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9:1절 말씀을 보면 소돔으로 보냄을 받은 두 사람은 천사였다고 합니다. 저녁때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이렇게 해서 시작된 아브라함의 손님대접에서 우리는 세 가지 특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1.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찾아오셨습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서 앉아 있다가

 

아브라함이 살았던 가나안 땅은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하였지만, 낮에는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햇살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활동은 아침저녁으로 하고 한 낮에는 모두가 쉬었습니다.

손님 접대는 시원한 아침저녁이라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한 낮에’ ‘너무 더워서 그늘에서 쉬거나 낮잠을 자야하는 그 시간에 아브라함은 손님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런 시간에 갑자기 손님을 데리고 오면 반갑게 맞아 줄 가정주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더구나 그 손님이 친한 사람도 아니고, 생명부지의 낮선 사람일 때는 더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손님이 올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어떻게 맞이하는지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종종 시험하셨습니다.

때로는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시는 시험을 하셨습니다. 때로는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반응을 시험하셨습니다. 때로는 약속하신 자녀를 주시지 않으심을 통해 시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사랑하는 외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라는 시험까지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창세기 18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일상적인 삶 즉 아브라함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하는지를 가지고 시험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할 때만 그리스도인다운지 아닌지를 보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즉 가정생활 속에서, 친구 만나는 생활 속에서, 여가활동을 하는 보내는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으로 사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시간에 아브라함을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사회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에도, 늘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다 보시면서 우리가 성도답게 살고 있는지를 보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 찾아오셨습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은 제단에서 만나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등장하신 곳은 마므레 땅 상수리나무가 우거져 있는 숲 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하나님을 기대하고 예배드립니다.

그래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거나, 성령을 통해 마음에 감동해 주시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상생활 속에서는 전혀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이런 잘못된 생각을 수정해 주시기 위해서,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장소에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신앙이고 바른 신앙입니다.

 

3.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2절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하나님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하나님이셨다고 합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 중에 아주 신비한 모습으로 찾아온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일반 사람들과 똑 같은 모습, 평범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면 우리는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오늘날도 이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수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들을 도구로 삼으셔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책망하실 수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며 살았던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동네 아이들이 가서 읽으라.’ 라는 동요를 부르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불렀던 그 동요의 가사가 어거스틴에게는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성경을 펼쳐서 읽었는데 그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12-14절이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고 어거스틴은 회개하고 돌이켜, 결국 사람들이 성자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던 초대교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추운 겨울날 길을 가다가, 길에 쓰러져 있는 한 거지 노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날씨도 추운데 얼마나 힘들까 라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덮어 주고 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거지가 예수님이셨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실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와 같이 직접 찾아오실 수도 있고, 천사를 보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사람들을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시험하실 때 인정받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손님을 맞이하였던 아브라함의 자세입니다.

 

히브리서 13:2절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과 롯을 예로 들어서 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손님을 대접했습니까?

1. 아브라함은 공손하게 적극적으로 대접을 했습니다.

창세기 18:2-5절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주여 라고 했던 이 말씀을 보고,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 사람이 하나님이신 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여 라고 한 말은 하나님께도 사용되었던 말이지만,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서 말할 때도 사용했던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나그네들이 아브라함의 천막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들이 상수리나무 수풀 가운데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브라함이 뛰어 나가서 영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자신이 그 나그네들의 하인이나 되는 것처럼, 사정하며 섬길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도들의 헌신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보고 평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성경은 교회 지도자들의 덕목을 손님 대접함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보다 나그네를 만나 음식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이 더 큰 헌신이라고 합니다.

 

디도서 1:8절에서는 감독의 자격에 대해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라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목회자, 사모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의 직분 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손님 대접하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손님 대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직분을 맡게 되면,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보다 오히려 분란과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되려면 차라리 직분을 맡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직분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권세가 아니라 섬기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2. 온 가족이 동원되어서 섬겼습니다.

제가 이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저를 찾으신다는 소리를 듣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내가 통 잠을 자지 못한다. 너 지금 와줄 수 있니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사용하던 노트북도 끄지 않고, 옷을 주워 입고, 아버지 집에 가서 하루 밤 같이 자고 올 생각을 하며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시는 말씀이 이랬습니다.

내가 잠을 못자서 힘이 드니, 제가 저녁에 아버지 집으로 퇴근하여 같이 자고 아침에 출근하든지, 아니면 아버지가 저녁에 저희 집에 오셔서 주무시고 아침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든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녁에 혼자 있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 제가 오늘 여기서 자고 갈께요 라고 하면서 또 아버지가 원하시면 언제든지 우리 집에 가서 주무셔도 된다.’고 하면서 아버지 편하신 대로 무엇이 좋은지 이것저것 한번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는 우리 아이들이 보고 싶으신지 우리 집으로 가서 주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 와서 함께 주무시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와 전화를 한 그 시간부터 그 다음 날 병원 갔다가 집에 모셔 드렸던 그 시간까지 우리 가족 모두는 나름대로 아버지를 섬기려고 자기 일을 멈추었습니다. 또 집안 청소도 하고 음식도 준비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저희 부모님이시잖아요? 자기 부모를 모시는데도 이렇게 온 집안 식구가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섬길 때도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아브라함 혼자 섬긴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와 종들이 함께 동원되어서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이 세 사람의 나그네를 접대하는 일에 헌신하고 수고했습니다. 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만약 이 때 사라가 손님 대접하기를 싫어했다면, 만약 이 때 그 종들이 뜨거운 한 낮에 일을 시킨다고 불평했더라면 아브라함은 손님들을 섬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한 마음으로 섬겼고, 종들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섬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가정이 곧 교회였습니다.

큰 집을 가졌던 루디아, 빌레몬,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이 자기 가정을 개방하여서 교회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함께 사용하도록 하는 유무상통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심방예배는 물론 가정에서 구역 예배 드리는 것도 힘들어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가정이나, 가정을 교회로 내어 놓은 이 사람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또 많은 연습과 훈련도 필요해 보입니다. 우리는 먼저 성도들을 집으로 초청해서 대접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는 교회 밖의 이웃 사람들도 대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섬길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신들이 내게 보이셨으니 그냥 가면 안 됩니다. 나는 절대로 그냥 보낼 수가 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들이 몸과 마음이 쉼을 얻고 다시 힘을 얻어서 그 길을 가게 하고자 했습니다.

 

어떤 때는 대접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은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대접하는 사람이 마음으로 정성으로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대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성도들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너희들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런 사랑의 교제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대접 하는 자나 대접 받는 자가 다 편안할 수 있습니다.

 

셋째, 손님을 대접한 결과입니다.

 

1.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알지 못하고, 하나님은 대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행 중에 있는 나그네를 그냥 보내지 않고 자기 집에 초청하여 먹고 마시고 쉬게 한 후 그 길을 가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복을 나누며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의 힘들 여행길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때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마태복음 25:35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라고 하고, 25:42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이 지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섬기며 사는 삶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30년 전 제가 어느 교회에서 사무를 보고 있을 때 남대문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버스를 타고 시청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날 장마 비가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길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탄 버스가 지나가는 길 건너편에 있는 프라자호텔 담 벽에 한 엄마가 아이를 등에 업고, 옆에는 서너 명의 아이를 데리고 비를 피해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제 마음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 차에서 내려서 네 우산을 저 아주머니 갖다 주어라.’ ‘아니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우산을 주면 나는 어떻게 일을 보러가요.’ ‘빨리 다음 역인 남대문 가서 일을 보고 우산을 하나 사 가지고 와서 주고 갈께요.’ 이러고 있는 사이에 버스는 남대문에 도착했고, 빨리 일을 마치고 우산을 사 가지고 그곳으로 급히 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 때 밀려오는 후회 미안함은 지금도 제 마음에 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에도 비가 오는 날 길을 갈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길을 갈 때는 언제나 비가 억수 같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저는 마치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30년 전의 일이 기억났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게 될 때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날이 생각났듯이, 저도 비만 쏟아지면 그때 일이 생각나서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저와 같이 실패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들이 오면 꼭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비가 많이 오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나갔는데, 제가 길에 나서자 비가 약해 졌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난 후에 다시 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비가 많이 온다고 예보한 것도 모르고 우산도 없이 나갔는데 비가 막 오려고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빨리 돌아오려고 걸음을 재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비가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저는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제 그 비오는 날 사건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는구나!’ 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살았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권면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도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천사를 섬기는 일에 실패하지 말고, 나와 같이 마음을 열고 이런 기회가 오면 꼭 섬기는 삶을 실천하고 삶을 살아서, 그 일 때문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너희들도 지극히 작은 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날은 시대가 악하여져서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에게 사기 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모함하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분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이 우리의 사랑을 식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가 바로 이런 시대 속에서 식어진 사랑 때문에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성도는, 교회는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렵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2. 자기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손님으로 대접을 받은 그 나그네가 갑자기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으냐?’ 라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마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 나그네가 자기 아내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막 안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나그네내년 이맘때에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그 앞에 있는 나그네가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100세가 다 된 노인이었습니다.

그 아내 사라도 90세가 다 되었던 노인이었습니다. 이런 노인에게 무슨 힘이 있고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대접하는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의 삶을 받으시고 아브라함이 해결할 수 없었던 약속의 자녀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먼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삶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이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이후의 문제는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고민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며 살아갑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 삶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약속대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3. 미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17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나그네를 섬기는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내가 무엇을 감추겠느냐?’ 라고 하시면서,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 즉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일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모스 3:7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서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만약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 알려 주시지 아니하시고 무슨 일을 행하시면, 그 누구도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소돔 성을 심판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소돔성의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종 선지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시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은 여섯 번의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성경은 그 순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 되어 소돔성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특권을 누렸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다가 이런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이런 영광을 누렸습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일을 해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말하고 행동하며 살면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용서해 주라.라고 하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의지이고 결단입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감정이 아니고 결단이고 의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라.’라고 하시면 결단하고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내게도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만이 누리며 살 수 있는 은혜이고, 영적인 권세이고, 특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런 믿음이 비밀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부요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내가 좀 편하게 살려고 부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큰 집을 주시면 그 집의 문을 열어 놓고 손님을 대접하고 섬기는 삶을 살려고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똑 같으나 부자가 되고자 하는 목적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고 살면서 또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 섬기는 삶을 살다가, 부지중에 하나님을 대접하였던 아브라함과 같이, 일상의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삶을 살아가는 아브라함을 인정해 주셨듯이, 이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와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벗으로 삼아주시며, 미래에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도 알려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혹은 우리의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열고 이웃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모습으로 혹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대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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