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속건 제사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0. 5. 24. 20:14

속건 제사

레위기 5: 14-19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시대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5대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다릅니다. 신약의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왜 구약시대 성도들과 신약시대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방법이 달라졌습니까?

그 이유는 시대가 달라지고 언약을 맺은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약 교회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절에서 어떤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어서 너희를 죄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언약 안에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해 주실 메시야의 오심을 믿고 바라보며 5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언약이 언제 성취됩니까?

이 언약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여자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성취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시고, 3일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렇게 언약이 성취된 이후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된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깁니까?

교회는 더 이상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이제 교회는 언약을 완성해 주시고 우리 구원을 완성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예배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의 제사는 이제 우리와 별로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무관하여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우리 신앙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구약의 제사와 우리 신앙생활과의 관계입니다.

 

레위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첫 번째 제사는 번제입니다.

번제는 재물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 완전히 불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번제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 번제 제물처럼 그렇게 완전히 희생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번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사건과 연관이 있는 제사입니다.

 

두 번째 제사는 소제입니다.

소제는 유일하게 짐승이 아닌 곡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곡물을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완전히 빻아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소제는 우리를 위해 완전한 헌신을 하신 예수님의 헌신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제는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들이 살아야 할 헌신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사람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화목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사람들을 화목 시켜 나가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제사는 속죄제입니다.

속죄제는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가 부지중에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 그 지은 죄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제사는 속건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속건 제사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속건제와 속죄제의 다른 점입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그 지은 죄를 속함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라면, 속건제는 그 죄의 결과로 생긴 허물들을 해결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런 속건제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속건제와, 사람들과 관련된 속건제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속건제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범하게 되었을 때, 그 범한 성물을 배상해 주는 의미로 드렸던 제사가 바로 하나님과 관련된 속건제였습니다.

 

그러면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속건제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해를 입혔을 때, 그 입힌 손해를 배상해 주는 의미로 드렸던 제사가 바로 사람과 관련된 속건제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속건제는 물질로 배상이 가능한 죄를 범했을 때에 드렸던 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맡아서 보관해 주다가 그 물건을 잃어버렸다든가, 혹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빌려서 사용하다가 그 물건을 망가뜨렸으면, 이것은 그 이웃에게 재산적인 손해를 입힌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산적인 손해를 입힌 이 사람은, 자신이 입힌 재산적인 손해를 배상해 주고, 또 그 피해를 준 손해액의 1/5을 더하여 배상해 주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속건제의 규정입니다. 이렇게 하고 난 후에 이 사람은 또 자신이 그 이웃에게 한 잘못을 용서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속건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속죄제와 속건제의 다른 점입니다.

속죄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배상이 불가능한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였다면, 속건제는 사람이 배상이 가능한 재산상의 손해를 끼친 것을 배상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였습니다.

 

세 번째 살펴볼 것은, 속건제를 드렸던 시기입니다.

 

그러면 속건제는 언제 드렸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성물을 잘못다룬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성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었던 성전의 각종 기구나 도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렸던 각종 재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와 각종 헌물들과 식물의 첫 소출과 동물의 첫 새끼와 각종 서원한 예물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 드린 성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렸던 성물을 범하게 되었을 때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또 속건제는 언제 드렸습니까?

둘째, 타인의 재물에 손해를 끼친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드렸습니다.

 

레위기 6: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 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 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 하면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1) 남의 물건을 맡았다가 돌려주지 않는 행위를 했을 때,

2) 강도질로 남의 것을 뺏은 다음 자기 것으로 삼는 행위를 했을 때,

3) 남의 물건을 취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 행위를 했을 때,

4) 남의 잃은 물건을 주어서 자기 것으로 삼는 행위를 했을 때,

5) 남의 물건을 빌렸다가 돌려주지 않은 것이 있을 때,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속건제는 언제 드렸습니까?

셋째, 타인의 신체나 정신적인 손해를 입혔을 때에 드렸습니다.

 

레위기 24:20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그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동해보상법이라고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신체나 정신적인 손해를 입혔을 때에, 내가 피해를 입인 것과 똑 같은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인 것을 보상해 주라는 면에서는 속건제와 율법이 같습니다.

그러나 속건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갑니다. 그 입힌 피해를 보상하는 마음으로 1/5을 더하여 배상해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 속건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또 속건제는 언제 드렸습니까?

넷째는, 부지중에 하나님의 금령을 어겼을 경우에 드렸습니다.

 

레위기 5:17-18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때 중 흠 없는 수양을 속건 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부지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어긴 경우는 그 죄를 범한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속건제를 하나님의 대리인인 제사장에게 드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대리인이었던 레위 인에게 드린 속건제를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속건제는 언제 드렸습니까?

다섯째는, 문둥병을 고침 받고 일상으로 돌아갈 때 드렸습니다.

 

레위기 14:1-20절 말씀을 보면, 문둥병을 치료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제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람은 먼저 그 병이 그 나았음을 제사장에게 보여서 진짜 그 병이 다 나았다는 확증 받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정한 방법에 따라 속건 제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 사건이 바로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0명의 문둥병자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 주시면서, 이 레위기의 말씀에 근거해서 먼저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문둥병에서 나았다는 것을 제사장에게 확인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후에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드리는 속건제를 드리라고 하신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10명의 문둥병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속건제에 근거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속건제를 드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성물을 범하거나 혹은 이웃에게 물질적 신체적 정신적인 손해를 입혔을 때, 그냥 말로만 하나님 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말로만 그 이웃에게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이웃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으면,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와 내가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것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 때 상처 입은 마음까지 달래주는 차원에서 손해액에 1/5을 더한 보상을 해 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속건 제사를 통해 하나님이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속건 제사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말만하는 끝내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말과 행동이 함께 해야 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을 깨달았으면 회개해야 할 뿐 아니라 잘못에서 돌이키는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잘못에 합당한 배상을 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상처 입은 마음이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1/5을 더한 배상을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신앙은 그 믿고 고백하는 대로, 구체적인 삶이 따라와야 하는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중심적인 교리인 속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실 때 치루어 주신 희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기독교 신앙은 말에 있지 않고 그 나타나는 능력에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우리가 가진 신앙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나타나고 드러나야 합니다. 말로만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살아가는 삶의 증거를 통해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속건제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증거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 충성하는 삶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이웃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삶 속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삶의 증거가 있는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며 이런 삶의 증거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네 번째 살펴볼 것은, 속건제 드리는 방법입니다.

 

속건제를 드리는 사람은 흠 없는 수양을 제물로 잡아 드렸습니다.

속건제에는 제물로 마련한 수양을 잡는 방법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아마 다른 제사에서 수양을 제물로 잡는 방법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제사에서는 제물을 어떻게 잡습니까?

먼저 흠 없는 수양을 제물을 취합니다. 그리고 그 취한 제물을 회막 문 앞으로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그 짐승이 제물로 쓸 수 있는지 쓸 수 없는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 제물 드리는 사람은 그 제물에 손을 얹고 안수함으로 자신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리고 제사 드리는 사람이 손수 그 제물의 목을 따고,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꺼내는 일을 직접 한 후에 준비한 수양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제사 드리는 사람은 수양의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주었으며, 제사장은 그 받은 피를 단 사면에 뿌렸습니다.(7:2) 이것은 제사 드리는 사람의 죄를 사함 받는 의식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제물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보혈의 피, 속죄의 피를 흘려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름과 콩팥은 단 위에서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고, 그 나머지 고기는 거룩한 곳에서 제사장들이 취하여 먹었습니다.(7:7) 이렇게 속건제의 규례에서 하나님께 드릴 부분은 피와 기름이었고, 제사장에 돌아갈 부분은 고기와 가죽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속건제는 비록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지만, 그 제사를 집례 했던 제사장들에게도 돌아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속건 제사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군들에게 그 일에 맞는 보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일한 삯을 받은 것이 마땅하다.’ 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속건제의 중요한 특징은 잘못을 배상할 때 1/5을 더한 배상을(5:14-16)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배상의 원리를 알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일을 배상할 때는 언제나 내가 손해를 입힌 것보다 더 많이 배상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로 인해 손해를 입은 사람의 마음까지 풀어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어떤 사람의 소가 다른 사람의 밭에 들어가서 곡식에 피해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어떻게 배상해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 손해를 입힌 사람은 어떻게 배상해 주어야 합니까?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어떤 사람은 뭐 피해를 입힌 것이 별것 아니네.’라고 하며, 자기 임의로 계산하여서 내가 이 정도 배상해 주면 되겠네.’라고 하면서 그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듯이 배상을 해 주고 갈 수 있습니다.

둘째, 또 다른 사람은 자기소가 입힌 손해를 정확하게 따지고 계산하여서, 그 손해를 입힌 금액만큼의 정확한 배상금을 지불해 줄 수도 있습니다.

셋째, 또 다른 사람은 농부가 아끼며 키워오던 농작물이 훼손당한 입장까지 생각하여서 먼저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 일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 다음에 농부가 입은 손해에 1/5을 더하여서 넉넉하게 배상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이 세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농부의 마음까지 풀리게 할 수 있습니까?

셋 번째 사람처럼 손해를 입은 농부의 입장까지 헤아려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사과하고, 손해을 입은 액수보다 더 많은 배상을 해 줄때일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속건제의 기본 정신이며, 피해를 배상해 주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올바른 마음이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 살펴볼 것은, 속건제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속건제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양심의 원리입니다.

속죄제가 하나님께 대하여 공적이고 명백히 드러나 죄에 대한 제사라면, 속건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지은 죄를 자기 양심의 법에 따라 해결해 나가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전혀 죄로 보이지 않는 문제일지라도 그 일이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을 주면 죄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이 강한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식량이라고 믿고 아무 거리낌 없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재물 먹기를 꺼려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마치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것 같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속건제는 이렇게 거리끼는 양심으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면 이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드러난 죄만 죄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속건제가 양심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속건제가 양심의 문제와 연관이 있는 제사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심에 걸리는 것이 있을 때 속건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5: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이 말씀처럼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 증인이 되지 않음으로 재판의 결과가 달라지게 되었을 때, 증인이 되지 주지 않은 사람의 양심 안에서는 자책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때 드렸던 제사가 바로 속건 제사였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가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볼 때 속건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드리는 제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가 전도를 안 했다고 해서 당장 우리 삶 속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지옥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 전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으면 왠지 우리 마음과 양심은 편치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양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가 바로 속건 제사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속건 제사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며, 양심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원을 해놓고 서원한 대로 하지 않아서 늘 양심의 괴롭힘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헌금을 작정해 놓고 그 작정한 헌금을 드리지 않아서 양심의 괴롭힘을 받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가 바로 속건 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속죄제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에서의 자유를 얻기 위해 드리는 제사라면,

속건제는 자신과 양심의 관계에서 양심의 자유를 위해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자백의 원리입니다.

속건제는 그 죄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양심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거리낌이 있을 때 드리는 제사임으로 그 죄에 대한 자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레위기 5:1-4절 말씀을 보면, 저주하는 소리를 들었거나, 부지중에 부정하게 되었거나, 입술로 맹세하고 서원한 것을 행하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허물을 자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는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우리가 맹세한 것이나 서원한 것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반드시 행하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맹세를 해 놓고 세월이 지나가면 아주 잘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맹세나 서원을 해 놓고 그대로 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이 양심의 가책은 당사자가 자복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로 속건제를 드릴 때에는, 먼저 자신이 맹세한 것과 서원한 것을 실행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자신의 양심에 걸림이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자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속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속건제에는 자백의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중에서 하나님께 지은 죄는 사람들에게 자백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죄는 오직 하나님께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 사이에 실수하고 범죄한 것은 다릅니다. 그 잘못한 사람에게 그 죄를 자백하여야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신학을 하기로 결단하고 공부를 할 때 어릴 때 지은 죄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어릴 때 친구들이 닭서리를 해 먹자고 해서 자기 친척 집에 데리고 가서 닭서리를 해 먹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어릴 때 지었던 이 죄가 생각이 나서 회개하였는데도 늘 그 마음이 찜찜했고 양심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속건제에 대해 읽게 되었는데, 사람에게 잘못한 일로 속건제를 드릴 때에는 그 죄를 자백하고, 그 입힌 손해를 배상해 주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당시에는 학생 시절이라서 돈이 궁한 때였기에,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마련해 가지고 그 친척집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 친척집을 찾아가서 자신이 신학을 하고 있다는 것과 또 어릴 때 자기가 그 집에서 닭서리를 한 죄를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친척은 그 때 네가 닭서리 하는 것을 내가 처음부터 다 보았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닭을 요리해 먹는 곳까지 따라 갔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때 그것을 밝히면 네 아버지가 너를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아서 보고도 못 본 척 눈감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닭서리를 해 먹은 후에도, 전혀 닭서리를 해 먹지 않은 사람처럼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그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그 닭 값에 1/5일 더하여 보상해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친척은 만류하면서 네가 정직하게 말해 준 것 만 해도 족하다.’라고 하면서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은 이것을 받으셔야 제가 부끄럽지 않게 목회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끝까지 그 값을 치러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비로써 마음이 편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건제의 자백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백의 원리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셋째는, 보상의 원리입니다.

속건제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이든, 사람에 대한 범죄이든, 반드시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해야 했습니다. 보상을 할 때에는 성물에 대해서든지 사람에 대해서든지 그 피해액에다가 1/5을 더하여 보상하여야 합니다.

 

레위기 5:16입니다.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위기 6:5절입니다.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이 배상의 원리는 속건제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 배상의 원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의 물건을 훔쳐서 다 쓰고 난 후에 나중에 말로만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손해를 입인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배상이 따라야 참 회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잘못에 대한 참된 회개는 죄의 자복만으로 끝내서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보상과 함께 1/5을 더하여 보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속건 제사를 드려야 그 속건제사가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와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릴 때, 사람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과의 관계가 바르지 아니하고서는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르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발라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3-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이 말씀은 우리의 삶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과 예배생활은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살아온 하나님을 위해 산 삶과 이웃에게 행한 선한행실들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지난 한 주간을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행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 드리는 이 예배가 은혜가 풍성하고 또 감격적인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한 주간을 탐욕과 욕심과 이기심 속에서 살다가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배의 기쁨도, 예배의 감격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를 열납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드리러 올 때 가지고 나아오는 마음 자세가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나오는 마음 자세가 사실 그 날 드리는 우리의 예배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토요일 날이면 반드시 목욕을 하고 주일 예배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은혜가 충만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헌금도 하나님께 드릴 돈이기 때문에 기도로 준비하고 다리미로 펴서 드렸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예배자로 섰기 때문에 늘 은혜가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예배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로마서의 교훈처럼 우리가 6일 동안 세상에서 살아온 삶에 우리의 주일 예배생활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잘 기억하고, 우리 앞에 시작되고 있는 이 한 주간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세로 살아서, 다음 중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은혜 충만한 예배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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