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추심의 은혜
신명기 8 : 2-3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후에 하신 일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둘째는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주어 먹이시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사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셨다고 합니다.
신명기 8: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실 때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성도로 살 수 있고, 또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성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낮추시는 은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 ‘낮추시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아나’입니다. 그 뜻은, ‘괴롭게 한다.’ ‘고통스럽게 한다.’ ‘천하게 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낮추시고 괴롭게 하시고 천하게 하셨습니까? 때로는 물이 없어서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고, 때로는 양식이 떨어져서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고, 또 때로는 낯의 더위와 밤의 추위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천박한 집시들처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낮추셨는데 그 낮추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낮추심이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은혜가 되고 복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생각해 주시고, 나를 높여 주심에서 찾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잘 섬겼더니 은혜로 물질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더니 자녀가 잘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믿음 안에서 충성하고 헌신하였더니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평안을 주시고, 우리 교회에는 성장을 주시고,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제목들을 응답해 주셨다.’ 라는 것들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찾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에서도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앞장인 신명기 7:12-13절 말씀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키면) .......너를 사랑하시고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산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라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복된 약속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40년 광야생활은 어떠했습니까?
때로는 마실 물이 없고, 때로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고, 먹을 수 있는 고기가 귀했던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따분한 삶을 싫어하여서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기적과 놀라운 역사들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생존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높여주심을 은혜라고 생각했지 하나님의 낮추심을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자 곧 바로 불평하고 원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들도 낮추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작한 사업이 안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데 몸에 병이 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녀들의 앞길이 잘 풀리지 않고, 가정생활이 어려워져서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해 지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곧 바로 실망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업이 잘되고, 가정은 평안하고, 자녀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을 하고, 남다른 건강을 누리며 사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때로 그 하는 사업이 실패하여도, 자녀가 대학입시에서 낙방을 하여도, 그 삶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다가와도, 이런 것들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왜 이런 것까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은 나를 낮추고 계시지만 그것은 잠깐이고, 곧 다시 큰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가령 자녀가 대학 입시에서 낙방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지금은 대학입시에서 낙방을 하게 하심으로 잠시 실패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시지만, 잠시 잠깐 겪게 되는 이 아픔은 하나님이 장차 주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주신 아픔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대학입시의 실패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은 하나님의 낮추심 그 자체를 은혜로 본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명기 8:16절의 ‘...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라는 이 말씀에서 보듯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장차 주실 은혜와 복을 믿음으로 내다보면서, 지금 잠시 잠깐 나를 낮추고 계시는 것을 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잠시 잠깐 나를 낮추심은 장차 나를 높여주시기 위한 과정이나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지나고 나면 ‘마침내 네게 복을 주신다.’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지금의 낮추심까지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간증들을 수도 없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낮추셔서 정말 그 수중에 천 원짜리 몇 장 밖에 남은 것이 없을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의 날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시는데 지금은 부족함이 없는 복을 받고 있다는 간증들을 많이 듣습니다.
이런 간증들 속에 담겨 있는 사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낮추심은 장차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과정으로 주시는 낮추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낮추심까지도 은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낮추심은 이렇게 미래가 보장된 낮추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는 것 그 자체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는 낮추심, 미래에 주실 희망도 없는 그런 낮추심 그 자체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런 낮추심이 은혜인 까닭이 무엇입니까?
첫째, 이런 낮추심 중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으로 부르시려는 낮추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두 번의 구원의 기회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구원의 기회는 대부분 어릴 때 혹은 젊었을 때 옵니다.
이때는 아직 그 마음이 부드러워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은 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초. 중. 고등학교 다닐 때, 혹은 청년의 때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는 믿음으로 양육 받아 다음 세대의 교회를 짊어지고 나아가야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의 저 출산 문제와 맞물려 돌아가면서 교회의 아주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주일학교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 구원의 기회는 노년의 시기에 옵니다.
노인들은 다시 어린 아이와 같아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노인들이 어린아이의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노년기에는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이 여려지지만, 그 살아오면서 경험한 한 평생의 삶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경험이 없는 어린 아이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양을 보면 어린아이들의 경우와는 조금 다릅니다.
어린 아이들은 사탕 하나를 주거나,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면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노인들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노인들은 어떻게 믿음으로 부르십니까?
하나님이 노년기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 삶의 어려움을 통해 노인들을 낮추어 놓으시고, 그 낮아진 상태 안에서 구원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년에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의 숫자도 상당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전적으로 노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2013년 통계에 의하면
◎ 65세 이상 되는 우리나라 노인들 중에서 ‘혼자 사는 노인’이 약 1/3정도 된다고 합니다. 세 사람의 노인 중에 한 사람은 혼자 사는 노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바꾸어 보면 노년을 외롭게 보내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 또 우리나라 노인들의 ‘평균 수명’이 약 82세 정도 인데, 이때까지 살아 있는 노인 분들 중에서 약 1/3이 암에 걸렸거나 각종 노인성 질병에 걸렸던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노인 3명 중에 1명은 건강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 노인들의 평균 ‘기대수명’은 약 82세이고 / ‘건강수명’은 평균 약 73세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기대수명은 노인들이 평균적으로 살 수 있는 수명이고, ’건강수명‘은 노인들이 비교적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수명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 노인들은 약 9년 정도를 질병으로 고생하며 산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노인들로 하여금 건강하게 살다가 돌아가시게 하시지 않고, 노년기의 약 9년 동안을 병으로 고생하게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 물론 사람들이 건강을 잃게 된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없었으면 이런 질병이나 고통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우리가 당하며 사는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 그런데 로마서 5:20절 말씀을 보면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생을 거의 마칠 단계에 서 있는 노인 분들에게 죄가 가져다 준 고통을 더하게 하심으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과 같이 그 죄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으로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생애의 마지막에 고통을 주신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을 구원으로 부르신다는 이런 말들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아직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이는 이런 시기에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혹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노년 시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일에 교회가 힘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 그렇다면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젊은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게 되고, 직장을 가진 후에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길러야 하는 등등 아주 바쁘게 살아가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한가하게 다른 것에 마음과 정신을 팔 여유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유치원에 보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금방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와 대학을 들어갑니다. 아이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이 시기를 살아가는 부모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시기에 있는 사람들은 포기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기를 지나고 있는 가정들에 하나님께서는 때로 고난도 주시고 때로 낮추시기도 하셔서 구원으로 나아오도록 역사하십니다.
2013년 동아일보에서 사람들에게 몇 가지 조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1. ‘인생을 살아가는데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조사에 응한 사람의 약 67%가 ‘오늘날에는 능력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들다.’고 대답했습니다.
2.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약 84%가 ‘돈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응답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많아져갔다고 합니다.
3. 그리고 ‘인생의 성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더니 약 68%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지위는 좀 낮아도 돈을 많이 번 것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번 이건희 회장이나 빌게이츠 같은 사람들을 성공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4. 그리고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약 82%의 사람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가족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조사를 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진 능력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돈이나 가족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 대상에 어려움을 주셔서 가정에 문제가 일어나게 하시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하시고, 사회적 지위를 잃게 하심을 통해서 사람들이 의지하며 사는 그것들이 실상은 의지하며 살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젊은 사람들이 그 삶의 어려움을 통해 이런 깨달음을 갖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오도록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사람들을 낮추시는 것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은혜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낮추심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낮추심이 은혜인 까닭이 또 무엇입니까?
둘째, 성령이 시들게 하시는 역사로서의 낮추심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좀 의아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배워오고 또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약한 사람들을 강하게 하시고, 그 백성들에게 은혜와 은사와 용기를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47장을 보면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온 물이 가는 곳곳마다 살리게 하는 역사를 하듯이, 성령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역사를 하실 것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신약성경은 성령은 우리 배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리 하시니.’
이 성령을 통해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 다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 죄인들이 변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의의 일군들이 됩니다.
성령은 또 우리 개인의 마음과 인격과 삶을 변화시켜 나가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 하나님이 그 반대로 시들게 역사하신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시들게 하시는 역사에 대해 처음 말한 사람은, 우리가 설교의 황제라고 부르는 ‘스펄전’ 입니다. 스펄전은 성령이 하시는 역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성령을 통해 생명을 주고 풍성함을 주는 은혜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동일하신 성령을 통해 시들게 하시는 역사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스펄전은 성령 하나님은 그 시들게 하는 역사를 통해서 육적인 사람을 시들게 하여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둘이 하나의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의 주된 사역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성도들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그 인격이 변화된 성도들을 감화 감동 하셔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데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은 우리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잘 변화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잘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성령은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사람을 시들게 하시는 역사를 통해서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이것을 스펄전은 ‘성령의 시들게 하시는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아멘.
성령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외적인 환난을 주셔서 시들게 하시고, 내적으로는 곤고하게 하심으로서 시들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때로 가난한 심령으로, 때로 빈 마음으로, 때로는 영적인 광야로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 인격을 변화시키고 우리 영성을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 하나님이 우리는 낮추시고 시들게 하시는 역사 그 자체가 바로 은혜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시들게 하시면 그 인생은 점점 파리해 져가고 쇠약해 져 나갑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시들게 하시는 역사를 통해 사람들에게서 육적인 욕망, 육적인 기운, 육적인 열정 등등을 다 빼내십니다. 이렇게 육적 에너지를 다 빼내심으로 그 육적인 삶은 점점 마르고 점점 시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학교 다닐 때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에 전념했는데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에 가서도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사회에 나와서는 그 공부한 전공과목을 한 번도 써 먹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오직 기도와 말씀전하는 일에 전념하면서 목회를 해 왔는데 목회도 기대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천 하는 성도, 멀리 이사 가는 성도, 또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로 인하여 교회는 점점 줄어들어 갔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자존심과 프라이드가 아주 높았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존심과 프라이드가 다 꺾여 버렸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 분의 목회사역이 그 뜻하던 대로 순조롭게 되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 전 시대에 교회를 세웠던 목회자들처럼 큰 교회를 이루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 자신과 같이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약 70%나 되는 개척교회 목회자들,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을 무시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 그런데 성령의 시들게 하시는 역사 안에서 그 목회 사역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목회자가 되었고, 자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목회자가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한 겸손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성령이 시들게 하시는 은혜 안에서 죄악 된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사람들은 성공한 모습으로 보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실패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공과 실패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허락해 주신 형편과 조건 속에서 얼마나 충성된 마음으로 성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회하였느냐 하는 것을 보고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시들게 하시는 은혜의 역사 안에서 자기 욕망, 자기 목표, 자기 야망, 자기의 꿈 등등은 다 내어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목회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맡기고 하나님이 주신 현실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목회에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가지는 자부심의 허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에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르거나 추종하지 않게 됩니다. 만유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목회하게 됩니다.
이사야서 40:6-7절입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 말씀을 보면, ‘인생을 풀로 보고, 인생의 영광과 그 풀의 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삶에 성령의 시들게 하시는 뜨거운 바람이 불게 되면, 풀은 마르게 되고 꽃은 시들게 되듯이, 육적인 삶과 육적임 힘과 육적인 에너지와 육적인 영광과 자랑이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의 시들게 하시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성도들을 정화시키고 변화시키고 그 가진 헛된 욕망을 내려놓게 하시고 세상에 대한 미련과 갈망과 목마름을 버리게 하십니다.
스펄전은 성령의 시들게 하시는 역사에 대해 말하면서, ‘징계는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선물 중에 가장 값비싼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억압의 영을 알지 못하는 이는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 ‘육이 죽어 영이 산 사람’ 이라는 책의 저자 ‘후쿠시케 다카시’는 전자공학을 전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그냥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스키를 타다가 스키장에서 넘어져서 뇌경색으로 20일 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깨어난 후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성령 하나님의 뇌경색이라는 고난을 통하여 시들게 하시는 은혜의 역사가 없었으면 자신은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들게 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윤복희’ 권사도 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 라는 책을 쓴 ‘이지선’씨도 있습니다. 이 분은 이대교육과를 졸업했는데 교통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어서 그 외모가 아주 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고백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외모가 볼품없이 시들어 버린 지금이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중에 가장 행복하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또 ‘땅 끝의 아이들’이라는 간증을 쓴 ‘이민아’ 변호사 겸 목사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이어령’ 교수의 딸로 태어나 결혼에 실패를 하고 첫 아들은 죽고 둘째 아들은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 그녀는 하나님께 나왔지만 그 자신도 갑상선 암으로 그 부모보다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민아 목사는 성령의 시들게 하시는 은혜 안에 사는 그 고난의 삶을 통해, 한국의 지성이라고 불리던 그 아버지 이어령 교수를 예수 믿고 구원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성령은 그 시들게 하시는 역사를 통해 이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시들게 하시는 은혜가 임할 때 우리는 육적인 삶은 죽고 영적인 삶으로 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는 내 것이 별로 없는 가난한 사람이 되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부유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육신적인 삶은 쇠하여 가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사람들을 이렇게 낮추시고 시들게 하십니까?
신명기 8:3절 말씀에서는 그렇게 하시는 이유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면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낮추시고 천하게 하시고 고통을 통과하게 하시고 시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을 보면 고난의 혹독한 시험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시들게 하셨던 광야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신명기 8:15절입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살았던 광야는 사람들을 낮추시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도 낮추시기 가장 좋은 장소로 인도하여 낮추십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고 계시는 역사 한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혹시 남모르는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각 사람마다 낮추시는 장소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저를 낮추시고 계신 곳은 바로 참빛교회 사역입니다. 제가 교회를 처음 개척할 때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기대하고 개척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심 안에서 저에게도 꿈이 있고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참빛교회를 저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 주시는 장소로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저는 낮추시는 장소로 저를 겸손하게 하는 장소로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낮추시고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각자가 다 다르겠지만 하나님이 낮추실 때 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너무 아파하지도 말고, 너무 크게 좌절하거나 실망하거나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은 자기 아들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기 위해 낮추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낮추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십니다.
사람들을 낮추시는 분명한 목적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바로 16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은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복은 무엇입니까?
이 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의 복이고,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누리며 사는 복입니다. 그리고 또 성령의 시들게 은혜의 역사 안에서, 그 죄악 된 삶을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나아가게 하고,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게 되고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누리며 살게 되는 하나님의 복은 어떤 복입니까?
하나는, 하나님께서 낮추심을 통해서 연단을 받아서 그 믿음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수준에 이르게 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낮추심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낮추게 하심을 통해서 육적인 면은 시들게 하시나 영적인 풍성함 가운데 하늘의 속한 사람으로 그 남은 생애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실 때 우리는 우리를 낮추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목적하셨던 일을 우리 삶 속에 이루어 주시는 것을 기뻐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나가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에는 높이시는 은혜도 있지만 낮추시는 은혜도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히브리서 1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하나님의 높이시는 은혜에 대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그리고 낮추시는 은혜에 대해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이 이 중에 하나님의 낮추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낮추시는 은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지금은 낮추시지만 이후에 높여 주시고 결국 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복도 있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은 하나님의 낮추심 그 자체가 은혜이고 복인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역사에 대해 시편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또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 낮추심을 통해 사람들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5장에서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인격을, 인격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환난을 통해서 인격의 변화를 이루게 되고 그 변화된 인격이 하늘 소망을 가지게 해 준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격의 변화는 높여주시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낮추시고 성령의 시들게 하시는 역사 속에서 맺어지는 은혜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는 것도, 때로 성령이 우리 육신의 삶을 시들게 하시는 것도 결코 저주가 아니며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기적을 원하고 또 늘 승리하는 삶을 원하지만, 이런 삶으로는 자기 변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로 낮추시는 은혜를 통해 때로 시들게 하시는 은혜를 통해 이런 변화를 우리에게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낮추시고 성령 하나님의 시들게 하시는 은혜의 역사 안에서 주시는 이런 변화와 성숙이 우리들의 남은 삶 속에서 이루어져 가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