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의 중요성
창세기 30:37-39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무엇을 목적삼고,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우리가 목적삼고 바라보며 사는 것에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책 가운데 ‘가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빠 가제가 어느 날 자녀 가제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걸을 때 제발 옆으로 걷지 말고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아빠가제는 하나 둘 구령을 붙이며 옆으로 걸어갔습니다. 아빠 가제가 말로는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라고 가르치면서 그 행동으로는 옆으로 걸어가자 모든 가제들이 다 옆으로 걸어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이 가제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배우게 되는 것은 말이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고 경험한 것을 통해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뒷짐 지고 서 있으면 그 집 아이도 아버지를 따라 뒷짐을 지고 서 있게 됩니다. 아버지가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떨게 되면 그 사람의 아이도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떨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집 어른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려고 하면 그 집 아이들의 행동을 보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보면 그 집 어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교육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아기 때에는 무엇이든지 모방하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아빠 엄마가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서 한다고 합니다.
TV 시청도 주의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가정마다 TV가 한대씩은 다 있습니다. 한 연구 단체에서 TV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조사했는데 그 조사에 따르면 아이들은 매주 평균 23시간을 TV앞에 앉아 있는 다고 합니다. 이 시간을 70세를 산다고 가정하고 계산해보니 사람들이 무려 7년이라는 긴 시간을 TV를 보는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TV보다 더 심각한 매체는 핸드폰입니다. 아이들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삽니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합니다. 핸드폰이 없어지면 불안해 지는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TV와 핸드폰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술 먹는 장면, 담배피우는 장면,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 도박하는 장면 등등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아이들 교육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장면들입니다. 이런 장면들은 모방심이 강한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TV와 핸드폰입니다.
아이들이 TV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필이나 볼펜을 입에 물고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낸다고 합니다. 그 부모는 예수를 잘 믿기 때문에 전혀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TV를 보며 담배 피우는 것을 학습하게 되고 또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방심이 강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이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는 연속극이 재미있다고 아무 생각 없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가르침 보다 부모의 말과 행동 그리고 TV에 나오는 배우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가정들을 연구해 보니 그 부모가 상호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화를 하면서 살아가는 가정의 아이들은 대부분 사회생활을 잘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전혀 대화하지 않고 늘 다투고 싸우는 가정의 아이들은 사회 적응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연구 결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사랑하는 길은 큰돈을 들여서 아이에게 뭘 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 친구처럼 살아가면서 그 삶을 통해 모범을 보여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식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그 장래를 걱정하는 부모라면 이런 수고와 희생을 해야 합니다.
태교의 중요성
이것은 어린아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에게도 적용됩니다.
그 한 예로 우리나라에는 태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 모태에 있는 태아는 그 어머니를 통해 간접적으로 세상을 보고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모에게는 부정한 것은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심지어 나쁜 일은 생각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태아는 어머니를 통해 간접경험을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모는 태아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쳐주려고 태교를 합니다.
그래서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까지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산모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태아는 그 사람을 담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산모가 시누이를 미워하면 자기 아이는 시누이를 닮고, 시어머니를 미워하면 자기 아이는 그 시어머니를 닮고, 또 남편을 미워하면 남편을 닮은 아이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싫어하는 그 사람을 늘 생각하기 때문에 태아는 그 사람을 닮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너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녀는 남편의 좋은 점을 닮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산모가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느끼며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전해 듣고 있는 말 중에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도 부부가 서로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살게 되면 서로가 바라보고 살아온 그 상대방을 닮아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보는 대로 우리가 믿고 생각하는 대로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혼부부의 이야기
이렇게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 어느 신혼부부는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이 부부는 ‘분유 선전에 나오는 우량아’ 사진을 오려서 자기 집 거실과 안방과 건너 방 등등에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분유선전에 나오는 아이처럼 자기들도 건강하고 예쁜 아이를 낳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이런 이야기들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2. 성경 이야기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야곱도 이 바라보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한 사람입니다. 야곱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그 형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살 때 외삼촌 라반이 야곱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비록 너는 내 조카지만 품삯도 안주고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네 일한 보수로 무엇을 주었으면 좋겠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과 연애하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외삼촌의 둘째 딸 라헬을 제게 아내로 주시면 제가 7년을 외삼촌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7년이 지난 후에 허락을 받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그 지역의 풍습이라고 하며 라헬보다 언니 레아를 먼저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더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낸 14년 동안 하나님이 야곱을 생각하사 라반의 집에 복을 주심으로 라반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라반은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복이 야곱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야곱이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라반은 그 조카 야곱을 아버지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서 이런 제안합니다. “야곱아 지금까지 14년 동안은 네가 아내를 얻기 위해서 무료로 일했지만 이제는 네가 수고하는 대로 품삯을 줄테니 여기서 일하면서 한 재산을 모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소유 기업을 마련해서 돌아가기 위해 6년 더 라반의 가축들을 치게 됩니다.
당시 야곱과 라반이 맺은 고용계약은 이러했습니다.
야곱은 양과 염소 떼 가운데서, 점 있는 것이나 얼룩이 있는 것과 검정 것들을 다 골라서 외삼촌과 그 자녀들에게 주면서, “이 양들은 외삼촌의 식구들이 직접 먹이시고 내게는 흰 양만 남겨 놓으셔서, 앞으로 흰 양이 나면 외삼촌의 양이 될 것이고 점이 있거나 얼룩무늬가 있는 양이 나면 내 양으로 삼겠습니다.” 라고 제안하였습니다. 라반도 이 말을 들어보니 자신에게는 별 손해가 없는 계약이었습니다.
유전학적으로 보면 양이나 염소 가운데 점박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다.
야곱도 14년간 외삼촌 집에서 양을 치면서 이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야곱의 제안은 손해가 나는 제안 같아 보입니다.
물론 라반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라반은 목축업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라반은 그냥 두어도 점박이나 얼룩이 있는 양이 태어날 가능성이 적은데, 더구나 지금은 점박이나 얼룩이 있는 양들을 다 골라 낸 후이기 때문에 더 더욱 점박이와 얼룩이 있는 짐승이 태어날 확률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이게 왠 떡이냐 라고 하며 야곱과 계약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반은 그 아들들에게 얼룩무늬가 있고 점이 있는 양들을 야곱의 양들과 3일길 즉 약 100km나 떨어져서 방목하도록 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아예 점박이나 얼룩이 있는 새끼가 나는 것을 차단해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유전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던 라반은 야곱과 계약을 맺고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단색 양만 있는 양 때 가운데에서 처음에는 가끔 점박이 양이 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점박이나 얼룩무늬가 있는 양이 태어날 확률은 점점 적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누굽니까?
그 형을 속이고 장자 권을 빼앗았던 사람이 아닙니까? 또 그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아 내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성경은 이 야곱을 사기꾼과 같은 야곱 모사꾼과 같은 야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야곱이 그 외삼촌에게 호락호락 당하고 있을 사람이겠습니까? 당시 야곱에게는 유전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모략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가지고 있었던 비장의 무기는 바로 마음에 소원을 가지고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모태에서부터 이삭의 장자가 되기 위해 그 형 에서와 다투었습니다.
그러다가 져서 동생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동생으로 태어난 것을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고 장자의 축복을 받는 장자가 되기 위해 사냥에서 돌아온 형의 약점을 이용하기도 하고 자기가 에서라고 눈먼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하였던 사람입니다. 야곱이 장자가 되겠다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70년을 산 결과 결국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야곱은 그 형 에서와 장자 권을 놓고 이 피나는 경쟁의 삶을 살아오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믿은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했던 야곱은 산에 가서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가지를 잘라왔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들의 껍질을 드문드문 벗겼습니다. 나무들은 보통 푸른색이나 갈색의 껍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겉껍질을 벗기면 하얀 속가지가 나옵니다. 야곱은 그 가지들을 여기 저기 드문 드문 벗겨 내자 그 가지들은 얼룩얼룩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얼룩이 진 나뭇가지를 양떼가 와서 물을 먹는 개천가의 물구유 앞에 세워두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양이나 염소는 물을 먹을 때 새끼를 배를 습성이 있는데 이 얼룩무늬를 보고 새끼를 배게 하므로 얼룩진 양들이 태어나게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튼튼하고 실한 양이 와서 새끼를 밸 때에는 개천에다가 그 가지를 두었고 약한 양들이 와서 새끼를 밸 때는 그 가지를 치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튼튼한 양들은 다 야곱의 것이 되었고 약한 양들은 다 라반의 것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후 야곱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0:43절입니다.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 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야곱이 부자가 되었던 방법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반도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야곱은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외삼촌에게 한 말을 그냥 들으면 외삼촌을 위해주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또 라반의 말을 들으면 야곱을 위해주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면을 보면 야곱이나 라반은 이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야곱이 맡아서 돌보고 있는 짐승들은 거의 다 점박이나 얼룩이 있는 것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라반은 야곱에게 계약을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라반이 점 있고 얼룩이 있는 양을 선택하면 거의 점이 없는 양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라반은 6년 동안 10번이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계약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극복해 나갑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의 역사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이 계약을 10번이나 변개했어도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역사를 힘입어 수많은 염소와 양, 약대, 소, 나귀 등을 소유한 부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달라집니다. 돈을 바라보는 사람, 명예를 바라보는 사람,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 사람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그 바라보고 사는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돈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는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이 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권력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지방의회 의원이 된다거나 국회의원보좌관이 된다거나 아니면 직접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국회의원이 됩니다.
사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보이시고 큰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야곱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기도하면 우리의 믿음에 따라 역사해주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신앙생활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달라지고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성도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늘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비록 이 세상 속에서 살지만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보다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면 우리는 쉽게 이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신앙을 가졌다는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이 세상의 수단과 방법으로 사는 사람으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다는 것을 그림언어로 보여주고 있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이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만약 주시면 나로 물 위를 걸어오라”라고 말씀해 주길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 위로 걸어오라”라고 하셨고 그 결과 베드로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물위를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고 나아갈 때는 물위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풍랑이 일어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자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며 살 때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의 역사가 우리 삶에도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닌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그런 능력과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무능한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는 어떤 일을 만났느냐? 어떤 어려움이 닥쳐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어려움과 그런 환경만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들의 자세가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주님의 은혜의 손길을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환경만 바라보게 되면 그 환경과 처지에 매몰되어 살게 될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이전을 해야 하고 또 그 살고 있는 사택도 다시 얻어야 한다고 칩시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여건과 상황과 처지만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런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함께 해 주시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하시는 손길을 바라보며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네 생애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믿은 대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길을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함께 하시면서 도우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적 부조의 일종인 노령연금 제도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일정한 조건에 부합되는 노인 분들에게 적지만 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건을 통해 무엇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건들 속에서 국민의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들어 노인들의 삶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볼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노령 연금을 받아도 그 느낌과 감격이 다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 나라 정치를 사람들이 움직인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정치인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그래서 노령연금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복을 주셔서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삽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하루 24시간의 삶을 살아갈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사십니까? 하나님을 보고 사십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 여러분의 마음의 눈에 하나님께서 보이십니까? 낮에 사람들을 만날 때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계십니까?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며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느냐? 세상을 바라보고 사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롯의 아내의 경우입니다. 천사가 심판을 앞두고 소돔 성에 살고 있는 롯의 가족들을 구해주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고 있었던 죄악 된 소돔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소돔 성에 두고 온 재산들이 너무 아까워서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일생을 신실하게 산 사람들도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아벨은 믿음으로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았던 아벨이었기에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노아는 어떻습니까?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노아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그와 그 가족 8명은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 아들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도 믿음으로 그 아들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직 후손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서 있는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라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았기에 결국 그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은 어떻습니까? 기생 라합도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애굽을 심판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정탐꾼들을 영접하였다가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심판하시는 와중에도 그와 그의 모든 가족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녀 자신은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르게 되는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까?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사람들은 말세라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는 우리들이나 믿음이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이 공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말세의 풍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세는 고통 하는 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 고통 하는 때가 됩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표적인 심리현상이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면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를 사랑합니까? 요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지나치게 생각하고 염려합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이라면 아주 고가의 제품들도 아주 잘 팔리고 있습니다. 또 자기 사랑은 외모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 중에 성령외과 의사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말세의 현상 중 또 다른 현상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회를 보면 정말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머리에 온통 돈 생각 밖에 없는 듯이 보입니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돈에 죽고 돈에 사는 사람들 같이 보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봅니까? 그것은 돈을 버는 일이라면 그 일이 바른 일인지 바르지 않는 일인지를 따지지 않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술자들이 수년 동안 수천억원을 들여서 개발한 신기술을 자신에게 수억 원을 준다는 약속을 받고 외국 경쟁회사에 파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여서 말세에 신앙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실제적인 능력은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 사랑과 돈을 사랑하는 것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우리가 이런 것들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첫째,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의 삶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자기 부인의 삶이 무엇이고 자기희생의 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도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을 못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자기부인이라는 좁을 길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이웃 사랑 원수사랑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고 저주하고 모독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원수까지라도 정죄하시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될 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자기부인의 삶과 원수 사랑의 삶입니다. 이런 높은 차원의 삶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살 수 있는 삶입니다.
3. 나가는 글
오늘 우리는 야곱을 삶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 하는 것의 중요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는 대로 우리 삶에 그 결과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긍정적인 삶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며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우리가 본 대로 부정적인 삶이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한 주간의 삶을 살 때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서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의 역사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한 주간의 삶이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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