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능력
창세기 1 : 3-5
1.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1)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사실들이 창세기 1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한 모습으로, 흑암의 깊음 속에 있었던 그 창조하신 세계를 밝혀줄 빛을 창조하셔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자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 즉시 그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6-7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라고 말씀하시자 그 말씀하신 그대로 궁창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 즉시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입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이것은 땅을 만드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고 땅이 나타나라” 라고 말씀하시자 그 말씀하신대로 그 즉시 땅이 드러나 육지와 바다가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11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지금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식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각기 종류대로 풀과 씨 가진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자, 그 즉시 각기 종류대로 풀과 채소와 나무들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14-15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 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으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 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이것은 우주의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실 때도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늘의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20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4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의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이것은 물고기들과 새들과 땅의 짐승들을 만드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속에는 물고기가 있으라.” 하시자 그 즉시 그 말씀하신대로 물고기들이 물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공중의 하늘에는 새들이 날으라.” 라고 말씀하시자 그 즉시 그 말씀하신대로 새들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땅위에는 “가축과 기는 것을 그 종류대로 내라” 라고 말씀하시자, 그 즉시 동물들과 곤충들이 땅위에서 거닐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사건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면 그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창세기 1장에서는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4절에서는 그 말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창세기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창세기 1장에서는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있었다고 하면서,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 인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도 동일한 창조의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신적 능력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당시 사람의 의술로는 전혀 고칠 수 없었던 환자들이, 예수님께 고쳐주시기를 바라고 믿음으로 나왔을 때,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던 그 동일한 말씀의 능력으로 고쳐주셨습니다.
/ 복음서를 보면 한 중풍병자를 네 명의 친구들이 들것에 매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고쳐주셨습니다.
/ 한 나병환자가 나와서 절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 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시자 그 즉시 문둥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백부장의 종이 치유 받은 장면입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그 집 하인이 중풍이 들어서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나아가 그 하인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라고 하시면서 함께 가시려고 하자. 백부장이 ‘하나님을 내 집에 오라 가라 하기가 송구스럽다.’라고 하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줄 믿습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므로 그 하인의 중풍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빛이 있으라.” “하늘에서 새가 날으라.”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치라” 라고 말씀하시자 그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처럼,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 안에는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하신 그대로 다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능력은 질병을 고치는데 에만 역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권세와 능력으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3) 이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로 귀신들에게 명령하시자 귀신들도 그 명령에 순종하여 쫓겨 나갔습니다.
(4) 심지어 생명의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과 또 죽은 나사로에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나사로야 나오라” 라고 말씀하시자, 청년이 관 속에서 일어났고, 나사로가 무덤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5) 이 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신적 권세가 담겨 있음을 인해 이렇게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이 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있었던 것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도 동일하게 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는 첫째,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 라고, 하나님의 권위로 선언된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둘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선언된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네 믿음대로 되라” “나사로야 나오라” “바람과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 하라” 라는 등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셋째,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 말씀입니다. 이 기록된 말씀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성경 말씀 속에도 동일한 창조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히브리서 4:12절에서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디모데 후서 3:16절에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 지금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도 동일한 창조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은 사람들은 다 이 말씀을 통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어머니는 매우 활동적이고 건강하신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몸 무개가 빠지고 얼굴이 노랗게 변하고 몸이 약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정밀 진단을 받았는데 간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고 합니다. 의사는 병이 너무 심하여 이제 단 몇 주 밖에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있었던 이 목사님의 어머니는 의사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의사가 자신의 병을 진단하고 포기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단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일정한 자연법칙이 있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분이시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의 어머니는 인간으로는 자신의 병을 어떻게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자기 병을 포기했어도 자신은 그 병을 포기하지 않고, 이제까지 자신이 믿고 섬겨 왔던 하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기도하면서 한 가지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불평과 패배와 절망의 말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에 두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나는 죽지 않고 살 거야,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선포할 거야’라는 믿음의 말을 늘 했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는 아들 목사님은 염려가 되어서 ‘어머니 어떻게 죽지 않으시겠다는 거예요?’ 라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내가 성경의 뒤지다가, 병을 고치는 치유의 말씀 30-40 가지를 찾아서 이렇게 적어 놓고 매일 읽고 큰 소리로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느덧 하나님의 치유의 말씀과 자신의 말이 뒤 섞여서 어느 것이 자신의 말인지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를 정도로 언어생활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어생활이 바뀌고 난 후부터 그 어머니의 삶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점점 깊어만 가던 병세가 조금씩 호전되고 점차 식욕도 돌아오고 몸무게도 느리지만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20년을 살아왔더니 암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건강한 모습으로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그 목사님은 이렇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선포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믿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그 어머니는 지금도 늘 말씀을 고백하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침마다 치유의 말씀을 묵상하고, 믿음과 승리와 건강이 자신의 삶에 있을 것을 선언하고 기대하면서 하루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은 이 사람만의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치유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기적과 치유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부모가 말한 것을 순전하게 믿고 받아들이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선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오늘날도 여전히 기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적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성령의 감동으로 신구약 성경으로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하나님의 말씀들 속에는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2.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을 주셨습니다.
1) 말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도 말하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언어를 가진 존재는 오직 인간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이 주신 말을 통해 인간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하고, 또 만물들의 의미를 말로 규정하면서 살아갑니다.
아담은 날이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말을 통해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또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언어를 사용하여 만물들과 동물들에게 이름을 주므로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 나갔습니다. 19절입니다.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또 아담은 언어를 통해 하와와의 관계를 맺어나갔습니다. 23절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의 이 말을 듣고 하와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기쁨과 감격의 교제가 둘 사이에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범죄 하기 전의 아담의 모습입니다.
2) 언어의 타락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범죄 하므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담과 하와가 사용하고 있었던 말도 함께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권세를 지니고 있었던 이들의 말은 이제 파괴적인 말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그 말을 어떻게 파괴하고 변질시켰습니까?
아담의 타락이 언어에 미친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 하와에게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창조적인 말을 했고 사람을 격려하는 말을 했고 기쁨과 감격을 주는 생명력 넘치는 말을 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하와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감격이 솟아나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아담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닮아서 창조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한 말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판단해서 하와의 범죄에 동참했으면서도 자신의 범죄가 마치 하나님께 그 원인이 있는 듯이 또는 하와에게 그 원인이 있는 듯이 책임회피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아담의 범죄가 그의 언어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인간의 언어를 타락시킨 모습에 대해 야고보서 3: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또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또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13-14절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인간의 말을 타락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모든 인류는 자기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늘 사람을 죽이는 말, 사람을 절망시키는 말, 낙심하게 하는 말, 실족하게 하는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된 사람들의 언어생활의 실상입니다.
3) 언어의 회복
그러면 아담이 범죄 함으로 잃어버렸던 창조적인 언어를 우리는 언제 다시 회복하였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거듭남으로 우리 존재가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이 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다시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존재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난 이 존재의 변화는, 경이로운 변화이고, 획기적인 변화이고, 완전한 변화입니다. 그러기에 “이전 것은 자나갔다” 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보라 이제는 완전히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이렇게 존재가 변하게 되면, 이 존재의 변화는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타락된 언어를 다시 창조적인 언어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난 언어의 변화입니다.
3. 우리가 하고 살아야 할 말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들은 이제 어떤 믿음, 어떤 마음으로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까?
1) 우리말에는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주의 능력이 있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에도 창조주의 능력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면 우리의 말에 능력이 있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말에도 권세가 있어서 우리가 말로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말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도 우리 가까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대로 우리의 삶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자녀를 꾸중할 때 예수 믿고 잘 될 이놈의 자식아 라고 꾸중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는 아들을 꾸중할 때 ‘이 부자 될 놈아, 이 잘 될 놈아’ 라고 하면서 꾸중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나중에 잘되고 큰 부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한 말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성도야. 나는 교회 목사님에게 인정받는 성도야. 나는 가족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부모야.’ 라고 늘 말하고 사는 사람은 정말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는 아는 것이 없어,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야’ 라고 늘 말하는 사람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말은 마치 씨앗과 같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씨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하는 말은 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긍정적인 말의 씨를 뿌리고 살면 우리 삶에서는 그 말대로 긍정적인 일들이 열매로 맺혀지게 되고, 부정적인 말의 씨를 뿌리고 살면 우리가 말한 대로 부정적인 열매들이 우리의 삶에서 맺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되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오늘은 과거 여러분들이 믿고 말한 그대로 되어 진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의 씨를 뿌리면 그 씨가 자라서 그 삶에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신 것 같이 오늘의 나의 삶은 제가 과거에 말의 씨를 뿌려온 것이 바로 나의 현실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말한 대로 우리 미래가 그대로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떤 말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 불신의 말은 꿈속에서라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사용하며 살 수 있는 말은 두 종류의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또 우리에게 주신 말에도 능력이 있음을 믿고 늘 믿음의 말을 사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도 믿지 않고 또 우리에게 주신 말의 능력도 믿지 않으면서 내 기분대로 내 느낌대로 말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첫 범죄 현장인 창세기 3장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에게 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라고 한 이 말은 믿음의 말입니까? 불신의 말입니까? 믿음의 말입니다.
그러면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범죄 할 때 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한 말은 믿음의 말입니까? 불신의 말입니까? 불신의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말을 하면 그 믿음의 말을 한대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불신의 말을 하면 우리가 불신의 말을 한 그대로 범죄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말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의 이런 존재론적 회복과 함께 우리의 언어생활도 바꾸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던 전에는 불신앙적인 말을 하면서 살아왔을 지라도, 예수를 믿은 지금은 이제 믿음의 말을 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언어생활이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보고 있듯이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늘 그 입으로는 ‘죽겠다. 못살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말썽을 부리는 자식들에게 ‘이 빌어먹을 자식아, 바보 같은 자식아,’ 라고 말을 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자신도 알고 있지만 저절로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말을 고치기가 가장 힘이 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종류의 새와 벌래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 들일 수 있고 또 길들여 왔거니와 능히 혀는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언어생활을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도 그렇습니다. 저라고 예외일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불신의 말을 버리고 믿음의 말을 하며 살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는 내가 보는 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내가 판단하는 대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이 말씀하신대로 믿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불신의 말보다 믿음의 말을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시고, 또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보기에는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제 마음 속에 이런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으시다. 참 좋으시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지만 내가 볼 때는 그렇게 좋은 모습이 아닌 것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태풍이라든가, 병을 옮기는 병균이라든가, 또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믿음이 적었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곧 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그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요즘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어도 또 우리의 삶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는 처지일지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보고 계시고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보고 그렇게 말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여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나쁜 일들도 합력하여 좋게 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역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곧 대로 믿지 못합니까?
내가 좋게 볼 수 있어야 하고 내가 항상 기뻐하고 내가 항상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해 주시는 것임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믿음으로 이런 고백을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 3장을 보면, 성전 미문에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채 구걸하는 한 앉은뱅이를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병자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동일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믿고 일어나 걷게 된 것입니다. 아멘
요한복음 5장을 보면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동안 앉은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었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그 절망적인 병을 고침 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침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하실 때 그도 일어나 걸어갈 수 있다고 믿고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새벽기도를 하면서 저의 오늘날 형편이 이 사람보다 결코 낫지 않아 보였습니다.
여기에 교회를 개척한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38년 된 병자와 같이 세월만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찾아가셔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병자는 사실 낫고자 하는 의욕을 다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 병자는 예수님의 이 물음에 ‘낫고자 합니다.’ 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동문서답을 하듯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목회를 할 의욕도 교회를 성장시킬 의욕도 다 잃어버린 오늘 저의 처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때 이 병자는 믿음으로 자신의 침상을 가지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38년 된 중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현실을 개선해 보려고 하는 이런 의욕이 없고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기적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의욕이 있습니까?
목회자인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여러분에게 오늘 저의 설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주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즉시 말씀하신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말씀인 예수님의 생애에도 이 말씀의 창조적인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하시는 대로 그 즉시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기록해 주신 성경 말씀도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그 삶에게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말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이 하나님께 받아 가지게 된 말에도 역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말을 하면 우리가 말한 대로 긍정적인 역사가 우리 삶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말을 하면 우리가 말한 대로 부정적인 일들이 우리 삶에서 그대로 일어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매고 푸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말에 창조적인 능력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언어가 바뀌면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믿음의 말, 축복의 말, 긍정적인 말을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때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말한 대로 그런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미래가 있습니까?
그러면 먼저 믿음의 말로 미리 미래를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이 씨가 되어서 풍성한 열매를 여러분의 삶에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같이 말을 바꾸므로 인생이 바뀌는 복된 경험을 하고 사시는 우리 모두의 남은 생애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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